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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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만으로 충분하다.
없는 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볼 수 없던 길을 보게된 것 뿐이다.
전지훈련의 가장 큰 목적은 유럽 선수들에 대한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조건 강한 상대와 시합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번 훈련에 따른 첫 시합은 선수들들에게 심리적으로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재정에게 유럽의 시합일정과 각 시합들에 대한 정보를 참고하여 독일의 B급 국제경기를 택했다. 프랑스나 이태리의 시합보다는 지금 가장 높은 랭킹에 대거 포진하고 있는 독일시합을 선택했다. 세계펜싱연맹의 경기룰에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독일과 헝가리 둘 중의 한 팀을 16강에서 대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합이 있는 보쿰시에는 하루 전날 도착해 짐을 풀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경기장에 도착했다.
재린을 비롯해서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왔을 때, 선수들은 말없이 시합장 한 모퉁이에 장비를 내려놓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장비를 시합장 한가운데로 옮겨라, 왜 넓고 잘 보이는 자리를 두고 구석에 있냐? 이 촌닭들아, 하하하……”
재린을 비롯해서 모두들 멋적어 하고 있었다.
“정해진 자리도 없고 저렇게 비어있는데, 그리고 아무도 너희를 한가운데로 못 가게 막지 않는데. 구석에 있는 이유는 뭘까? 자신이 없어 숨고싶은 사람들이 그러는데... 자신 없어?”
“아니~요~오.”
나는 그래도 조금은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빨리 칼백들 옮겨 놓고 들어가서 몸을 풀어라.!”
시합장에는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이미 와 있었지만 시합장 둘레에 쳐 놓은 펜스 바깥에서 몸을 풀고 있거나 조깅을 하고 있었다.
“ 들어가서 연습하는 선수들이 아무도 없는데요?”
"그럼, 너희가 들어가서 먼저 몸을 풀어라, 그러면 쟤들도 따라 들어올 거야.”
재린이 펜싱화를 갈아 신고 뚜벅 뚜벅 들어가더니 가볍게 허리를 풀고 조깅을 시작했다. 명아와 세희 그리고 정영이도 몸을 풀고 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5분쯤 지났을 때는 출전한 선수들 대부분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몸을 풀거나 피스트(동선망이나 알루미늄 판으로 되어 있는 경기 공간) 위에서 연습을 했다.
재린과 나머지 선수들은 몸을 푸는 다른 선수들을 가끔씩 쳐다보면서 피스트 위헤서 가볍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재린은 명아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교환했다. 움직임이 편해지고 몸이 가벼워 졌다.
자신감이라고 이름지어진 행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먼저 행동에 옮기는 것이 자신감이다. 생각만 굴뚝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일어나 먼저 실천하는 것이다. 경기규칙에도 없고 시합장 규정에도 없다. 못하게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못하는가? 경기장 가운데 자리잡을 수 있는 것, 먼저 들어가 몸을 푸는 것,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남들 하는 것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용기고 바로 자신감이다. 그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확고한 자신감을 만들고 용기있는 도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한 준비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경기규칙에 따라 7명씩 예선 풀리그가 진행되기 위해서 선수들의 명단이 불려지고 있었다. 조별 선수 명단을 파악하면서 나는 준비중이던 재린과 명아에게 말했다.
“어때 자신있나 ?”
“네.”
“그래, 독일이라고 해서 다 잘하는게 아냐... 몇 몇 선수가 잘하는 거지, 쟤들 봐 엉성하잖아. 저 정도는 이기기에 충분하다. 아, 쟤 ! 쟤는 내가 전에 본(Bonn)에서 남자들과 훈련할 때 봤어. 저런 얘는 한손으로도 충분히 이긴다. 살가지 쪄가지고..”
재린과 명아가 내 이야기를 듣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 빛은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예선 리그가 끝났을 때, 재린을 비롯해서 모두는 긴장이 아니라 약간 흥분해 있었다. 서로들 경기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인데도 긴장해서 시원스럽게 뛰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눈치였다. 승률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재린은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명아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성질나요. 별것도 아닌데 5대 4로 졌어요.”
성질급한 명아가 내게 말했다. 나는 재린이나 명아의 상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일부러 얘기를 안 해주었다. 그 상대가 바로 세계랭킹 1위였던 나스와 5위 였던 보켈이었다.
당시 독일 팀은 여자 에페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큰 이변이 없는 한 올림픽 우승후보였다. 그리고 보쿰 시합은 비록 B급이었지만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뛰어야 하는 경기였다.
그러나 나는 재정으로부터의 정보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았지만 재린은 물론이고 선수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함께 동행하던 재정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 던 것이다. 심리적인 전략이기도 했고 또 이 시합을 선택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선을 마치고 전원이 본선 토너멘트에 진출했다. 본선 토너멘트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재린에게 말했다.
“재린, 저기 입구에 가면 게시판에 선수들 세계랭킹과 국내랭킹이 있을거야, 기 맨 위쪽 네명이 누구인지 보고 와.”
약간 의아해하면서 재린은 명아와 함께 갔다가 돌아왔다.
“선생님, 명아가 아까 뛰었던 상대가 세계랭킹 1위에요? 쟤가? 진짜로..., 어쩐지…….”
재린이 내게 말했다.
"왜, 그래서 놀랐니?“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도 잘 뛰던데 뭐가 잘못됐니?”
"아.. 아니에요.."
재린은 경기 전과는 달리 당황한 기색이었다.생각이든 행동이든 컴퓨터처럼 정교하고 철저한 재린은 이번 시합이 많은 부담이 되었다. 주장이고 그래도 모두 중에 가장 경험이 많은지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 ... 막상 시합을 하다보니 정신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이 상대한 선수들이 세계랭킹 1위고 5위라니... 갑자기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본선 경기가 시작되었다. 재린과 명아, 그리고 세희는 가볍게 64강과 32강을 통과하고 16강까지 무난하게 올라갔다. 재린의 다음 상대는 세계랭킹 3위였다.
나는 말했다.
“왜, 자신 없어? 세계랭킹 3위여서?"
“아뇨, 그냥."
“알고 나니 겁나?"
“……”
“긴장된다고 말하고 싶지?”
“네...”
“그건 실력이 없어서 겪는 그런 긴장이 아니다. 흥분이지.. 너희는 능력이 있고 자신도 있다. 그런데 긴장이라니... 그걸 긴장이라고 한다면 당연한거야, 시합이란 그런거야, 중학교 3학년짜리하고 시합하고 이겼다고 하나, 머리털이 팍팍서고 심장이 뛰고 한 포인트 찌를 때, 가슴에서 얼음덩이가 쏟아져 내리는것이 느껴져야, 그런게 시합이고, 그렇게 이겨야 이긴거 같지 않니? ”
갑자기 재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아랫입술로 윗 입술을 가볍게 물더니 ‘후’ 하면서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화이팅!“
“아까 예선을 뛸 때를 생각해봐, 상대를 몰랐을 때는 없는 실력이 갑자기 어디서 솟아나냐. 그런거 없어,,, 그게 네 실력이다. 가라, 가서 한 판 붙어... 흥분이 뭔지 한 번 보여줘 봐”
재린은 말하지 않았다. 그냥 잠간 서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마스크를 힘있게 집어 들고는 뚜벅 뚜벅 피스트로 걸어갔다.
상대가 몇 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과 겨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준비는 충분하다. 단지 우리가 시합에 자주 나오지 않아서 등수가 없는 것이지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상대를 모르고 뛰었을 때는 그런 불안도 걱정도 전혀 없었고 심지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다가 세계랭킹이 높다는 것을 알고는 심리상태가 바뀐 것이다. 경기를 해서 충분히 대적할 만하다는 걸 알았을 뿐만 아니라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도 막상 랭킹을 알고 나니 두려워진 것이다. 능력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지만 능력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잘 알려고 하는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고, 상대를 더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다. 그 상대에 대해 알고 나서 오히려 더 불안해하고 긴장한다면 그 생각은 어떤 것이든 잘못된 것이다. 그건 이길 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생각에 눌리고 쫓기게 돼서 그런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잡생각'이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다.
시합이 끝났을 때 재린과 명아는 8강에 들어갔다. 명아는 예선 성적이 좋아 대진이 순조로워 무난하게 8강에 들어가 4강까지 진출했다. 재린은 3위를 이기고 8강에 들어갔고 세희와 정영이도 분전했다. 명아의 성적은 재린과 모두에게 더욱 고무적이었다. 국제경기라는 것이 시합경험이 많아야만 하고 신체조건이 좋아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일거에 지워버렸다. 키가 160센티미터도 안 되고 국제시합 처음 나왔는데도 이기는데... 그깟 시합출전 횟수나 세계랭킹 몇 위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생각을 굳혔다. 모두들 중요한 건 그들 자신의 태도와 실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재린과 모든 선수들은 그렇게 이 단 한번의 시합으로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성과를 거두고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면서 나를 일지 옮기기 위해 메모해 두었다.
깨달음은 한 번만으로 충분하다. 같은 걸 놓고 두 번 깨닫지는 않는다. 단계적으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오직 ‘아~하 !’하고 깨닫는 그 순간 한 번으로 모든 것은 바뀌어 있다.
애송이들은 죽었다. 이제, 그들은 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