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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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 [나에게 시간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 식탁에 딸기를 올렸다.
제철 음식을 먹으라고 했던가? 잠깐, 딸기가 언제가 제철이지?
늦여름이던가? 아님 초여름? 기억이 가물가물 했지만, 어릴 적 토마토랑 같이 먹었던 기억이 딸기의 제철을 어림 가늠하게 한다.
요즘 딸기가 제철이 어딨어? 정말 그러네, 언제든지 마트에만 가면 사시사철 싱그럽게 전시된 딸기를 사먹을 수 있는 때를 살고 있구나.
1886년, 세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발명, 독일 벤츠
1893년, 여성에게 처음 투표권이 주어진 해, 뉴질랜드
(그리고 1917년 러시아, 1928년 영국, 미국의 흑인여성들은 1960년대까지도 투표권이 없었고, 스위스 또한 1971년까지도 투표권이 없었다.)
1903년, 12월 17일, 12초 동안 인류가 처음으로 하늘을 날다, 라이트형제
1936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텔레비젼 방송 실현됨.
1969년 7월 16일, 인류가 처음 달에 발을 디뎠다. 닐 암스트롱
비우기 위해 떠났던 영국생활 도중, 나는 하숙집 작은 서재 한 켠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것은 20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흑백사진들과 함께 엮은 한 권의 화보집이었다. 잠시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동차, 여성의 투표, 비행기, TV, 우주여행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백년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의 긴 역사를 두고 볼 때,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아주 최근에 다시 말하면, 어젯밤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당연스럽게 비행기를 타고 영국에 갔었고,
매일 아침, 귀찮도록 사람 길을 가로막아서는 자동차들의 소음들,
투표일이 되면 그 잠깐의 시간마저도 이제는 귀찮아지던 기억들,
리모콘만 누르면 언제는 우리는 우주의 신비를 거실 쇼파에 드러누워 볼 수도 있고,
맘만 내키면 지구촌 구석구석을 자동차로 여행할 수도 있게 되었다.
시간을 백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꿈조차 꾸기 어려웠던 일들이지 않았던가.
불과 백년 사이에 기적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기가 나왔다. 그리고 사진도 나왔다.
가물가물해지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과거의 순간들이 그리고 잘 나가던 한 때의 젊음도 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영원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오드리 햅번의 아름답던 젊음도,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조롱하며 혀를 내밀던 모습도,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도꼬리 입은 헤밍웨이의 카리스마도, 9.11 테러로 사라진 쌍둥이 빌딩도, 슬픈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 곁을 떠난 아프리카 어느 고릴라에 대한 연민까지도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마법사 카슈의 짓이었다.
아니, 이제 우리 모두가 단지 몇 푼의 수고만 들이면, 디지털 카메라 속에, 휴대폰 속에 그리고 미니홈피와 인터넷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해질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축지법을 쓰고, 개인마다 타임머신을 가진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하지만 그 기적 같은 영속의 시간 속에서,
멀미나는 시간여행 속에서, 정작 굶주리고 잊혀진 하나의 진실이 있다.
‘돼지들의 소풍이야기’가 주는 교훈처럼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존재를 빼놓고 센다.
늘 내가 빠져 있다.
잠시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이 정신없는 롤러코스터 속에서 우리는 정신줄을 놓치게 된다.
그 속도와 쾌락에 미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럼, 나에게 시간은 무엇인가.
누구에게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 않는다.
누구는 헤어진 사랑을 잊지 못하고 스스로를 과거의 정지된 한 순간에 가두기도 하고,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성 쌓기에 빠진 어린 아이는 시간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육체라는 껍데기와 나 개인의 삶은 절대 숫자로 사망기록부에 그 유통기한을 표시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 죽은 사람들조차 그들의 말과 글을 통해서 지금도 만나고 있다. 조셉 캠벨이 그렇고, 버틀런드 러셀이 그렇고, 칼 구스타프 융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다.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기껏해야 백년을 넘기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에 얽매어 그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 것인가. 또는 이미 남들이 정해놓은 질서와 체계 속에 자신을 묶어두고 충직한 톱니바퀴의 하나로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고 꿈꾸는 세상과 무한소통하면서 살 것인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자유로운 삶은 기껏 백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불멸의 삶을 살 수도 있다.
불과 사백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성종때까지만해도 여성들에게 제사권과 유산상속권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한국의 봉건적 가부장제도도 그 뿌리의 깊이가 사백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매우 오만해 보이는 미국의 역사도 채 이백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국제사회에 얼굴을 내민 것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부터니까, 채 육십년밖에 안된 일이다. 다시금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영국에서 이혼녀의 삶은 한국에서처럼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자신의 삶을 선택해가는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다면 영국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 편견과 고통조차도 영원하지 못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매우 새삼스러운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럼, 다시 묻는다.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기껏 백년을 넘지 못하는 절대 시간이 여전히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얽매여 있는 우리 스스로 때문인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 자유 속에 살면서도 정작 여전히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혀를 깨물었다. 딸기를 먹다가.
2010년 2월말, 어느 아침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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