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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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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5일 13시 02분 등록
 

김진규, 달을 먹다, 문학동네  2007


“당신에겐 출력이 필요해, 입력된 만큼. 그렇지않음 미칠 거야”


책을 얼마나 읽어대면 남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까? 저자는 ‘무언가 터져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서른 아홉이란 나이’에 이 소설을 썼다. 한 방울만 더 얹으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위태로움-표면장력의 끝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그 전에는 시도 소설도 써 본 적이 없다니 타고난 재주에 뽑아내지 않으면 폭발하고 말 정도의 축적이 더해졌던 것 같다.


빛은 열을 동반했다. 단단히 얼어붙었던 태양이 녹으면서 쩌어억 햇살에 금이 갔다. 가닥가닥 쪼개져 처마 끝으로 미끄러지는 햇살을 붙잡아 동이면 반나절치 땔감을 아낄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가라앉은 말소리가 발에 채어 구들을 굴렀다. 솜 누빈 무명저고리 섶을 단단히 여미고 들어앉아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었고, 겨울이었다. 뭐든 감추기에 좋았다.


첫 장부터 문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단정하고 음전하기가 진짜 조선 여인네가 쓴 것 같았다. 이 작가는 아무리 격한 정황도 7부의 감정으로 처리해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넘치는 재기와 욕망에 스스로 재갈을 물린 긴장이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저자를 느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나 이 작가처럼 고어체에 내밀한 긴장을 실어 내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각별하게 다가왔다. 뒤의 심사평에 보니 ‘인간도 정물화처럼 묘사해 박제화시켜’, ‘저수지 바닥 같은 적요’라는 표현이 있었다. 일 년 내내 피시방에 가서 컴퓨터 게임에 심취하는 등 저자의 우울증 경력도 거론되고 있었다. 그러자 이 차분하다 못해 무언가를 늘 남겨놓는듯 응어리가 느껴지는 문체의 주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생래적인 기질이든  미치기 일 보 직전까지의 입력 과잉상태이든 작가와 문체는 한 몸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역사물이나 느린 전개에 별로 끌리지 않는 편인데 순전히 문체 때문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깊은 밤이었고, 봄이었다. 미치기에 좋았다.


한 낮이었고, 여름이었다. 넘치기에 좋았다.


또 밤이었고, 가을이었다. 버리기에 좋았다.


대는 맑아서 누가 없고 굳어서 변하지 않고 비어서 용납한다.



간결하게 절제되었으나, 세도가의 우물처럼 깊고 아득한 문장들은 모조리 시어였다. 저자의 문체는 너무나 강해서 스토리보다도 앞선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화자가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톤이 똑같을 정도이다. 심지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향도 많이 겹친다. 묘연과 기현, 희우와 여문이 내게는 모두 같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저자 안에 있는 기질이어서 애정도 깊고, 자신있게 묘사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을지?



열기는 불편부당했다. 대궐 편전에 입시한 당상과 반촌의 백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늘 없는 자리도 모두에게 고루고루 곤경이었다. 날벌레조차 날개를 접고 제자리서만 할랑거렸다. 마당 한 귀퉁이에선 다북쑥이며 환삼덩굴이며 쓴너삼이며 쐐기풀이 카랑카랑한 햇살에 마르면서 어둠을 벼르고 있었다. 모기발순에 신경이 발작난 사람들은 해떨어지기가 무섭게 열심히 모깃불을 피웠고, 탄 자리는 아침까지도 따뜻했다.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 참하고 말간 문장이 거듭 신기하다.  저자의 기질과 취향과 관심이 한데 모여 독특한 문체가 탄생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내간체의 복원이다. 좀처럼 경쟁자가 없어보이는 영역인데다, 그 시대의 풍속이나 한문공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으니 스스로 블루오션을 창출한 셈이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2009>’, ‘저승사자 화율의 마지막 선택<2010>’ 등 저자의 활발한 후속작을 보아도 그것은 증명된다. 또 한 명의 걸출한 작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도 감격스럽거니와, 그녀는 내게 문체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켜준 작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국화주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 다음 문장을 보라. 이 문장을 읽는데 그 술을 한 잔 얻어마시고 싶고 이 다음 술빚는 취미를 가져볼까 하는 풍류가 절로 솟으며,  ‘설명묘사’의 좋은 사례글을 얻어서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문장 또한 국화주를 만드는 과정과 닮았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술을 빚는 지독한 탐미와 자기를 혹사할 정도의 노동 끝에 향기로운 국화주 같은 문체가 탄생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국화를 송이째 꺾어 잘 씻은 다음 물기를 없애는 일이 가장 먼저다. 그리고 통밀을 반 시진쯤 물에 불린다. 밀이 물을 적당히 먹었다 싶으면 맷돌로 곱게 간다. 그걸 적당한 크기로 덩이를 만들어 틀에 넣고 천으로 싼다. 통나무의 위아래를 둥글게 파서 맞뚫어놓은 틀은 주로 소나무를 쓰는데, 누룩고리라고도 부른다. 그리곤 발뒤꿈치로 꼭꼭 밟아 디딘다. 밟는 질에 따라 누룩의 질이 변하고 그 누룩에 의해 술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설렁설렁 했다가는 술맛에 대번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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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룩을 뜨뜻한 온돌 아랫목에서 한 이십여 일을 띄운다. 그러곤 꺼내 이틀 정도 밤이슬을 맞혀가며 누룩 냄새를 없앤다. 그렇게 빚은 누룩을 발효시키고 나면 묽은 멥쌀죽과 혼합해 밑술을 만든다. 그 다음으로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식힌 후 밑술과 잘 섞어 독에 담는데, 이때 엿기름, 고추, 생강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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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가을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서 쓴다. 고된 작업이다. 우선은 밤이 되기 전에 풀잎들을 천으로 깨끗이 닦아 먼지나 불순물을 없앤다. 그리고 그 아래마다 작은 항아리들을 나란히 늘어놓는다. 그러면 새벽에 맺힌 이슬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또르르 독 안으로 굴러떨어지는데, 철 내내 모아 합치면 술 큰 한 동이 양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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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가 다 들어가면 마지막으로 바짝 말려두었던 감국을 넣는다. 그리고 창호지로 아가리를 막고 뚜껑을 덮어 익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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