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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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을 줍다
이원규
이미 져버린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새야,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네게도 몸서리쳐지는 추억이 있으냐
보길도 부용마을에 와서
한겨울에 지는 동백꽃을 줍다가
나를 버린 얼굴
내가 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숙아 철아 자야 국아 희야
철 지난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하나 둘
꽃 속에 호얏불이 켜지는데
대체 누가 울어
꽃은 지고 또 지는 것이냐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잠시 지리산을 버리고
보길도의 동백꽃을 주우며,
예송리 바닷가의 젖은 갯돌로 구르며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지 않는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것을
경아 혁아 화야 산아
한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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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에 빨갛게 떨어진 동백꽃을 본적이 있다. 어찌나 한 가득 붉게 떨어졌는지 물위에 꽃잎을 뿌려놓은 듯하여 그 속으로 풍덩 빠져도 여한이 없겠다 싶었다. 아, 예쁘다 하고 내뱉는 순간, 안타까운 마음도 따라 드는 발끝에 흐드러진 동백꽃. 가까이 다가가 동백꽃 송이를 줍지 않을 수 없다. 보길도 동백꽃을 줍는 시인도 그러했으리라. 보길도든 어디든 동백꽃 가득 필 때, 아니 가득 떨어질 때 그곳에 가고 싶다. 그럼 나도 이런 시를 쓸 수 있으려나.
동백꽃 아름답다고 가까이 가면 호되게 앓으리라. 동백나무에는 동백잎을 먹고 사는 동백충이 살고 있어 털이나 배설물만 닿아도 독이 옮는다. 동백충 옮으면 온 몸이 동백꽃 같이 빨갛게 일어나며 가렵고 물집이 생겨 크게 고생한다. 동백나무 보기 귀하기에 올레의 동백잎 만질라치면 시어머니는 근처도 못 가게 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꽃들조차도 이토록 도도하단 말인가? 어쨌든 동백충은 동백꽃의 든든한 보디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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