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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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의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소형 수첩(다이어리)이 들어있다. 내가 쓰는 수첩은 매일의 일정이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시간대 별로 한 줄 씩 표시되어 있다.
나는 매일 늦어도 6 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가벼운 운동이나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샤워하고, 7시에는 아침을 먹어야 다른 직원들 보다 조금 빨리 출근할 수 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차질을 빚으면 그날 업무를 위한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게 된다. 출근하면 오전 중은 보통 한 두 건의 회의가 있다. 12 시 점심 약속이 강북 쪽이면 오전 회의는 11 시에는 마쳐야하고, 그 전에 결론을 내야 한다. 토론이 길어지면 회의가 지체되니 가능한 효율적으로 진행을 해서 빨리 결론을 내도록 해야 한다. 오후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점심 식사 후 늦어도 1시 반에는 나와야 한다.........]
이렇게 일주일은 흘러가고, 어느 듯 한 달이 되며 계절이 바뀌고 , 헌 수첩은 누더기가 되고 연말에는 또다시 빳빳한 새 수첩으로 교체된다. 이것이 나의 시간이며 내가 정의하는 시간이다.
시간은 내 소형 수첩이다. 그것은 구속이다.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시간과 과제들을 알려주고, 나는 그 시간들에 ‘매달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쫓아간다.
다른 한편, 그 것은 내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상징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 그들을 통하여 나를 확인한다. 어느 일주일, 수첩에 빈 칸이 많으면 편안하기보다 왠지 불안하고 허전하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가 ?
퇴직을 하게 된 뒤, 금년부터는 이런 수첩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냥 하루가 한 칸으로 된 수첩을 선택했다. 약속도 많지 않아 띄엄띄엄 적어놓다 보니 오히려 적어놓고도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얼마 전에는 전직 동료의 자녀 결혼식이 있었다. 일요일 저녁 7시에 맞추어 집 사람과 같이 차려입고 연세대 동문회관에 갔다. 어쩐지 설렁하다. 주차장 진입구에 있는 관리인에게 오늘 여기 결혼식 아니냐고 물었더니, 오늘 오후는 결혼식이 없다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인가 ? 급히 수첩을 꺼내보니 결혼식은 토요일인 ‘어제’였다. 하루하루,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면서 시간은 내 의식에서 조금씩 멀어져 나간다.
시간은 이제 내게 자유이다. 수첩에 ‘매달려’ 쫓아다녀야 할 일도 많지 않고, 사람들을 재촉하고 시간에 맞추기 위해 내달려 갈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설프고 익숙하지 않은 ’자유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게 정말 자유인지 아니면 또 다른 구속인지 당황스럽기도 하다.
수첩은 이제 일일이 적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나를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제는 내가 필요 없어졌고, 사람들은 나를 잊어가고 있는 것이다. 수첩은 더 이상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과거에 나를 규정하던 직업과 일은 사라졌다.
시간은 내 환경을 변화시키고, 나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이제 다가오는 시간의 파도 속에서 나 자신의 새로운 삶을 규정하고 찾아나서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지, 내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길지.
그러나 이제는 과거같이 시간의 파도에 떠밀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도 모르고 살고 싶지는 않다. 시간의 파도 위에 타 올라 너울거리며 때로는 빨리, 때로는 늦게 내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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