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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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체 보기 힘든 죽은 노란빛의 촌스런 색깔, 인터넷에서 대충 긁어 붙인 듯한 그림 하나가 덩그러니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禪의 황금시대>. 참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책이었다. 속된 표현으로 억울하게 생겼다고나 해야 할까. 과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도 없었고 읽었을 리 만무한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책의 외관은 그렇다 치고 제목도 저자도 영 생소하기만 했던지라, ‘류시화’라는 익숙한 이름이 보이자 마침내 그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폭 내쉬는 나였다.
연구원 2차 과제 목록이 발표되던 날부터 유난히 걱정스럽던 <선의 황금시대>는 역시 우려한 만큼, 시작부터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래, 차례부터 나는 이미 넋이 빠져 버렸다. 禪의 심지, 달마와 제자들, 혜능의 가르침, 교외별전, 불입문자, 일조풍월, 기이한 보살 등 어디 하나 눈에 반가운 제목이 보이지 않고, ‘참고한 책과 글’에 이르러선 마침내 악! 하고 괴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깨알 같이 까만 한자로 가득한 참고문헌과 인용문들이 와구와구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할 순 없는 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옮긴이, 류시화 씨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는 약간의 친분이 있다. 물론 나만의 일방적인 친분이지만, 그를 통해 ‘선의 황금시대’로 갈 수 있는 작은 지름길만 알아낼 수 있다면 약간의 일방적인 친한 척도 괜찮지 않을까.
혹시 <배꼽>이라는 책을 기억하는지. 오쇼 라즈니쉬의 작품을 류시화 씨가 번역하여 낸 것인데, 인생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탐구를, 유머라는 가벼운 웃음에 녹여낸 것이 압권이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 잊지 못하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배꼽’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잠깐 전문을 소개하겠다.
친한 두 친구가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창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자네, 역시 눈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눈이 없으면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도 볼 수 없단 말이지.”
“아니, 난 팔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팔이 없다면 그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안아 줄 수 없지. 눈만 있으면 뭐하나.”
“그럼 다리는? 다리가 없다면 우린 아무데고 갈 수가 없잖아. 하긴 우리 몸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 모두 제 역할이 다르니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가장 중요한 기관보다는 필요 없는 걸 찾는 게 더 빠르겠군.”
“그렇다면 배꼽이 우리 몸 중에 가장 쓸 데 없는 것 같아. 보기에도 징그럽고 옷 속에 늘 감추어져 있으니 특별히 할 일이 없지.”
“그래, 맞아. 배꼽이야 말로 불필요한 존재지. 어느 곳 하나 써먹을 데가 없군. 게다가 냄새는 어떻고!”
두 친구는 껄껄 웃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자 지켜보던 다른 한 친구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배꼽이야말로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나머지 두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배꼽이 가장 중요하다고? 도대체 무슨 말이야? 배꼽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나머지 한 친구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배꼽이 없다면, 누워서 감자를 먹을 때 소금은 대체 어디에 놓느냐 말이지!”
그 옛날 정말이지 배꼽 빠지게 웃었던 이 이야기가 지금 문득 떠올랐다. 물론 그 배꼽 빠지는 웃음 뒤에는 배꼽냄새보다 더 아릿하고 중독성 강한 철학적 아이러니들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다. 류시화 씨가 옮긴이의 말에서 거론한 절대의 ‘거시기’를 맨 처음 맞닥뜨린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수다스러움과 억지스러움, 천박한 덧칠과 거추장스런 꾸밈이 없는 그것 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혹시라도 갑작스럽게 코를 찌를 배꼽냄새를 경계하면서 말이다.
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한 줄기 햇빛, 산을 둘러싸고 흐르는 안개, 죽어가던 이웃집 할머니의 얼굴, 과연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옮긴이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겐 이런 것들의 특별한 의미를 찾는 일보다는, 순간순간의 느낌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설악산 구름 사이의 한 줄기 신성한 햇빛을 목도하던, 복수가 차올라 남산만큼 부푼 할머니의 배를, 얼굴 대신 바라봐야 했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살아있음에 대한 환호, 죽음과 맞닿은 공포를 체험할 수 있었던 생생한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순간의 느낌들이 찰나의 감정으로만 끝났던 것인지, 삶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작은 힌트가 되어왔었는지는 딱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옮긴이의 말대로 누군가 인생의 큰 숙제를 나대신 쓱쓱 풀어 주면 좋겠다는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품어 왔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엄마의 자궁 밖으로 밀려 난 태초의 순간부터, 제 주먹만한 자궁 안에 새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나의 그 철딱서니 없는 생각에 대한 시원한 답변은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아마도 옮긴이는 모두가 궁금했지만, 너무 긴 침묵에 질문조차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면서 그는 ‘우주적인 농담’을 내게 걸어왔다. 신비한 수수께끼, 경악할 돌발사, 선악을 뛰어넘는 통찰, 그것들을 감히 ‘농담’이라는 가벼운 조크로 이름붙이면서 말이다.
이쯤 되면 도전해 볼 만 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것들이 다 무엇이람? 禪의 황금시대? 혜능과 교외별전, 견성성불 이 모두가 가벼운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니 어쩌자고 내가 잔뜩 겁을 집어 먹었던 걸까. 농담을 걸어온다면 능구렁이처럼 받아줄 것이다.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까지 세심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나는 뚜벅뚜벅 ‘禪의 황금시대’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발걸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궁금하지 않았던, 특별할 것 없었던 것들이 궁금해지고 특별해 지기 시작했다. 육조 혜능부터 시작된 선의 작은 불꽃이 거칠 것 없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할 즈음, 선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과 비논리적인 유머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얼떨떨하고 정신없는 횡설수설에 가끔은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였지만 그것이 바로 禪의 정수라니, 어쩔 것인가.
책을 다 읽고 난 직후, 멀미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찌릿찌릿 구린내도 나는 것 같다. 책을 읽은 것인지, 호되게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진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내가 禪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어이없게도 지금 배꼽이 생각난다. 禪은 이런 것일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 그러나 없으면 의외의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것. 누워서 감자를 먹을 때, 소금을 놓을 자리.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배꼽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