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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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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2일 19시 10분 등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구원 11년차의 봄은 전염병과 함께 왔다. 곰처녀가 사람이 되는데도 100, 아니 스무 하루면 충분했다지만 나는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의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절대로 서둘러선 안 된다는 것을. 35년 세월의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 그리 쉬울 리 없지 않은가?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또 고른 후 마음으로 정한 시간이 10년이었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가장 긴 시간이었던 거다. 그렇게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10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계산해도 분명히 10년이 흘렀는데 아무리 봐도 도무지 크게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다.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기는 했다. 10년간 성큼 자라난 아이들과 집의 온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집 여기저기에 언덕처럼 쌓여있는 책들만은 10년 세월의 여실한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 엄청난 양의 책들을 통과해 낸 나는 과연 어디가 어떻게 달라진 걸까? 차마 대놓고 물을 수 없는 질문이 틈만 나면 들이닥쳤지만 도무지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면하는 것만 빼고는 어떤 모험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떤 무리라도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었다.

 

어떤 장애물이라도 가뿐히 뛰어넘어 집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던 내 손발을 묶은 것은 어이없게도 코로나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리스크라니, 너무나 당연한 루틴이라 믿었던 아이들의 등교마저 무작정 연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일을 새로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실망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조급함에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막막한 게 사실이었다. 이대로 당장 집 밖을 나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집안에 있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뭐라도 해야 할 텐 데, 대체 뭘 하면 좋단 말인가? 아니,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잠을 설치며 바스락거리고 있던 삼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다시 시작했던 블로그에 이웃 새 글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습관적으로 훑어보던 중 ‘모집, 엄마의 비움 프로젝트’라는 포스팅이 눈에 들어왔다. 큰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루에 고작 물건 3개씩 비워내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질까 싶었던 거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니 이참에 일단 책이라도 정리해 놓자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계절이 네 번 바뀌었다. 뜻하지 않게 시작된 이 작고 작은 움직임은 나와 공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 앞으로 몇 주간은 1년 동안 물건을 비워내며 체험했던 변화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어디에선가 꼭 1년 전의 나처럼 새벽잠을 설치고 있을 당신에게 작은 실마리라도 되기를 소망하며 정성을 다해보려고 한다. 

 

오래 참아왔던 묶은 근심이 풀어져 내린 첫 한 달!

 

한 달 간은 명료했다. 아침에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에 방치되어있는 '명백한' 쓰레기 3개를 찾아내는 게임. (마음먹었던 책까지 가는 데는 그 후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고장이 났거나, 작아졌거나. ? 나는 그것들을 집안에 그리 오래 모셔 두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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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다시 써먹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맞다. 그것은 미련이었다. 외출할 때는 결코 입지 않을 옷은 집에서 막 입을 옷으로, 먹다 남은 술은 요리용으로, 빈 선물박스는 정리용으로 쓰임새를 격하시키면 어떻게든 다시 써먹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리 활용되는 물건들은 많지 않았다.

 

외출용 옷은 집에서 입기에 편치 않았고, 새 술 먹을 때도 배달음식이었는데 남은 술 쓰자고 요리를 할 가능성은 희박했으며, 빈 박스에 정리할 물건들을 가려내는 작업을 할 시간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용도를 다한 B, C급 물건들이 집안에 하나 둘 씩 쌓여가는 동안 공간 역시 본연의 쓰임새를 잃어갔다.

 

앉을 수 없는 소파, 음식보다 잡동사니가 더 많이 올라간 식탁, 더 이상 수납이 불가능한 서랍들로 꽉 찬 이 공간에서 '언젠가의 필요'는 늘 잘 정돈되어 있는 집 밖의 새 상품으로 해결되었고, 당장의 필요가 해결되고 남은 것들은 이제는 그저 습관적으로 남는 공간 어딘가로 비집고 들어가곤 했다.

 

한 달은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눈 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건이 빠져나갔는데도 걱정했던 '불편'은 정말 1도 없었다. 불편은커녕 신기한 홀가분함이 찾아왔다. 그것은 오래 참아 왔던 '근심'을 비로소 풀어내는 그 순간의 느낌과 너무나 비슷했다.

 

세상에나 세상살이 정말 별 거 없구나!! 몸 안의 노폐물만 제때 밖으로 내보낼 수 있어도 누릴 수 있는 이토록 가까운 '천국'을 두고 참 어렵게 돌고 돌며 헤매어 다녔구나! 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말이다.

 

그 엄청난 해방감에 비하자면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공간의 변화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IP *.70.3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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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3 14:44:08 *.52.254.111

저도 한 번 시도해 볼려구요 ...  뭐,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버릴 것도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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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10:18:29 *.70.30.151

살림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맺기더라구요.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 꿀같으시리라 믿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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