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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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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1일 14시 27분 등록

08. 삶이 축복일까?


“나는 못해요. 어떻게 말해요?”
“그래도 말해야 합니다.”
“선생님! 전 못하겠어요.”  

커다란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의사는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말기 암이고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환자가 알아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말문이 막힌 듯 했다.  

100세까지 보장하는 보험상품을 광고하는 시대지만 그의 나이는 60살, 대학생 자녀만 3명이었다. 대장암이 온 몸으로 퍼져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치료가 의미없다는 얘기를 듣고, 호스피스가 활성화 된 우리병원으로 왔다.  

환자의 기록을 살펴보던 의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상태가 심각하네요. 한 달을 못 넘길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럴 리가요? 그 병원에서 6개월 정도는 살 수 있다고 말했는데요”
“글쎄요. 검사결과로 보면, 암의 전이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한 달을 못 넘길 수 있다는 말에 가족들은 당황해했다. 또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려면 환자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말에 더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의사는 가족들을 계속 설득했다. 호스피스는 일반치료와 전혀 달라서 환자에게 비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가족들은 그동안 환자에게 암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다. 병명이 불확실하다고 말하고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자고 안심시키고 왔던 것이다. 환자에게 호스피스 치료를 받자고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유 속에는, 생명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호스피스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죽으러 가는 곳! 

일반인들에게 호스피스는 절망이다. 암을 치료하기 위한 더 이상의 어떤 노력도 검사도 하지 않고, 그저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곳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호스피스가 생에 대한 포기로 비춰지는 것이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도 있다. 말기 암환자들에게 가장 힘들고 현실적인 고통은 통증이다. 머리가 빠지고 뱃속이 뒤집히는 듯한 극심한 통증 앞에서, 환자가 체감하는 고통의 크기는 절망의 크기로 변한다. 고통에 힘들어하다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들의 바람은 아주 소박해지기 마련이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그저 편안하게, 고통없이 갔으면...”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것은 서러운 고통이지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치료를 지속하는 것은 무의미한 고통이다. 부작용이 강한 항암치료와 치료경과를 확인하기 위한 각종 검사들은 환자의 고통을 증가시키고 면역력을 떨어뜨리며,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의지마저 단축시킨다. 생명이 남아있는 기간이라도 통증을 없애고, 그 짧은 시간을 의미있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호스피스가 탄생한 배경이다.  
 

“선생님이 대신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선생님, 죄송합니다..”  

보다 못한 호스피스 의사가 악역을 맡았다. 의사는 침대 옆에 앉아,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명이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음을 말하는 의사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먼저 병실을 빠져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사명감이 없다면, 의사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직업이겠구나....’  

2주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병원을 옮기고 싶다는 아들의 전화였다. 아버지가 답답한 병원을 벗어나 공기 좋은 시골의 요양원으로 가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원하는 대로 해드릴 방법을 찾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의사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호스피스 병동으로 그를 만나러 갔지만 환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간성혼수가 와서 가족도 알아보지 못했고, 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저렇게 사람이 마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쩍 말라 있었다. 음식을 못 먹고 고농축 영양제도 맞을 수 없는 몸이었다. 수액과 통증을 줄이는 약물로 간신히 견디고 있었지만, 죽음의 사신은 이미 손을 내밀고 있었다. 미이라처럼 납작하게 말라버린 육신 앞에서, 인간이 한낱 가엾은 개체일 뿐이라는 생각과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연민이 내면에서 올라왔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최 시몬 신부님께서 오셨다. 신부님은 의식이 없는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셨고, 의사는 임종이 가까워 졌다며, 요셉방 (임종을 준비하는 방)으로 모시도록 지시했다.   

“가족들은 아버님과 못다 한 얘기를 마음껏 다 하셨나요?”
“임종 방에서라도 자녀분들이 아버님과 못다 한 얘기를 하도록 해 주세요.”  

상심에 빠진 아내 분께, 위로라고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 다였다. 환자가 입원하던 날, 지방대를 다니던 아들은 중간고사 시험을 보러 내려갔고, 두 딸도 이삼 일에 한 번씩 아버지를 찾아왔다. 자식들은 아버지와 이별을 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가졌을까?   

불행히도, 한 달을 넘기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의사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날, 입원한지 17일 만에 환자는 임종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조금 더 일찍 왔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머릿속에 떠 다녔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후회없는 이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나온 삶을 마무리하고 가족과 화해하며 마지막까지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시간, 그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은 시끄러웠다.
‘아니, 몸에 이상이 있으면 빨리 병원에 갔어야지. 배 아픈 증상이 3개월이나 있었다는데 왜 일찍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느냐? 니 남편은 뼈빠지게 고생하며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한평생 고생만 했다’ 며 뒤늦게 아내를 나무라는 환자의 누나, 놀란 토끼눈을 하고, 아직도 가장의 부재를 믿을 수 없어 하는 자식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씨펄! 망할 놈의 인생!’ 
 


어떤 이들은 ‘죽음이야말로 삶의 완성’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그런 철학을 받아들일만한 내공이 없다.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환자에게 삶은 고해(苦海) 일 뿐이다. 우주적 존재라는 인간의 죽음이, 사망통계의 수치로 반복되는 병원의 건조한 일상도 받아들이기 싫었다. 많은 이들에게 삶이란, 그저 남루하고 구차스러운 현실일 뿐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책 한권이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의 임상교수 이면서, 47년 동안 불치병인 크론병을 앓아왔던 레이첼 나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이 쓴 책이다. 그녀는 인생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그럼에도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축복’이라고 말한다.  레이첼 레먼은 종교를 배척하는 사회주의자 부모님을 두었으나 어릴 적 유대교 랍비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 신성함에 눈뜬다. 오랜 세월 의사로 일하면서 항상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치료보다는 치유를 중시하며, 육체의 병을 앓는 환자들과 마음을 교류한다. 이 책에는 오랜 세월 동안 무르익은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삶의 축복’과 연관 있는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용인데 그 중 한편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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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는 건배를 나누는 전통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잔을 부딪치며 히브리어로 “레치얌” 하고 외치는 것이다. 그 말은‘삶을 위하여’라는 뜻이었다.

“할아버지,
‘행복한 삶을 위하여!’라는 거에요?” 
내가 묻자 외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그냥‘삶을 위해서’라는 뜻이란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삶을 위하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면 기도문 같은 거에요?”

“아니, 아니란다.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청하느라 기도하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생명을 지니고 삶을 살잖니.”  

“그렇지만 왜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꼭 이 말을 하세요? 그 말은 할아버지가 지어내신 거지요?” 외할아버지는 크게 웃으면서 아니라고 말하셨다. 천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건배를 나누면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다. 나는 여전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성경에 씌어 있나요?”
“아니란다. 성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안에 씌어 있단다. 레치얌은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삶은 거룩한 것이며 서로 축하하는 게 마땅하다는 의미란다.”  

외할아버지의 표정은 무척 경건했다.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포도주 향의 달콤함을 맛볼 때면 우리의 삶이 그 자체로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단다.” 

[할아버지의 기도 (p77~78)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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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세상의 모든 상처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몸의 상처가 마음과 영혼을 잠식하는 경우도 있었고, 마음의 상처가 몸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쉽게 회복하는 가벼운 상처들도 있었지만,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겨운 깊은 상처들도 있었다.  
 

‘과연 삶이 축복일까?’  

레이첼의 에세이는 따뜻했지만, 병원 곳곳에서 메아리치는 희망이 없다는 절규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접할 때마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물음표가 그려졌다. 병원에서만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선택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도 없는 수많은 고통과 상처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과거를 아쉬워하고, 현재를 힘들어하며, 미래를 불안해 하면서 살아간다. 의문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후, 환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병원에서 행해지는 공동체미사였다. 환자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기도를 해주셨던 최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미사에서, 신부님이 말한 짧은 한 문장을 들었을 때, 꼬여있던 의문이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질문의 답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삶이 축복일까?’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구나! 라는 깨달음이었다.  

미사가 끝날 무렵, 신부님은 힘들게 참석해주신 환자와 직원들에게 특별히 축복을 주고 싶다면서
별 뜻 없이, 가벼운 인사 같은, 그러나 내게는 아주 인상 깊은 말을 덧붙이셨다.  
 

“사제의 기쁨은 축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IP *.30.2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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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1.08.21 14:59:08 *.42.252.67
회색  우성이의 마음에 검은색 말고 흰색이 더 많이 섞여
환한 하얀빛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한 삶과 웃음은 '선택'이라고 하더라.
이미숙 아가다 수녀님이 말이야......
우성아 너의 웃음이 그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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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1 15:46:14 *.75.194.69
선배님 보고 싶네요 
늘 깊은 생각을 끌어내는 글
잔잔한 감동과 함께 
이 축복같은 주말 오후를 
숙연하게 보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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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1.08.22 09:59:11 *.237.209.28
글은 준비된 자에게 오는 선물이다.

오빠글을 읽으며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즐거운 인생'이라지만 그 즐거움을 안기 위해 필연적으로 함께 떠 안을 수 밖에 없는 그늘.
그래도 오빠가 말해주니 훨씬 안온하고 견딜만 하게 느껴집니다.
그게 바로 오빠의 저력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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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2011.08.22 12:48:21 *.34.224.87
남편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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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8.22 17:21:41 *.236.3.241
삶이 축복일까?

질문이 참 묵직하네요. ^^ 삶이 축복이려면
형이 얘기한 것처럼 죽음조차 주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스피스병동은 질병의 고통과 소멸의 절망에 남은 생을
소진하지 않도록 영혼에 고요를 부여하는 공간이겠네요.

그래도 최후의 정리는 자신이 해야겠죠.ㅎㅎㅎ 그 정리가
맘 먹는다고 당장 되는 건 아닐테고, 평소에 修道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가벼운 요통이 목안의 가시처럼 느껴지는 요즘,
남다르게  다가오는 질문입니다.

삶이 축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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