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서지희
  • 조회 수 305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3월 18일 09시 31분 등록
당신이 큰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 주었을 때 당연히 당신이 함께 타는 줄 알았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오늘부터 혼자 출근 해야 하는 걸 깜박 잊었던 거지요. 뒤를 돌아보니 당신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멀어지는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군요.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십 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당신을 먼저 내려주고, 그곳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나의 회사에 도착하는 출근길을 함께 했습니다. 십 분에서 십오 분 남짓의 그 짧은 출근길 동행. 오늘 혼자 출근하는 길에 생각해 보니 그 시간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 차창을 통해 보는 거리에는 여인네들의 옷차림에 봄빛이 완연합니다. 뉴스에서는 섬진강변의 산수유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하는군요.


당신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운명처럼 만나 초콜릿처럼 달콤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것은 독신으로 살지도 몰랐다던 당신만큼이나 내게도 큰 변화였습니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한 눈에 나는 당신이 식물성 남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흘러 가는 것을 예사로 보지 않지만, 함부로 나서지도 않는 품성이라는 것에 더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당신이 조용하게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자리, 한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이 남의 옷을 입은 듯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당연시 되었던 혼자만을 위한 일상에 여러 일들이 끼어들면서 자꾸 시간을 쫓아가야 하는 상황에 나는 자주 동동거려야 했거든요.

당신은 나를 출근 시키고, 아침시간을 어떻게 맞을까요. 큰아이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궁리 중일까요. 아니면 카메라를 들고 슬며시 거리로 나설까요. 며칠 전부터 불안해 보이던 당신이 구조조정 대상자라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새 직장을 구할 때 써야할 이력서가 한 장으로 충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직장은 당신의 열 네 번째 직장이 되겠지요.


결혼 생활 36개월 동안 각각 두 번에 걸쳐 넉 달 동안의 쉼을 가진 당신. 결혼 전에 이미 여러 차례 이직 경험이 있는 당신의 지난날을 알고 있는 터였기에 이번에 당신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직장을 다시 그만두게 되었다고 내게 알린 그 순간부터 내내 당신의 이직의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왜 당신이어야 했을까? 물론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긴축정책을 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현실인 것은 맞습니다.
십 여 년 넘게 근무한 우리 회사에도 칼 바람이 한 두 차례 세차게 지나갔습니다. 구조조정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그 과정을 종합해 보면, 조직은 그 회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조직원을 귀신 같이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직은 우리에게 대단한 업무 성과나 커다란 영향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조직은 우리가 얼마나 개개인의 삶에 상사와 동료와의 인간관계를 조명하고, 바람직한 조직생활을 위한 협동의 자세를 만들어 가는지를 유의해서 살피며, 그것이 곧 조직의 역량으로 이어진다고 판단 합니다.
나아가 조직은 성공하는 조직과 실패하는 조직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남아야 될 사람은 남고, 나가야 될 사람은 나가는 조직' 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예컨데 조직과 개인의 경계가 불분명해 개인사로까지 이어져야 살아 남는 것이지요.


당신은 조직에서 어떤 얼굴을 한 사람으로 비춰졌을까요.
자의와 타의에 의해 직장을 이직 하는 동안 당신에게서 자라났을 상처라는 이름의 나무. 어쩌면 그 상처는 당신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당신에게서 영향을 받듯이 당신도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한 아버지의 초상이 있었겠지요. 때문에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강박관념이 자리하게 되었으며,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당신 스스로 높은 기준을 설정해 그것에 맞추려 노력하며 살아 온 사람. 당신은 그 과정에서 조직에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십여년 간의 조직 생활중에 얻은 교훈은 어떤 큰 성과도 그 과정이 자연스러움 가운데 있을때 그 성과가 더 빛을 발하고 사람들에게 시너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해 놓은 그 기준안에서 당신은 조직안에서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끊임없이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피며, 당신은 남들보다 몇배 더 힘들지 않았을까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따듯하고 진중한 태도, 그것을 당신이 속한 조직의 사람들이 알 수 있었을까요?

바라건데 당신이 세워 놓은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스스로를 독려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서 창밖의 당신이 아니라 우리는 창안의 '가족' 이 되었습니다. 그 기준이 당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안의 상처로 자리 잡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휴가를 맞은 당신은 어느해처럼 훌쩍 떠나 나에게 도착하는 편지를 부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 누구가 아닌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수 있기를 바래요.
남들보다 더 진중한 성향으로 인해 이직을 겪으며 힘들었을 당신속의 자신을 기꺼이 대면해 얼마나 잘 해 왔는지를 칭찬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이직의 여러 과정 중에는 당신 잘못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당신안의 여러개의 욕구 중에 제일 사랑하고 있는 일에 대한 한 가지 열망을 발견하여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뱃속에서 태동하고 있는 우리의 두 번째 따듯한 생명체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이제 더 이상 부유하지 않고 지상에 단단히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당신. 이렇게 봄 볕이 좋은 날에 당신과 첫째와 나를 섬진강강가에 부려 놓을 버스를 타고 싶다는 유혹에 휩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중에 제일로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도,
또한 어제는 오늘의 연장 선상이 아니며, 오늘 잘 출발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래요. 사랑하는 당신.

---------인터뷰 후기---------
이번에 만난 사람은 열 네번째의 직장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섬세하며 아주 따듯한 사람입니다. 프로그래머의 특성상 이직률이 높은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이직의 횟수에 저으기 놀랐습니다.

그가 이상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이직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의 이직의 배경에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강박의 최선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한 노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이 지치고, 더 많이 상처 받았겠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저는 그에게 자신을 편하게 놓아주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기준을 바닦에 내려 놓고 다시 시작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도 스스로가 대견해지고 기뻐 질 것이라는 조언과 함께요.
그가 충분히 성실하고,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자신을 마음껏 칭찬 해주며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한 가지일을 발견 할 수 있기를, 어제까지의 과정은 오늘의 자신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이글을 쓰는 내내 기원했습니다.

날이 몹시 흐리군요. 마음만은 가벼우셨으면 좋겠어요. 빨강머리 앤의 열 한번째 편지 였습니다. ^!~




IP *.71.76.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