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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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시절부터 창작자를 편집자 또는 내부 검열관과 분리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 이유는 창작자가 자유롭게 호흡하고 탐험하고 표현할 공간을 가지기 위함이다."
(나탈리 골드 버그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中 - )
인지상정.
누군들 이왕 쓰는 글인데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고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 싶을 것이다. 그게 최선이라면 차선은 최소한 엉성해 보이는 글이 되는 것은 막고 싶을 것이다.
문장의 앞뒤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거나 논리적 호소력이 느껴지지 않거나 유려한 문장이 나오지 않을 경우 남들이 이 글을 봤을 때 어떤 비난을 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하게 된다. 글의 중심이 내가 아닌 타인으로 이동한다.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인지 남에게 보이고 싶어 쓰는 글인지 도통 헷갈려 버리고 그러다가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은 괴로움이다. 나는 왜 누구처럼 술술 써내려가지 못하는 걸까. 그런 자책으로 더욱 움츠러들고 쓰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지금도 글을 쓰다보면 불쑥 그러한 검열자가 나타난다. 이 단어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나타내는지 이 말보다 더 멋진 다른 말은 없는지 전체적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수시로 나타나 감시하고 참견한다. 그나마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로는 가급적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글을 쓰고자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똑같이 두려운 감정을 느끼더라도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고 있을 때와 알고 있을 때의 그것이 다르듯 글쓰기에 여전히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이 왜 어렵게 느끼지는지의 실체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래서 글이 쉽게 쓰여지지 않는 경우를 만나도 전에 비하면 덜 초조하고 약간 에둘러 가다보면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오류는 피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검열관은 글쓸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말하기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없어졌겠지 하고 방심하고 있다보면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난다.
아마 말하기에 대해 명시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완고한 내적 기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말의 앞뒤가 어긋났다고 생각하면 자꾸 그것에 신경이 가고 어떻게든 그것을 바로 잡아보고 싶어한다. 다음 할 말을 해야 하는데 앞에 했던 말에 자꾸 집착하다보니 해야할 말은 더욱 떠오르지 않고 어색한 침묵이 길어진다. 내 말을 듣던 사람들은 저 사람 지금 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듣던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어제..
그 검열관을 봤다. 글쓰기에만 나타나는 줄 알았던 그 검열관은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입으로 말할 때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말하기에 대한 부담이 조금 덜해질 것도 같다. 이제부터라도 편안하게... 자신을 편안하게 내버려두고 말해 보련다.
IP *.162.86.19
(나탈리 골드 버그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中 - )
인지상정.
누군들 이왕 쓰는 글인데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고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 싶을 것이다. 그게 최선이라면 차선은 최소한 엉성해 보이는 글이 되는 것은 막고 싶을 것이다.
문장의 앞뒤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거나 논리적 호소력이 느껴지지 않거나 유려한 문장이 나오지 않을 경우 남들이 이 글을 봤을 때 어떤 비난을 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하게 된다. 글의 중심이 내가 아닌 타인으로 이동한다.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인지 남에게 보이고 싶어 쓰는 글인지 도통 헷갈려 버리고 그러다가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은 괴로움이다. 나는 왜 누구처럼 술술 써내려가지 못하는 걸까. 그런 자책으로 더욱 움츠러들고 쓰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지금도 글을 쓰다보면 불쑥 그러한 검열자가 나타난다. 이 단어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나타내는지 이 말보다 더 멋진 다른 말은 없는지 전체적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수시로 나타나 감시하고 참견한다. 그나마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로는 가급적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글을 쓰고자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똑같이 두려운 감정을 느끼더라도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고 있을 때와 알고 있을 때의 그것이 다르듯 글쓰기에 여전히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이 왜 어렵게 느끼지는지의 실체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래서 글이 쉽게 쓰여지지 않는 경우를 만나도 전에 비하면 덜 초조하고 약간 에둘러 가다보면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오류는 피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검열관은 글쓸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말하기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없어졌겠지 하고 방심하고 있다보면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난다.
아마 말하기에 대해 명시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완고한 내적 기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말의 앞뒤가 어긋났다고 생각하면 자꾸 그것에 신경이 가고 어떻게든 그것을 바로 잡아보고 싶어한다. 다음 할 말을 해야 하는데 앞에 했던 말에 자꾸 집착하다보니 해야할 말은 더욱 떠오르지 않고 어색한 침묵이 길어진다. 내 말을 듣던 사람들은 저 사람 지금 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듣던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어제..
그 검열관을 봤다. 글쓰기에만 나타나는 줄 알았던 그 검열관은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입으로 말할 때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말하기에 대한 부담이 조금 덜해질 것도 같다. 이제부터라도 편안하게... 자신을 편안하게 내버려두고 말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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