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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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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1일 17시 31분 등록
번즈 나이트 


오래 전 그러니까 국민학교(라는 말은 잘 없어졌다만 나이가 짐작될 수 있으니 난감하다) 졸업식에서 '석별이 정'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득하다. 중학교로 진학하면 선생님, 선배로부터 매일 맞고 다닐거란 협박을 받았다. 너 이제 죽었다 생각해라, 날 보라며 허벅지 시퍼런 멍자국을 팬티까지 벗어가며 보여주던 동네 형. 생각건대 중학교는 인생에 브레이크가 풀려버린 까까머리 인간들이 미친 듯이 활개치는 악의 소굴처럼 느껴졌던 때였다. 순전히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졸업식의 헛헛한 마음보다 컸었던 폭력의 시대였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나는 두려웠다. 가야만 하는가, 그 노래의 가사가 나의 진심이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 심금을 울리던 노래, 그 노래를 외우고 부르며 국민학교 아름다운 개구쟁이 시절이 서서히 저물었었다. 세월을 돌고 돌아 그 노래의 오리진을 라오스에서 알게 됐다. 


영국 대사관저에 초대를 받았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오지랖을 핑계 삼아 '같이 가볼 테냐'는 말을 얼른 주워 담았다. 촌놈이 대사관이라는 곳을 언제 가보겄는가. 그것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사관의 관저를 말이다. 그날은 번즈 나이트라고 했다. 로버트 번즈, 석별의 정을 지은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그의 생일을 기념해 스코틀랜드인이 사는 곳이라면 지구상 어디든 열리는 행사라 들었다. 살다보니 18세기 지구 반대편에서 살다 간 시인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는 일도 생긴다. 대사관 입구에 들어서자 대포도 막을 듯한 육중한 출입문에 놀랐다. 이중 삼중의 검문에 기가 눌렸고 공항 검색대 같은 곳을 통과하며 양팔을 벌렸다. 바야흐로 이곳이 라오스가 아니라 영국임을 실감한다. 관저는 드러누워 뒹굴고 싶은 잔디로 말끔하다. 새하얀 보가 덮인 둥근 테이블 위로 빛나는 와인잔, 키 대로 가지런히 놓인 무거운 나이프.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다. 이날의 광경은 이와 같다.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성들과 턱시도를 빼입은 남성들이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삼삼오오 쓸데 없는 얘기를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관저 뒷마당 구석에서부터 백파이프 연주단이 웅장한 음악으로 천천히 들어선다. 우와. 침착하자 마음 먹은 것도 잠시 나도 모르게 꺅 했다. 브레이브 하트였던가, 가슴 시리다 느낀 그 음악을 눈 앞에서 듣게 된 것. 킬트, 붉은 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사내들이 느린 걸음을 내 딛으며 너희들 왔느냐하며 연주했다. 어딘가 구슬프지만 웅장하고 거룩하지만 그 안에 발랄함이 산다. 영국 대사의 축사와 저명 인사들인 것 같은 농담섞인 인사말이 이어진다. 어딜가나 이런 건 싫다. 사회자는 번즈가 남기고간 시를 낭송했고 간간히 던지는 농담에 사람들은 웃었고 나는 사람들이 웃을 때 입 꼬리만 올려가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곧 거대한 순대 (하기스 Haggis, 오트밀로 만든 속을 양의 내장으로 감싼 음식) 같은 소시지가 백파이프 연주단을 대동하고 나왔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이어지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하기스를 위하여" 소리쳤고 제각기 위스키 잔을 높이 들어 원샷을 때린다. 오, 한국 분위기. 그날 나는 싱글 몰트 위스키의 신세계를 접하기도 했다. 거나하다. 모두가 거나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춤이 이어진다. 이 사람 저 사람의 팔짱을 돌아가며 끼면서 추는 스코틀랜드 전통 춤이 흥겨웠다. 춤판이 벌어졌고 짐짓 빼려다 이거 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님을 알아채고 어쩌겠는가 막춤을 춰댔다. 그 와중에 코리안 막춤을 배우려 달려드는 인간들도 있었으니 나쁘진 않다. 


마지막엔 모두가 석별의 정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을 부르며 모두를 안아 주었다. 한국말을 곧 잘하던 미대사관 정책담당관 제임스 아저씨, 옆자리 호주 여인 미쉘 아지매와 그녀의 남자친구 독일의 얀 아저씨, 눈이 매혹적이었던 불가리아 여인 테레사, 영국 신사 러드 청년, 춤 추러 나오라며 나를 당겨 잔디 중앙으로 내 몬 나쁜 프랑스 놈 줄리앙. 처음 겪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맘껏 춤추고 기절할 때까지 마신 즐거운 밤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부르던 그 노래에 이렇게 성대한 후사가 있었다. 먼 나라 시인이 지었다지만 어쨌든 지구반대편 시골 초등학교에서까지 불려지는 노래가 됐으니 인류의 노래다. 졸업식이 한창이다. 모두 축하드린다. 


참고) Robert Burns, 영국(스코틀랜드)의 독보적 국민시인.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빈곤 속에서 틈틈이 시를 읽고 17세 때부터 시작업. 1786년 자메이카 섬으로 이주하고자 뱃삯을 벌기 위해 쓴 시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 poem chiefly in the scotish dialect"으로 천재 시인이라 불려짐. 프랑스혁명에 깊은 영향을 받아 모순에 찬 당시의 사회, 교리, 문명 일반을 예리한 필치로 비난하며 민족 시인으로 높은 평을 받음. 만년에 술을 많이 하여 건강을 해치고 경영하던 농장까지 잃게 되어 불우하게 지냄. 번즈 나이트는 시인 사후 5년인 1801년 그의 친구들이 그를 기념하며 행한 의식. 이후 영국 전역으로 퍼져 국민적인 행사로 자리매김. 그의 생일을 기념해 1월 25일 즈음 행해지며 모두가 기다리는 저녁, burns supper 번즈 저녁이라 불리기도 함 (출처: 지식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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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01:11:20 *.54.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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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6 12:57:51 *.102.1.25

작가님 덕분에 번즈나이트와 번즈 시인에 대해 알게되었습니다.

라오스에서의 이야기,,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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