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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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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5일 16시 07분 등록
코리아니티를 읽으며 그 저자인 인간 구본형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저에게 책은 언제나 저자와의 만남입니다. 아래 글은 저의 일기입니다. 다소 개인적인 일기를 여기 공개하는 것은 구본형이란 인물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이해가 여러분에게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시도하는 저에게 공개되지 못할 개인적인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자신에게로 자꾸 숨기만 하던 이전의 나도 이제 여기에 없습니다.

이 사이트 '커뮤니티'의 1681 번 글에도 인간 구본형에 대한 저의 글이 있습니다.

2007년 10월 3일

선생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날이다. 몇 몇 꿈벗 친구들과 자연산 햇 송이버섯 한 상자를 가지고 가서 선생님과 송이 파티를 하기로 했다. 평소 나는 그의 집이 궁금했다. 그가 쓴 글에 등장하는 그의 집 모습을 상상하며 그곳엘 갔다. 나는 그 어느 곳보다도 그가 글을 쓰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서재가 궁금했다.

주차할 곳이 없어 옆의 연립주택 주차장에 잠시 주차하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그는 송이버섯과 함께 구워먹을 고기를 사러 나가셨다고 한다. 시장을 보시는 선생님, 사모님은 마침 여행중이시다.

잠겨있는 대문에 선생님 문패는 보이지 않는다.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 본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이방인을 바라보던 잘생긴 진돗개 돌구가 짖어대기 시작한다.

여기 구본형, 그의 집에 도달하기까지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간절한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이 하나도 다르지 않고,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도 그대로이다.

그러나 내가 그의 집에 왔다는 사실, 그것이 내 인생의 새로운 행보를 증명한다. 4년 전, 운명은 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내게 찾아온 가장 흥분되는 행운이었고 나는 그것을 잡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나는 그에게 닿으려고 손을 무한정 뻗고 있었다. 그러나 손이 닿으려는 찰나에 모든 게 어긋나버렸고 나는 운명의 경계 밖으로 떨어졌다.

지금, 4년의 세월을 타고 나는 이곳에 왔다. 이제 막 나는 그의 집 계단을 한 걸음 올라선다. 순간 싸한 감동이 옆구리를 휘돌아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그의 집 계단을 천천히 올라 그가 마련한 디너 테이블에 앉는 순간, 내가 놓쳐버린 4년 전의 행운을 누군가 내 눈 앞에 가져다 놓은 듯 인왕산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지난 4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코끝이 아리다.

그곳에서 나는 송이버섯과 와인 반 병으로 멋지게 취했고, 자리를 함께 한 좋은 사람들에게 굳이 그 흥취를 감추지 않았다. 기분 좋게 취하신 선생님 역시 말 끝에 나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따뜻한 애정을 실어주셨다.

아, 발 밑으로 굽어 보는 짙푸른 저녁 하늘과, 점차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달과, 둥그런 와인 잔을 통해 내려다보는 인왕산 불빛들과 세상 사람들,
와, 좋다, 정말 좋다.

선생님은 맘 만 먹으면 무릉도원에 앉은 신선처럼 고즈넉히 풍류를 즐길 수가 있구나. 그의 집이 좋고, 그 안에 향기를 풍기며 앉아 계신 선생님도 좋다. 자신이 가진 것을 맘껏 누리고 사람들과 나누려 하는 그가 멋지다.
그 수혜를 지금 우리가 이렇게 받고 있지 않는가.

고기와 버섯을 굽고, 밥까지 해먹자고 주동하고, 냉장고에서 가자미 식혜를 뒤져 찾는 그의 모습은 왜 그리도 푸근하고 인간스러운지. 와인이 목을 타고 흐르는 속도 만큼 느리게 한 자 한 자 음미하며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 안에는 사는 것을 편안히 즐기는 자의 여유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자의 열정이 은은히 배어난다.

책에서 구사하는 말과는 다르게 소박한 그의 입의 언어들이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한다. 그의 느린 말은 왠지 한없는 신뢰를 준다. 말과 생활이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 자신 뒤집어도 먼지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아니 먼지가 나는 게 인간이라고 먼저 자수하여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게 그일 것이다.

그가 구운 버섯과 스테이크와 대하가 한 없이 맛있고, 씁쓸하고 시큼한 된장으로 끓인 찌게가 그토록 구수한 것은 그가 거기에 바람으로, 구름으로 양념을 쳤기 때문이다.

‘한숙이, 좋아. 10대 풍광 보고 참 좋았어.’

말 사이에 뜸을 오래 오래 들이며 말씀하시는 선생님. 흐릿한 조명 속에 어슴푸레 드러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 이미 발그레 닳아 오른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좋아, 잘 할거야’ 다시 뜸을 오래 들이는 그의 말이 이어지고 내 머리 속으로 붉은 포도주가 알싸하게 흐른다.

한 층 높은 곳에 있는 그의 소박한 서재와, 그 밖의 넓직한 나무 발코니..
불을 다 끄고 밖을 보자는 한 친구의 제안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별이 쏟아지는 그의 발코니에 우리들은 그다지 말이 없이 오래 서 있었다.
그곳에서 바라본 카시오페아는 어린 시절 시골 마당 멍석 위에 누워서 바라보던 바로 그 카시오페아다.

하나도 달라진 건 없다. 내가 소망한 것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가슴에 쿵쿵 진동이 인다. 그래 진동이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술이 너무 취해 힘이 든 나머지 화장실에 달려가 여러 번 토해내는 순간까지 그 진동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 진동은 계속되었다.
진동과 함께 선생님을 만났던 2003년 8월 7일 교보 애비뉴 레스토랑과,
매운 낙지 볶음 집, 그리고 맥주를 마시던 종로2가 대로변 카페가 떠오르고, 그곳에서 그에게 한 말들이 떠오르고, 그가 적어준 전화번호를 들고 찾아간 지리산 단식원이 떠오르고,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르려던 계획이 어긋나 이틀 만에 짐을 싸들고 돌아와야만 했던 아픈 과거사가 떠오르고, 우리 때문에 고통 받으신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의 고통을 외면해야 했던 그 때의 절박함이 떠오르고, 4년 동안의 아픔이 살아온다.

4년 전에 나를 만나달라고 그에게 보냈던 편지를 찾아내고, 물끄러미 그 동안의 세월을 들여다 보는 동안, 내가 많이 달라진 걸 느낀다. 통증은 여전하지만그 통증의 색깔은 완전히 다르다. 아픔조차 힘이 되는 걸 느낀다.

이제 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나는 나답게 숨쉬며 살 것이다. 그건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더 이상 겁쟁이로 남지 않겠다는 다짐이면 된다.

선생님에게도 그 ‘황홀의 일상’을 갖기까지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싸움이 불행하거나 고되지 않은 것은 싸움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스스로의 꿈’ 이기 때문이다. 그 염원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내가 나답게 살려는 지극히 소박한 소망이다.

소박한 소망마저 현실이 될 수 없었던 미친 세상에 나는 살고 있었고,
그래서 내 마음이 그토록 병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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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15 18:51:36 *.36.210.80
인생의 어느 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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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8.03.15 20:51:52 *.109.90.116
내가 글로 담아보고 싶었던 또 다른 그 저녁의 풍경이 누나 덕분에 되살아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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