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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2일 09시 36분 등록

게리 카스파로프를 아시나요?

그는 1964년 러시아 변두리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체스 챔피언입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 주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고, 22살의 나이에 당시 사상 최강의 체스 플레이어로 칭송 받았던 세계 챔피언 아나톨리 카포프에게 도전할 자격을 획득하게 되죠. 그는 그 챔피언과 엄청난 접전을 펼치게 되고 둘의 체력 고갈을 염려한 주최측이 결국 이들을 말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결국 그는 챔피언을 제치고 자신의 이름을 체스 챔피언으로 기억하게 하지요. 1985년 처음 우승한 이래 1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었답니다.

이런 대단한 그를 상대로 하여 패배를 안겨준 이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핑크는 그의 책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그 자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피로를 모른다. 두통을 앓거나 고민을 하는 법도 없다. 정신적인 압박에 시달리거나 실패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관중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거나 언론에서 어떻게 떠들어댈까 신경쓰지도 않는다. 술이나 약물로 인해 멍한 상태로 있지도 않고 실수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체스 달인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거나 초조해 하는 법이 없다.

이 모습이 어떤가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피로도 모르는 철인이며, 고민도 오래 하지 않는 엄청난 결단력, 그리고 실패에 연연해 하지않는 대범성. 남들의 시선 또한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실수 또한 없지요. 그리고 어떤 이를 만나도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할 줄 아는 엄청나게 대단한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아, 정말 제가 부러워하는 모든 모습을 다 가지고 있답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는 바로 “딥 블루” 컴퓨터랍니다. 1997년 카스파로프를 꺾은 1.4톤자리 IBM 슈퍼 컴퓨터이지요.

이런..... 제가 꿈꾸던 이상적인 모습을 모두 다 갖춘이가 바로 컴퓨터라니요. 저는 정말이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답니다. 이런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컴퓨터라니요. 제가 컴퓨터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니요.

저는 말이지요.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딱 저런 모습을 가지고 싶었지요.

저는 철인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싶었어요.

하루 밤 잠을 자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아세요? 미스토리 50장 쯤은 너끈히 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 다음 날에 멍한 머리와, 까칠해진 피부, 팬더 같은 다크 서클을 만나야 한답니다. 이렇게 밤을 새우고 일한 후에 마치 잠을 자고 일어난 것과 같은 멀쩡하고 상쾌한 컨디션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저는 인간이기에 하루 못해도 5-6시간의 수면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말한 저와 같은 것들을 안고 있어야 해요.

저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현실의 저는요, 신발 한 켤레를 사기 위해 백화점을 세 시간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하느라구요. 커다란 쇼핑백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이게 과연 잘 산건가 하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이미 사버린 거 그냥 즐거워 하면 된다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들이 떠오르고 결국은 누군가가 잘 산거라며 칭찬해 주길 바랬지요. 결국 저는 며칠을 잘 한거야 라며 제 자신을 세뇌시켰어요.

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성을 가지고 싶었어요.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실패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실패를 부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실패를 걱정하지요. 까짓거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지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행동에 옮겨지지 않아요. 한 번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하면 되는거 아니야? 그러면서도 실패가 두려워 자꾸만 움츠려드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싫고 소심한 모습이지요.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사는 거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던지 내가 생각하는 길을 꿋꿋하게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현실의 저는 자꾸만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답니다. 그런다고 얻어지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남들이 뭐라고 하는 거지? 하는 남들의 평가에 신경이 쓰이게 되었죠. 제 자신의 길을 소신있게 걸어가지 못하는 자신이 참 짜증스러웠어요.

그래요. 저는 참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세상이 말하는 실수나 실패에도 초연하는, 끈적끈적한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지 않는 쿨한 사람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저는 결국 그렇지 못했지요. 어떤 순간에서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가장 발전적인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사랑에 실패해도 웃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도 ‘그러던지 말던지’ 라 말하며, 짜증이 나더라도 다른 일에까지 그 짜증을 연걸하지 않는 그런 쿨한 여자이고 싶었지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모습이 컴퓨터네요. 지금 제 앞에 있는 기쁜 일이 있어도 웃을 줄 모르고 슬픈일이 있어도 울 줄도 모르는 컴퓨터 말이예요. 그저 제가 시키는 일을 처리하는,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도 못하는 저의 기계 말이예요.

그렇다고 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예요. 저는 단지 인간이기에 가지는 모든 감정들을 좀 더 소중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의미랍니다. 저는 인간이예요. 결국은 저는 컴퓨터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 되기를 바라지도 않지요. 이 아이가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우리는 이 아이를 부러워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렇지 못한 모습을 미워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쩌면 백조의 수면 위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백조의 수면 위의 모습은 언제나 꼿꼿하며 우아하죠. 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발을 버둥대고 있답니다. 백조의 꼿꼿하며 우아한 모습은 버둥거리는 발의 놀림이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인간도 그럴지도 몰라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은 질척거리는 감정의 늪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만들어 낼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도 감정이란 질척거리는 늪에서 버둥거립니다. 실패한 사랑에 슬퍼하고, 실수에 고민하며, 결정에 망설이지요. 완벽하지 못한 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별 것 아닌 일에 짜증을 내고 돌아서서 짜증을 낸 제 모습이 싫어 더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인간입니다.

오늘도 찾아오는 쿨하지 못한 감정에 화가 나지는 않나요? 철인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견딜 수 없나요? 컴퓨터를 바라보세요. 그래도 컴퓨터가 되고 싶지는 않죠? 당신은 오늘보다 아름다운 내일의 모습을 살고 싶어하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랍니다.

IP *.23.18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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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3 00:01:46 *.166.205.131
역시 따라할수 없는 '루미체'로구나~^^
루미는 자신에게 참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한번 느낀다.
자신을 바라보며 건진 이야기를
읽는이들에게 부드럽게 전해주어 공명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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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9.15 09:24:38 *.23.188.173
이 글체를 너무 오래 써먹고 있나 하면서도
글이 부드러워지는 듯한 느낌에 포기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처음 구상했을 때만큼의 글은 나오지 못했지만
이건 뭐... 제가 조금만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어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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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1.09.13 02:39:28 *.8.230.152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영화 예고편의 한 대목이 기억나는 이야기구나 
이 야심한 시간에 토를 달고 있는 나는   ... ^^

로마의 제국과 신의 제국과 그리고 21세기의 사회주의의 붕괴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치중립과 객관성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이 만들어낸 괴물 '수퍼컴퓨터' 말이다....
그래서 르네상스가  휴머니즘의 회복이었듯이
오늘날은  자연으로의 환원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정서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 싶네
펜싱을 하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준비를 하고 극복해도
늘 마주치게 되는  더 큰 두려운 생각앞에서 떨면서
 날마다 날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기도하던 지난 날의 경쟁이 생각났다.
그랬었지....
"전 이기게 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앞에 설 수 있도록 힘과지혜를 주십시요
 이 소원이 부당하지 않도록 온몸과 마음으로 이렇게 날마다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승리가 가져다주는 갈채와 풍요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평온'이었거든...
 좀 더 노력하면 들어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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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9.15 09:26:03 *.23.188.173
선배님께서는 지금도 충분히 평온해 보이시는데요
그 여유로운 웃음을 누가 따라할 수 있겠어요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정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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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9.13 09:29:18 *.38.222.35
ㅋㅋ. 읽으면서. 지난 오프수업때 양갱 오라방의 루미체 따라하기가 생각나서 혼자 웃었음..ㅎㅎㅎ..

와. 이번 글 왠지 좋다. 뭐랄까. 감성을 불러 일으킨달까.. 더불어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구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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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9.15 09:27:05 *.23.188.173
난 양갱 오라버니도 그런 말투가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ㅋㅋㅋㅋ
당신에게 감성을 일으켰다니 좋소~
일어난 감성으로 당신의 비행기가 떠오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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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11.09.13 22:33:06 *.108.80.74
아주 쉽고 술술 읽히면서도
머리에 한 방, 가슴에 한 방 강펀치를 날리는 맹랑한 글이네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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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9.15 09:27:56 *.23.188.173
아~~ 쉽다니 감사합니다.
재미있었다니 더 감사하구요
그런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평범하고 잘 읽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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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9.14 12:20:43 *.163.164.176
인간의 능력은 육체적인 능력, 정신적인 능력, 영적인 능력, 세가지로 대별된다.
루미의 말대로 이런 3가지 능력이 모두가 충만하여
책도 술술읽고, 글도 술술 써내려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생각해본다.

내가 가진 능력은 무엇하나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이 어설픔을 어찌할까나~~
루미의 글로 위로를 얻어볼까? 땡큐하다.

* 루미야 추석때 '써니'라는 영화를 다운받아서 봤는데
거기에 욕을 겁나게 잘하는 명랑 발랄한 애가 나오는데
왜 자꾸 니 생각이 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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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9.15 09:28:40 *.23.188.173
캘리포니아 씨밤바야~~~~ㅋㅋㅋㅋㅋ
전 항상 오라버니 근처를~으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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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6 10:02:35 *.45.10.22
ㅎㅎㅎ 오빠 나도 그 영화 봤는데 ㅎㅎㅎ 나도 동감했어 루미 오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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