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 조회 수 2404
- 댓글 수 14
- 추천 수 0
컬럼 4. 내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가?
이전에는 한 번도 내 속에 내가 모르는 무엇이 숨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나의 과거와 최근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니 조금씩 내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나에 대한 단초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가지는 심상은 불쑥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어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사적인 대응이나 감정 상태에서 어떤 단서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내 눈 앞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집으로 걸어 가던 길에 오산 시청 사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탄 20 대 배달원 청년과 하얀 승용차가 부딪히는 사고를 바로 앞에서 접하게 되었다. 충돌의 순간에 내 눈 앞에서 그 청년은 붕 떠올랐다가 그 자리에 떨어지면서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 들고 엠블란스가 달려 오면서 어수선해진 그 장소에서 나는 가만히 서서 기도를 했다. 제발 그 청년이 피를 닦아내고 몇 바늘 꿰메면 곧 괜찮아질 정도의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외면적인 생각과는 달리 깊은 마음 속에서는 심한 떨림이나 경련, 동요와 같은 충격과 공포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런 사고에 무감각하다는 점이 도리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믿기지 않겠지만 만약 그 차에 치여 넘어져 있는 것이 동물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쯔쯧하고 그냥 지나쳐 갔겠지만 난 아마 달려오는 차들을 다 멈춰 세우고 그 동물을 구해 병원에 데리고 갔을 것이다. 나는티비에서 동물이 다치거나 길에서 죽은 동물이나 길을 잃은 동물을 보면 가슴이 너무 아프고 너무 슬퍼서 눈물이 무의식적으로 주루룩 흐른다. 아무리 애써도 의식적으로 제어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죽은 동물이 있으면 미리 알려줘 눈을 감을 시간을 주고 또는 ‘저기 도로에 있는게 뭐지?’라고 물으면 타이어 터진 것이었다는 하얀 거짓말을 하곤 한다. 이유는 내가 우는게 보기 싫어서이다. 나는 동물이 다치거나 죽은 모습을 보면 마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된양 서럽게 울곤 한다. 나는 항상 이 원인을 찾고 싶었다. 사후의 생을 인정한다면 나는 전생에 동물이였을까? 많은 이론을 앞세워 추측해보앗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는 사람보다는 도리에 동물에 대한 근본적인 연민이 있다. 내 안에는 쇼펜하우어와 카를 융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동물에 대한 연민이 숨어져 있다는 것이다.
지난 주에 읽었던 <서양 철학사>를 다시 꺼내들었다. 24장 쇼펜하우어 959쪽 선명하게 그어진 나의 형관펜 아래의 글은 그가 상해를 입힌 여인에게 평생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서 20여년 살아오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가 자신의 회계장부에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할멈이 죽었으니 짐도 벗었다.” “그의 삶에서 동물에게 친절한 면을 제외하면 덕을 행동으로 보여준 증거는 찾기 어렵다.” 나 역시 쇼펜하우어처럼 사람에 대한 연민은 없는 것일까? 카를 융의 <기억 꿈 사상> 책에는 “나는 항온동물이면 모두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와 아주 유사하고 우리의 무지를 나누어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그 동물들을 좋아했던 것은 그것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혼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믿기로는 우리가 그 동물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물들도 우리처럼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불안과 신뢰를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바로 이 문장이 내가 동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마음속 연민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나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나는 나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동물에 대한 연민을 주변에 잘 이야기 하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나의 거의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인 동물에 대한 교감이나 애정을 나타낼 때 주변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를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많이 느꼈었는데, 이러한 주변의 인식이 너무나 싫어서 였다. 한국은 아직 동물을 사람처럼 동일시하는 사람을 약간 정신병자(?) 처럼 대 놓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나는 늘 내 감정을 숨기고 살아야했다. 우리들은 인간적으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각자 자유롭게 사는 삶을 지향하고 그 안에서 본인들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동물에 대해서만큼은 카를 융이 언급한 것과 같은 동물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개체적 존엄성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사회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나는 본질적으로 동물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사례로 나는 동물들의 눈빛이나 울음 소리만 보고 들어도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방 느끼고 이해하는 편이다. 몇 달전 내가 키우는 개가 나에게 달리는 차 안에서 변이 마렵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더니 우리 남편이 이상하다는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병원에 입원할 날이 멀지 않았네’라고 하였다. 하지만 차가 멈추고 문을 열자마자 개가 멀리 안 가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변을 보았다. 원래 개들은 사람처럼 급하다고 그 자리에서 변을 보기보다는 한참 뛰어다닌 후 주변 냄새를 맡다가 일을 보는 편인데 그날은 바로 차 옆에서 변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나를 더욱 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런 경우처럼 동물들의 슬픔, 기쁨이 나는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보기만 해도 그들의 느낌이 전달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나는 내가 정말로 이상한 것은 아닌가 하고 계속 고민을 해왔다. ‘동물을 인간이랑 거의 동일시하는 이것이 정말로 병인가?’ ‘각성되지 않는 나의 심적 상태는 무엇일까?’ 등등의 생각을 해 보았었다. 그래서 한 때는 병원을 찾아 정신분석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정도였다. 그런데 카를 융의 저서에 써 있는 글이 나에게 많이 위로가 되며 카를 융과 쇼펜하우어와 사상과 그들이 내놓은 이론과는 별개로 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물에 대한 연민, 그것의 인식만으로도 그들과 교감을 느끼면서 나의 마음 속의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주 가끔은 나의 이러한 인식이 일반적인 인식으로 대접받는 사회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곤 한다. 돌아 보면 다녀본 나라 중에서 미국이나 특히 슬로베니아, 인도등이 나에게 딱 맞는 장소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는 도로 위에 소가 서 있고, 머리 위로 원숭이들이 뛰어 다니고 , 길에는 개와 고양이가 사람들과 담요 한 자락에 사이좋게 몸을 같이 누이고 있다. 그러한 곳이 나에게는 천국처럼 보인다. 지난 여름 변경연에서 떠난 슬로베니아 여행에서는 레스토랑에서 주인과 함께 온 개들에게도 물을 가져다 주는 모습을 보았는데, 동물들을 보고 그들의 목마름을 알아보아 주는 그곳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올 수 있을까?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동물들에 대한 숨어 있는 연민 이외에도 또 다른 숨겨진 나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깊은 나락의 순간에서도 스스로 밝은 빛을 찾아내는 모습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그 사례로서는 나의 아이들의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로 많은 힘든 일들을 겪었다. 아이가 희귀병에 걸렸는데 치료약도 제대로 개발되어 있지 않아 거의 80% 이상 죽는다고 했고, 또한 치료시 아이가 사망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인란에 울면서 보호자 사인을 해야 했던 것이 나였다. 나의 의식적인 삶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절망 가운데 눈물로 지새는 모습이었지만, 소리없이 나를 움직이는 내면의 나 즉 나의 무의식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라고 생각하면서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아이를 돌보는 일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그 무의식 속에서 나는 주위가 환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모두가 치료할 수 없고 곧 죽을꺼라 여겼던 우리 아들은 지금 너무나도 건강한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그와 유사한 경험은 또 있다. 그 죽을 뻔 하다 살아 남은 우리 아이가 3년뒤인 네 살 때 너무나 큰 화상을 입었다. 왼손이 돼지기름이 담긴 후라이팬으로 들어가며 튄 기름에 가슴과 얼굴 등 13 곳에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 당시 왼손은 거의 다 붙은 상태였다. 의사도 동물성 기름은 깊숙이 파고들어 화상의 정도를 알 수 없으나 지금 상태에선 왼손을 오른손 크는 속도에 맞춰 수술을 해야 하거나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쥔채 펼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내 무의식 속에는 또 한 번 어떤 밝은 빛이 보였다. 사고 후 익은 살을 밀어내는 작업은 거의 한 달 동안 계속 되었다. 까무러치게 우는 아이를 잡고 있는 나는 하지만 울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을거란 무의식이 나의 의식을 제어했다. 두 달 만에 의사를 통해 ‘아빠와 낚시를 가도 되겠구나’ 하는 말을 들었다. 이런게 기적이란 거구나 하면서 의사들이 놀라와 했다. 흉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내가 한 노력은 그 후 6개월간 계속 되었다. 그 결과 얼굴이나 가슴에는 흉터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자부했었는데 왼쪽 코 옆부분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 관리를 못 해준 부분 한 곳에 조그만 흉터가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화상의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후 나는 뼈 밖에 안 남아 앙상한 아이의 왼손의 힘을 길러주기 위해 첼로를 가르쳤다. 그런 아픔 덕분에 아이는 이제는 첼로까지 연주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난 살아 오면서 이와 같이 기적과도 같은 사례들을 나의 삶에서 많이 겪었다. 하지만 난 지금도 밝게 웃고 있다. 마치 카를 융이 병원에서 환자를 대한 것과도 같다. 돌아보니 이것은 아마도 내 속의 무의식이 내 삶의 행복한 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나락과도 같은 순간에 보았던 밝은 빛과 동물에 대한 연민, 이것은 나의 삶을 바꾸어 줄 것이다. 한 때 고난뿐이었던 나의 삶은 먼 시간 후에 돌아보면 아름다운 영화 한편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무의식이 아마도 이전처럼 앞으로도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