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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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예과 교수님이 조금 특이한 평가방법을 제시했다. 과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A팀은 종전과 같이 완성도가 높은 정도로 평가를 하고, B팀은 순전히 작업한 양에 따라 점수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두 팀으로 나뉜 학생들은 다른 기준에 따라 과제를 준비했다.
A팀은 널리 알려진 창작 방법을 따랐다.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고 스케치를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거쳐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다. B팀은 달랐다. 작품의 수준을 보지 않고 오직 무게로 점수를 주겠다는 언질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빠른 속도로 작품을 만들었다. 머리로 구상하는 시간을 줄이고 무조건 손을 놀리느라 바빴다.
평가시간이 다가 왔다. 물론 교수님은 약속한 기준에 따라 점수를 주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단순히 학점을 떠나 진짜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작이 어느 팀에서 더 많이 나왔을까? B팀이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구상에 구상을 거듭하여 나온 작품보다,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작업으로 옮긴 작품 중에서 쓸 만한 것이 훨씬 더 많이 나온 것이다.
이 예화는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질은 양에서 나온다’, 혹은 ‘쓰면서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나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어떤 글을 읽으며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막상 써 보면 그리 쉽지는 않다. 독자로서의 눈높이와 직접 글을 쓰는 저술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내달을 것 같은데 생각만큼 나와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억지로 써 놓은 글이 성에 차지 않을 때, 자신이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멀리 치워 버린다.
또한 아는 것과 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 경우 필 받은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는 것은 아주 쉽다. 숱한 고심과 오랜 연구 끝에 저자가 도달했을 고지를 엿보는 일은 경이롭고, 그가 안내하는 샘물을 맛보는 일은 달콤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 하지만 이런 감흥들을 내 시각으로 엮어 조금 긴 글이나 책을 쓰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동안 모아놓은 사례들을 취사선택하여 나만의 가치를 조금 더하여 내 문장으로 엮어야만 한다. 바로 이 작업이 ‘글쓰기’이고, 이것은 오직 글을 씀으로써만 나아질 수 있는 것이다.
흙덩이를 주물러 무수한 형상을 만들어보는 가운데, 질감과 양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조형기술이 단련되어 마음먹은 것을 점점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서 너 편의 글이 합해져 쓸 만한 글 한 편이 되기도 하고, 적어도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 쓰라, 쓰면서 생각하라. ‘쓸 수 있다’, 혹은 ‘쓸 것이다’가 아닌 ‘쓰는 것’이 핵심이다. 오직 쓰는 가운데 우리는 ‘내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한 권의 책’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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