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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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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6일 23시 25분 등록
죽음을 시뮬레이션하다.

나는 ‘나의 죽음’을 시뮬레이션 해 본적이 있다. 삶 속에서 ‘수용소’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미래지향적인 나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선 상에서 삶의 마지막 단계로서 내 삶이 완성되는 순간을 의미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로타바이러스가 유행했고, 두 아이는 번갈아 입원을 했다. 소아 병동의 1인 실에서 남편을 제외한 온 가족이 지냈다. 두 아이가 퇴원하자, 나를 기다리는 것은 이사였다. 이삿짐을 다 풀고 나니 비로소 피로감이 몰려왔다. 동네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순간 항문에서 피가 왈칵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침대 시트를 피로 물들인 나는 너무나 민망해서 죄송하다는 인사만 하고 얼른 나오려는데 치료사가 나를 붙잡았다. 목에 혹이 잡히니 빠른 시간 내로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곧 바로 이비인후과에 갔고 갑상선에 3센티가 넘는 혹이 자리잡은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인파선과 유방에도 멍울이 있으니 정밀 검사를 권유했다. 갑상선암 여부에 상관없이, 혹이 크기 때문에 수술은 해야 한다고 했다.

어수선했고, 실감도 안 났고, 단지 혹이 커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못 미더웠다. 큰 병원에서 체계적인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항문, 대장, 위, 유방, 갑상선의 순으로 두 달간 검사만 했다. 결과는 내 몸 곳곳에 크고 작은 혹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다 달고 살아도 무방하다라는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나는 이른 아침 시간 큰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책 읽어주기 봉사를 하고 있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갑자기 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세상이 암흑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힘을 주어도 눈을 비벼 보아도 책의 글자는 뿌옇게 보일 뿐이었다. 하필이면 내 딸이 있는 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평소 난감한 상황이 되면 어느 정도 쇼맨십을 발휘해서 유연하진 않지만 최대한 유연한 척 얼렁뚱땅 넘어갔던 나였다. 하지만, 내 딸 앞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식은 땀이 흐르고 어질어질했다. 그 날 따라 학부모도 몇 명 보였다. 이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책 읽기를 다른 학부모에게 맡기고 조용히 나왔다.

그렇게 글자가 안 보이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안과 전문의는 그저 ‘노안’이 빨리 왔다고 진단했다. 겉보기와 다르게 약하게 타고난 나는 노화도 빨리 진행되는 것일까. 그리하여 미래를 시뮬레이션 해보게 된 것이다. 즉, 노화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을 시뮬레이션 해 보게 된 것이다. 글자가 안 보이는 세상은 내게  ‘수용소’와 같았다.

인생이 ‘초’라면, 죽음은 다 타버린 ‘초’일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이 꺼져가는 ‘초’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가족들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아이들에게 사랑을 충분히 표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양가 부모님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를 하며 살아온 것이 뿌듯했다.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과의 인간 관계에서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두번째로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기에 여한은 없었다. 하지만 학생이나 직장인으로서 세상에 나를 맞추며 살아온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몇 해전, 위암 수술을 앞 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삶이 어떠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는 내 예상과는 달리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아버지가 다니셨던 직장에서 80년 대 노조를 만든 것, 그 일에 주도자였던  것이었다. 그 일 때문에 이후 평생 동안 고생했지만 다시 태어나도 ‘옳은 일’을 선택할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세번째로,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내 소명을 다한 삶의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졌다. 나는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 글은 엉긴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지만, 점차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부동산과 주식의 시세 차익을 내는 법이 아니었다. 나의 삶 속에서도 반드시 남기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자세히 떠오르지 않아 왜 지난 날들을 기록하지 않았나 후회했다. 내가 지방의 중소 기업에서 일했을 때, 대한민국 장애인들의 노동 실태를 기록했어야 했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장애인 천국인 미국의 장애 복지 제도를 기록해 두었어야 했다. ‘기록’을 넘어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작년 5월에서 9월까지, 삶 속의 수용소를 경험한 후, 나는 다시 책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시력을 회복했다. 제일 먼저 찾아 읽은 책은 문학사상사의 무삭제 완전판 <안네의 일기>였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수용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끝이 난다. 안네는 자신의 기록인 일기를 남기고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삶 속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내 안에 살아 남아 나에게  ‘기록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안네를 생각하며 얼마나 안타까워 했던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시련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더불어 로고테라피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말해 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나의 삶 속에 ‘수용소’가 있다. 작년 넉 달간, 암흑의 수용소에서 죽음을 시뮬레이션 해봄으로써 나는 내 시련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찾았다.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를 통해 나를 지지해 주는 것 같다.
IP *.62.1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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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13:48:32 *.94.41.89

"그냥 다 달고 살아도 무방하다라는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나의 삶 속에 ‘수용소’가 있다"

 

유선생은 좋은 간수였나봐요? 행복한 유선생이 부럽습니다.

그런 김정은씨도 부럽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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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19:44:12 *.65.153.233

벌써 호구조사가 이루어진 것인가요?? 유선생 훌륭한 간수 맞습니다. 얼굴뵈면 제대로 인사드려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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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13:51:54 *.196.54.42

"인생이 ‘초’라면, 죽음은 다 타버린 ‘초’일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이 꺼져가는 ‘초’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가족들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아이들에게 사랑을 충분히 표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화물트럭 운전을 하는 친구가 내리막에서 브레이크 파열로 겪은 죽음의 10초간을 얘기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일대기가 초고속 필름으로 돌아 가더랍니다. 무엇보다도 "...했더라면 좋았을걸"하는 영상이 가장 크게 크로즈업 되더라고 했어요.

앨리스님은 그런 후회는 없어보입니다 그려 ㅎㅎ

글 맛있게 읽었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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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19:47:29 *.65.153.233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내일 죽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생각하니....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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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15:23:48 *.94.164.18

나의 삶 속에 '수용소'가 있다.

 

...누구나 인식하든 못하든 자기만의 수용소가 있을텐데...이렇게 의미를 찾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축하드리고...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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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19:51:01 *.65.153.233

삶 속에 수용소가 있고 수용소 안에 또 삶이 있더라구요^^

암흑의 수용소에는 '시'들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글자가 보이는 삶에서 '시'를 만나기 쉽지 않네요. 

또 다시 암흑의 수용소가 찾아오면 또 '시'를 만나게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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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08:59:16 *.50.21.20

앨리스님이 풀어놓으신 자신의 이야기는 정말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자신에게 온 삶에게서 배우는 자세가 좋습니다. 

빅터 프랭클처럼 수용소 생활이 큰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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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19:55:13 *.65.153.233

강렬한 힘! 고맙습니다^^  해언님의 아름다운 묘사도 일품입니다!!!

변화해야겠지요~~~ 일단은 '기록'해 볼려고합니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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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14:23:28 *.94.41.89

잠깐 상상만 해보아도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은 상황을 오히려 시련과 삶의 의미를 찾는 기회로 만드셨다니 대단하게만 보입니다.

지금은 쾌차하셨다니 너무 다행이네요. 경험 속에 묻어나오는 삶의 공력이 감동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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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19:57:33 *.65.153.233

힘들기는 했어도 살만했답니다.

평소엔 떠오르지 않던 시상들이 떠올랐지요^^ 심지어 자연이 말을 걸어 오기도 했답니다 ㅋㅋ

시련이 찾아온다면 시련 속에서 또 기쁨을 발견해야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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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2 17:06:11 *.160.136.111

글자가 보이지 않는 현상은 저도 현재 진행형 이지요. 

나날의 삶에 씨익~ 웃는 본인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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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5 18:20:25 *.65.152.86

아이쿠.... 현재진행형이시라니.... 동병상련이네요...^^

씨익 웃을 수 밖에요~~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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