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 조회 수 2247
- 댓글 수 9
- 추천 수 0


[프롤로그]
고독의 창조 터널을 지나 살아있는 열정과 기쁨의 판타지 세계로
늘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늘 마음에서 우주로 보내는 신호에는 즉각적인 응답이 있다.
돌아보면 나의 바램이 꼭 나에게 맞는 것도 아닌 적이 많았다.
나의 강점을 모르고 하고싶은 것에 시간을 투자했던 수많은 오류들처럼
바램과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자아 성찰이고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을 찾고자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단한 실천을 통해서만이
나는 나 자신으로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게 될테니까 말이다.
그 때가 되면 그 기나긴 고독의 시간들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있는 순간 순간의 기쁨와 열정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성장이고 창조적 변화이다.
길을 만들어간다는 고독은 창조적 발상을 위해 대단히 윤택한 정서적 환경을 제공할 때가 많다. 고독하고 외로울 때, 내면을 성찰하여 새로운 세계를 찾는 데 열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집 앞 놀이터에 가 보았다.
어린아이때에 보았던 놀이터보다 훨씬 작게 느껴진다. 마치 초등학교 졸업 후에 찾아간 초등학교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운동장의 규모나 학교의 건물하고는 달리 너무나 작게 느껴지는 것과 흡사하다. 피곤함을 그네에 기댄채로 난 가을 바람을 온 몸으로 가른다.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하루의 피곤함이 이렇게라도 날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소박한 만족일지도 모르겠다. 놀이터에 오면 마치 내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더 순수한 마음이 되는 것 같다.
사실 어찌보면 이 세상도 또 하나의 남녀노소가 함께 있는 놀이터일 수 있는데 여전히 난 그들만의 룰에 혼동이 되고는 한다. 예전 소꿉놀이나 정글짐에서의 술래잡기등은 암묵적인 아이들과의 놀이터 사용 규칙이 있었고 그것은 따로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아이들만의 약속이였다. 지금은 사회 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규칙 속으로 들어왔고 이 어른들의 놀이터에서는 좀 더 그 규칙이 엄숙해지고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외워야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였다.
그래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Play Ground의 룰을 깨지 않는채로 부단한 자아성찰과 그에 따른 자신과의 약속이 뒷받침 되어야 보장되는 삶의 길찾기이다. 어린아이시절에는 그네, 미끄럼틀, 시소, 정글짐 등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알아내는게 쉬웠었다. 난 균형잡기와 스피드에 강했다. 뭐든지 빨리 익히고 조화와 균형을 다룰 줄 알았기에 외다리 건너기나 빙글 빙글 돌아가는 (지금은 그 이름조차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놀이 기구에서 술래를 잡아내는 걸 잘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의 놀이터에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설령 내가 시소보다 그네를 타보고 싶어도, 그것을 타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기술을 닦아야만 이 놀이터에서 술래가 되던 술래를 잡는 입장이 되던 혹은 혼자서 관망하면서 그 놀이기구를 즐기던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들었다.
난 자원해서 프로모션이라는 판타지와 행동가 영역에서 활동을 하다가 후에 SNS 매니저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연처럼 보였지만 나의 강점이 조금씩 더 두드러졌기에 맡게된 하나의 기회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난 놀이터의 습성과 그 원리와 규칙을 그저 노는 것처럼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기회와 만나서 시너지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퇴근 후 나에 대한 실험들 (이것은 실험에 가깝다 물론 열정적인 놀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을 통해서 난 박과장에서 사샤로 거듭나고 진정으로 그 둘이 만나서 온전한 최고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재창조란 나의 현재 가치에서부터 미래 가치로의 진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재창조란 그래서 현재를 벗어나서 있을 수 없음을 알게해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과거도 소중하지만 앞으로 내가 더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의 상황을 보다 명철하게 깨닫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네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그 다음 시소를 타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으로 손과 발이 가듯이 본능적으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들에 우리는 반응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연습하고 실험할 기회를 자주 만나고 실제로 삶에서 그러한 나의 재능을 펼쳐보일 수 있는 기회를 만났을 때에 만발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재창조의 과정을 그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나의 열정과 재능이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 후에 잠시 들렸던 놀이터에서 난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나의 사회 생활 그 어른들의 놀이터에서 견뎌낸 시간들을 앞으로 어떻게 제대로 놀아볼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견딤의 시간이였다면 이제는 내가 그려낸 나만의 열정으로 재창조해낸 판타지가 실제가 될 수 있도록 놀이터에서 제대로 놀아볼 생각이다. 정말 살아 있다고 느끼는 그 감정들을 이분화시키지 않고서도 살아낼 수 있는 Player가 되어볼 생각이다.
열정은 판타지다. '살아있음'의 희열을느끼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아, 정말 내가 살아있어'라고 내면이 소리칠 때, 우리는 그곳에 참으로 존재한다.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거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할 때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말한 것은 그때 비로소 인생은 제대로 살아져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환희를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최고가 된다는 것은 간단하고 명료한 화학작용이다. '열망하는 것을 잘 해낼 때 그리고 그 살아있음의 기쁨을 지속할 때' 우리는 어느 날 대가가 되어 있게 된다.
Patrick Bruel - Raconte moi



댓글
9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