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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 09시 54분 등록
지난 주말, 맘을 먹고 화장실 휴지걸이를 샀다.

맘 먹고 하면 그토록 간단한 걸, 왜 그리도 오래 미련하게 참았을까.



화장실 휴지 걸이가 고장난 건 벌써 6개월 전의 일이다.

그 동안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누구도 그것을 교체하지 않았다.

교체하지 않은 이유는 거창한 게 아니다.

갈아야지, 갈아야지 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어느새 모두 불편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휴지를 변기 뒤에 올려두고 필요할 때 마다

손을 뒤로 뻗어야하는 번거로운 일을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불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일 도와주시던 아주머니를 내보내자

집안 살림에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지고,

많은 일이 내 책임이 되었다.

물론 휴지걸이도 이전보다 훨씬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갈아야지 하면서 또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 간단한 걸 왜 냉큼 실행하지 못할까,

생각해보니 또 다른 원인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원래의 휴지걸이는 금속이다.

그런 금속 휴지걸이를 어디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고 해도, 공구를 써서 달아야 하는데

그 일을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마트에 장보러 간 김에, 혹시나 하고 욕실 용품 섹션에 가보았다.

반갑게도 압착식 휴지걸이가 거기에 있었다.

3 킬로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제법 잘 만들어진,

세련된 디자인의 플라스틱 휴지걸이였다.



그것을 사다가 벽을 깨끗이 닦고 레버를 위로 한 번 올렸다 내리니

휴지걸이가 멋지게 벽에 '딱' 소리를 내며 압착되는 것이 아닌가.

너무 쉬워서 허탈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쉬운 데 6개월을 참고 지냈단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건 그렇게 불편을 감수하며 지내는 것이

휴지걸이 뿐 아니라, 찾아보니 꽤 많다는 사실이다.

금이 간 유리창, 현관 한쪽에 떨어진 블라인드,

아이방 옷장의 흔들거리는 손잡이,

뻑뻑하게 안닫히는 주방과 거실 사이의 미닫이 문,

한쪽으로 기운 주방 서랍,

잘 작동되지 않는 가스 렌지 버너 하나,

책으로 받쳐둔 책장의 받침대,

떨어져나간 붙박이장 안의 벨트 행거,

칠 때마다 불안한 컴퓨터 자판의 키 하나 등등

그 가짓 수에 실로 놀란다.

그것들은 모두 그냥 내버려두어도 당장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허비하는 쓸데없는 에너지를 날짜로 계산하면

정말 무시할 수 없는 량이 나온다.



인생과 관련시켜보니 이 일이 큰 교훈을 준다.

내 습관이나 행동 패턴 중에도 고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휴지걸이처럼 조금만 실행의 힘을 쏟아주면 쉽게 해결될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고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런 건 적당히 무시하고 편안해지거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맘 먹으면 개선할 수 있는 것들을

게으름 때문에 혹은 근거없는 두려움 때문에 내버려 두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건 작은 일로 알고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큰 일인 것을 알고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

어떤 건 시도하는 것보다 시도하지 않는 것이 당장 더 편안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도는 여전히 보람있고 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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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당팔
2008.03.11 14:40:49 *.157.208.130
한숙님의 행동에는 고쳐야 할 것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얼굴과 몸매에는 고쳐야 할 곳이 전혀 없을 정도로 완벽하였습니다.
4기 연구원에 최종합격하길 약간 기원합니다.
많이 할 필요까지 없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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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8.03.11 19:16:53 *.232.147.68
아.. 치과에서 신경 치료를 받다가 연말에 사고가 난 이후로
치료를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벌써 세달이 넘었네요.
정말 공감합니다. 치과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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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3.12 02:01:48 *.51.218.156
어당팔님, 무척 궁금했었는데 '마침내' 얼굴을 보게 되어서 몹시 반가웠습니다. 좋은 책을 4권이나 내셨다고요, 대단하십니다. 어당팔'이라는 이름, 압권입니다. 뜻을 알고보니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안해'되시는 분이 가끔 올려주시는 사진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동네, 좋은 집, 좋은 사람과 살고 계시는군요. 아마도 그것은 님의 좋은 기운들이 불러들인 것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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