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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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태리에 한발 다가가기.
회사 생활 3주째에 접어 들고 있다. 이제 정해진 출퇴근 시간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모양이다. 저녁에는 12시 정도가 되면 슬슬 하품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내일을 위해 이제 그만 자라고 몸이 신호를 보내온다. 그리고 알람이 울리는 6시에는 가뿐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다. 오늘은 짧으면서 긴 주말을 뒤로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다행히 많은 직장인들이 힘들어하는 월요병을 앓고 있지는 않다. 그저 매일 아침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기쁨이기도 하고,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물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매달 나가야만 하는 돈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 수 밖에 없다. 월요일 아침,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는데, 지난 주 금요일에 이어 그녀에게 주어진 일이 없다. 과장님과 차장님에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달라고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 오전 근무시간은 아무 업무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일도 하지 않고, 정해진 월급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게 왠 횡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오전 내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그녀가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어쨌든 월급이란 것은 그녀가 한 노동의 대가인데, 돈은 돈대로 받고,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회사에서 그녀가 쓸모 없는 존재가 되지는 않을까,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일이 없는 그 시간 동안 마음 편히 딴 짓도 못한다. 괜히 수백 페이지가 되는 교육용 자료를 읽고 또 읽는다.
점심시간. 오늘은 회사 앞에 있는 서점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배가 살짝 고파져서 서점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책 구경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길 건너에 있는 서점으로 향한다. 서점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분야별 베스트 셀러코너에서 발길이 멈췄다.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잡스의 자서전과 함께 그녀가 보고 싶었던 책들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다. 이 책, 저 책 눈길 가는 대로, 손길 가는 대로 닥치는 대로 집어서 보다 보니, 벌써 1시간이나 지나버렸다. 결국 밥은 먹지도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왠지 그녀의 일상 중에 소중한 점심시간을 수많은 책들에 둘러 쌓여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다. 룰루 랄라 내심 뿌듯해 하며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 한잔을 가지고 와서 집에서 싸온 도넛과 함께 점심을 대신했다. 오후에는 다행히 멀리 앉아 계신 차장님이 그녀에게 일거리를 주셨다. 그 순간 어찌나 기쁜지!!! ‘이렇게 아무 일없이 자리에 앉아 있느니, 그냥 집에 일찍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여서 그녀에게 주어진 그 일이 더욱 더 반갑고 감사하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녀가 굉장히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바로 옆 자리에는 부장님이 맞은편에는 과장님, 그리고 약간 떨어진 옆에는 옆 팀의 팀장님이 앉아 계셔서 그 분들이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그녀가 컴퓨터를 켜놓고 뭘 하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인 탓도 있다. 그래서 딱히 해야 하는 일이 없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딴 짓을 하고 있으면 혼자 뜨끔해서는 마음이 불편해 지기 때문이다. 아마 주변에 아무도 없고, 혼자서 마음껏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맘 편히 딴 짓을 했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문자가 하나 왔다.
“지난 주에 얘기했던 데 팩스 번호. 000-0000 담당 ㅇㅇㅇ 팩스 보내고 000-000-000로 전화해”
아뿔싸. 근데 오늘 평소 가지고 다니던 가방이 아닌 다른 가방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다른 가방 가져와서 없음. 내일 보낼게요.” 이렇게 보냈더니 엄마에게 답장이 왔다.
“아유 징한 것”
헉.. 이 문자를 받는 순간 그녀는 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집에서든 밖에서든 엄마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심부름을 자주 시키곤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한번에 심부름을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물론 10번 중에 8번은 사정상 못했던 것이고, 2번은 깜빡해서 못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녀에게 “넌 어떻게 된 애가 뭘 시키면 한 번에 하는 법이 없냐? 어쩜 이리 니 아빠랑 똑같아??” 라고 면박을 주곤 했다. 평소에 그녀를 잘 믿어주고 응원을 해 주시는 엄마이긴 하지만, 한 번씩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온 몸에 기운이 쫙 빠지곤 한다. 그리고 ‘내가 뭘 그리 크게 잘못했다고?’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엄마에게 기대했던 반응은 “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일 보내.”처럼 아주 단순한 반응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칭찬이나 인정이 아니라, 그저 그녀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지난 주에 엄마가 부탁했을 때, 팩스를 보내야 했던 그 서류를 가방에 챙겨 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엄마가 까먹어서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노트북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다른 가방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서류를 못 챙겼을 뿐인데, 이런 상황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것일까? 동생들도 없는데 엄마에게 잘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한번씩 이런 일이 생기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집을 뛰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생긴다. 물론 이렇게 답답한 그녀만큼이나 엄마 역시 그녀를 보며 많이 답답해 할 것이다. 두 사람의 성격이 정말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도, 판단의 기준도 모두 다르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아버지를 닮았다. 어쩌면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엄마 맘에 더 안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엄마의 짜증이 그녀보다는 아버지에게 주로 갈 것이기에 엄마와 트러블이 지금처럼 자주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현재로선 엄마의 비판을 오롯이 받아야 하는 것이 그녀밖에 없다. 사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니, 이런 것도 이해 못 해주냐?’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아니, 이런 간단한 것도 못해?’라는 생각 말이다. 지금 ‘누군가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내가 무얼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어줄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무한한 신뢰를 해 주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째깍째깍. 맞은 편에 보이는 벽시계를 보며 퇴근 시간 10분 전부터 계속 시계를 쳐다보며 퇴근 시간에 맞춰 나오는 음악소리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며 핸드폰을 잠깐 열었는데, 이메일이 도착 해 있다. 메일을 확인했더니, 예전에 이태리어를 배우기 위해 등록해 둔 사이트를 통해 또 다른 이태리 청년이 그녀에게 쪽지를 보내왔다. 그 동안 이 사이트를 통해 2명의 이태리 남자, 그리고 한 명의 인도남자와 연락이 닿았지만, 한 번 만나고 나서, 채팅을 하고 나서 모두 뒤에 연락이 이어지지 않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한번 연락을 하고 나서 또 연락이 뚝! 끊겨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려나?’ 별 다른 기대를 가지지 않고, 그녀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주고, 자신은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 온 로마에 살고 있는 이태리청년 다니엘에게 답장을 보냈다. 지금까지 연락을 해온 사람들과 달리 이태리에 살고 있다는 점과 다른 이들과 달리 꽤 적극적이라는 점이 그녀의 관심을 조금 더 끌었다. 그녀가 프로필을 올려 둔 사이트를 통해 쪽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그에게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고는, 메일로 대화하자고 했다. 그러자 10분도 채 안 되어 다니엘에게 메일이 왔다.
다니엘에게 온 서신1.
“안녕 미나!! 그래, 많은 단어들을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해봐. 내가 영어공부 시작할 때, 이미지가 많은 책이랑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서 공부했거든. 무척 쉬운 방법이지!! 그리고 내가 지나다니는 모든 곳에 영어단어를 쓴 포스트잇을 붙여놨어. 그래서 굉장히 빨리 외울 수 있었지. 이 방법이 마음에 들면 너도 한번 시도해 봐!!
나는 로마에서 컴퓨터 엔지니어 일을 하고 있어. 오늘은 어제부터 이태리는 휴가기간이라 쉬는 날이야. 우리 보스가 오늘 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해서 하루를 더 쉬게 해 줬지. 완전 좋은 소식이지!!! 여가 시간에 나는 주로 책 읽기, 영화보기, 극장가기, 스포츠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음악도 듣는 등 많은 일을 해. 하지만 규칙적으로 하는 건 운동과 친구들 만나는 것 그리고 주말엔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주곤 하지.^^
참, 그래서 이태리에서 루카 말고 다른 곳은 안 가봤어?”
그녀가 보낸 서신1.
“안, 다니엘!! 니가 공부하는 방법은 굉장히 좋은 듯!! 한번 시도해 볼게^^
오늘 하루 더 쉴 수 있게 되었다니. 좋겠다. 부럽기도 하고!!
몇 분전에 일을 끝내고 지금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컴퓨터 엔지니어라고? 힘들지 않아? 사실 나는 컴퓨터랑 별로 친하지 않거든.
열흘동안 이태리에 있는 14개 도시를 여행했어. 밀라노, 피렌체, 루카, 베로나, 아씨시 등등 아쉽게도 로마는 가지 못했네. 그 중에서 특히 아시씨와 루카의 자연이 너무 좋았어. 그래서 지금 루카에 가서 살면서 가끔 아시씨에서 휴가를 보내는 꿈을 꾸고 있지. 그 곳에서 살면서 내 인생에 대한 글을 적어 보고 싶어.
너는 어때? 이태리 말고 가서 살고 싶은 곳은 없어??”
다니엘에게 온 서신2.
“와우!! 너 이태리에서 정말 많은 걸 봤구나!! 하지만 로마를 놓치다니!!! 넌 꼭 여기 와봐야해!! 니가 오면 곳곳을 구경시켜 줄게~!! 니가 오는 시간을 알려주면 스케쥴을 조정해 둘게. 물론 내가 쉬는 날이어야하겠지만 말이야. 모델 일은 미룰 수 있어~!!
글쎄… 나는 이태리 말고 다른 곳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독일은 좋을 것 같아. 스위스도, 유럽이면 어디든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아시아도!! 난 아시아 음식을 정말정말 좋아하거든!! 한국 음식도 좋아해~~!!! 김치도 엄청 많이 먹을 수 있어!!! :D
친구랑은 만나서 뭐해? 술? 영화? 아님 그냥 걸어다니나?”
그녀가 보낸 서신2.
“와우~~!! 다니엘!! 관광시켜주겠다니 완전 고마운 말이다!!! 나 정말 내년엔 로마에 꼭 가야겠다. 꼭 갈게!!! 벌써 내 마음은 로마에 가 있는 것 같군!!! :) 모델은 매주 하는거야?? 김치를 먹어봤다고?? 이태리에서??
난 조금 전에 친구 만났어. 아마 맥주 마시러 갈 것 같아~!^^”
다니엘에게 온 서신3.
“오, 아니. 미국에서 김치 먹어봤어. 로마에는 한국 레스토랑이 많지 않거든 :( (나는 한국 음식도 좋아하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거든. 그래서 김치를 정말 많이 먹었어!! 그리고 불고기도 정말 맛있었어. 먹을거리들이 정말 많더라고!! :D
아무튼, 너를 로마에서 곧 봤으면 좋겠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게 아니고 화가들을 위해 모델을 하는거야. 매주 하는 건 아니고,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하고 있지. 저녁에는 추워서 야외보다는 실내에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주로 취미로 하는 거야. 가끔은 재미있고, 가끔은 지루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부끄럽기도 해. 어떤 화가와 작업하느냐에 따라 많이 다르지. :)
맥주라.. 나를 대신해서도 마셔줘~:)”
그녀가 보낸 서신4.
“미국에서 김치를 먹어봤다고? 그래, 미국에는 한국음식점이 참 많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도 김치야!! 모든 종류의 김치를 다 좋아하지.
나도 최대한 빨리 로마에 가고 싶다. 지금 샹그리아 마시고 있는데, 너를 위해서도 한잔 마셔줄게~^^ 친구는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어. 지금은 예전 회사 동료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아직 집에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거든.^^;;
언젠가 나도 화가들을 위해 모델이 한번 돼 보고 싶어. 재미있는 경험일듯!!!”
다니엘에게 온 서신5.
“글쎄… 화가가 누구냐에 따라 너무 달라. 어떤 사람이랑 작업하면 굉장히 재미있지만, 어떤 사람이랑 작업하면 무척 지루하거든. 작업하다가 잠들 수도 있어. 하하하. 포즈 잡고 있는게 무척 힘들수도 있고 말이지. 그리고 때론 좀 부끄럽기도 하지. 그래서 작업이 끝나면 작가들이 그림을 사진으로 만들어서 보내주기도 해. 물론 숨겨 놓기는 하지만 말이야. :D
음. 샹그리아!! 좋아해!! 나를 위해서도 한잔 마셔준다니 고마워. 로마에 오면 같이 마시자!!!”
그녀가 보낸 서신5.
“이제 집에 도착!! 한국은 밤 10시야. 로마는 오후 2시지?
그래, 사람에 따라서 모델이 재미있을 수도 없을수도 있구나. 포즈잡는 동안은 왠지 많이 힘들 것 같아. 시간도 오래 걸리지?
너를 그린 그림 사진으로 가지고 있는거야?? 나중에 로마에 가면 보여줘~!!!^^
샹그리아 좋아하는구나?? 나도!!! 그래, 로마에 가면 같이 마시자구!!! :)”
다니엘에게 온 서신6.
“움.. 보통 2시간 이상 포즈를 잡고 있지는 않아. 틈틈이 쉬는 시간도 가지고 말이지. 그래서 그렇게 힘들진 않아. 그림을 사진으로 몇 장 가지고 있긴 한데, 그게.. 좀 보여주기 부끄러워. 왜냐면 올 누드인 그림이거든. :) 뭐 니가 원한다면 보여줄 수는 있어.
당연히 로마에 오면 샹그리아 같이 마실 수 있지!! 뿐만 아니라 와인, 아이스크림, 피자도!! 계절에 따라 다 먹을 수 있어!! 언제 올거야??”
그녀가 보낸 서신6.
“2시간?? 엄청 길구나. 내가 하기엔 정말 힘들겠다. 사진 가지고 있다고?? 물론, 보고싶어!! 누드? 힘들지 않아? 너 정말 용감하구나?? 풀누드라니 상상하기도 힘든데!!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내 누드를 세상에 남겨보고 싶긴 해.ㅋㅋㅋ.
샹그리아, 와인, 아이스크림, 피자라니.. 말만 들어도 너무 좋다!! 그러면 여름에 로마에 가야 할까?
로마에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아마 내년 여름? 가을? 아니면 겨울? 최대한 빨리 가고 싶어. 언제 갈 수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년엔 꼭 갈거야~!!!”
다니엘에게 온 서신7.
“음.. 여름 좋지. 하지만 너무 덥고, 사람들이 많아서 도시를 즐기기엔 조금 복잡하지. 내 생각엔 3원이나 4월이 좋을 것 같아. 날씨도 좋고, 관광객도 많지 않거든. 아이스크림도 먹고 밖에서 이것저것 먹으면서 즐기기엔 아주 좋은 날씨지!!! 아 그리고, 8시까지 해가 떠있을 정도로 낮이 길거든!! :)
꼭 2시간은 아니야.. 가끔 풀 누드로 있는건 부끄러워.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봐!! 너한테 그림을 보여주기엔 조금 부끄러워. 정말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풀 누드!거든. 하지만 니가 로마에 오면 니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 모델이 되어 줄 수 있어!! 풀 누드로도 말이지!! 물론 니가 원한다면 :)”
그녀가 보낸 서신7.
“그러면, 구경하기엔 봄이 좋다는거지?? 그 때 갈 수 있으면 꼭 갈게!! 그래, 여름은 정말 덥더라!! 하지만 그늘 아래서 불어 오는 바람은 정말 좋았어!!! 8시까지 해가 떠 있다고? 그건 몰랐네. 좋다!!
나를 위해 누드모델까지 해줄 수 있다니 고마워. 하지만, 난 괜찮아. 그림이나 사진찍는 것엔 소질이 없거든. :)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니, 다시 이태리가 그리워져.ㅜㅜ..”
다니엘에게 온 서신8.
“여름도 바다 옆에 있는 도시는 정말 좋아. 바람이 불어서 기분이 좋아지거든. 정말 좋아. 하지만 로마의 여름은 정말 덥지!! 하지만 걱정마, 4월은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한 날씨니까! 니가 원하면 매일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다고!! 그러니 빨리 로마에 와!! :) 한국에 대해서도 얘기해줘~!! 한번도 가본 적도 없고, 아는 게 없거든.
그래, 너를 위해 모델이 디ㅗ어 줄 수 있어. 너는 되게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너랑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좋아. 니 앞에서 풀 누드로 있어도 부끄럽진 않을 것 같다. 니가 싫지 않으면 사진을 보내줄게. 괜찮은지 알려줘~!! :)”
그녀가 보낸 서신8.
“와우!! 바다라니~!! 친퀘테레(<-스펠링 맞니?)에 갔을 때 바다를 봤는데, 너무 아름다웠어~!!! 뜨거운 태양 아래 바다에 누워 있었는데, 정말 좋았어!!! 나도 정말 빨리 로마로 가고 싶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있어.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아마 몇 달이나 일년 후에나 갈 수 있을 듯? 1년 안에는 꼭 가고 싶어. 몇 달 뒤에 말이지. 한국에 와 본적이 없구나. 아시아에 다른 나라는 가 본 적 없어? 나는 서울에 살고 있어. 사람들이 정말 많지. 차도, 빌딩들도. 정말 말 그대로 ‘도시’야. 참 좋은 곳이긴 하지만, 너무 복잡해. 한국에 대해 뭐라고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다.^^; 하나씩 얘기 해 줄게.
사진은 보내도 상관없어. 사실 어떤 그림일지 궁금하긴 해~!!”
다니엘에게 온 서신9.
“맞아. Cinque terre. 정말 좋지!!! 이태리에서 정말 좋은 곳이야!! 지금 친퀘테레에 비가 엄청 오고 있어. 하지만 거기 정말 좋아!!
음.. 서울이라. 한국에도 여행하기 좋은 도시들이 많아? 이태리처럼, 로마나 루카, 다른 도시들처럼 말이야. :) 일본은 한번 가봤어. 정말 좋더라~! 그리고 회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 사실, 내가 먹는 걸 좋아해!! 하하하. 언젠가 한국도 꼭 가 보고 싶다. 물론 남한에만.!! 한국은 여행하기 쉽지? 나중에 관광시켜 줄 수 있는 거지??
사진 보낼게. 니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물론 전라이긴하지만, 니가 괜찮다면.”
그리고 다니엘이 보낸 답장과 함께 온 사진 한 장. 당시 노트북으로 이메일을 쓰고 있었던 그녀여서 웹상에서 본 그림은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태리에서 봤던 수많은 전라의 조각작품들과 비슷하게 느껴졌달까?
그녀가 보낸 서신9.
“와우!!! 그림이랑 니 몸, 정말 이쁘다!! 기대 이상인데~!!!
그림 느낌이 되게 좋아. Melancholy, 파일이름도 좋다.
일본에 가봤다고? 일본 좋지. 나도 3년 전에 3일 정도 가본 적 있어. 언젠가 또 가고 싶은 곳이지. 나도 회 엄청 좋아해~!!
나중에 니가 한국에 놀러오면, 여기저기 구경시켜줄게. 좋은 곳들이 많거든. 물론 맛있는 음식들도 많고 말이야~!! :)”
다니엘에게 온 서신10.
“니가 좋아해주니 좋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아? 내 말은 이제 너는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된거야. 하지만, 그림을 좋아해주니 좋아~!! 나중에 원하면 널 위해 모델이 되어 줄게~!!
한국에 꼭 가보고 싶어!! 가본 적은 없지만,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은 정말 좋아하거든. 거기는 언제 가는게 좋아? 가게 되면, 맛있는 초밥을 먹을 수 있는 곳도 데리고 가줘~!! 들어보기만 하고, 먹어보진 못했는데, 맛있지??”
그녀가 보낸 서신10.
“부끄럽냐고? 전혀~!! 너도 알다시피, 우리의 몸은 전부 아름답잖아~!! 이제 너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구나.!! ㅋㅋㅋ. 언젠가 니가 모델이 되어 주면 좋겠다 싶을 때, 얘기할게. 고마워 다니엘~!
한국에 놀러와~!!! 한국에 좋은 곳들이 정말 많아. 모든 계절이 다 좋지만, 니가 더운 걸 싫어한다면 봄이나 가을이 여행하기 좋을 거야. 봄이나 가을은 그렇게 덥지도, 춥지도 않거든. 걸어 다니면서 돌아다니기 좋은 날씨야.
한국 초밥도 일본과 크게 다르진 않아. 아주 맛있지!! 한국에 오면 맛있는 곳으로 데려갈게~!^^”
다니엘에게 온 서신11.
“고마워. 언제든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봐~!!!
추운 날씨는 좋아해. 하지만 비는 별로 좋아하진 않고. 차가운 날씨에 너랑 같이 걷다가 카페에 가서 뜨거운 커피나 차도 마시면 좋겠다!!
이제 가봐야겠어. 조만간 또 메일 할게. 나와 이메일 해줘서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다니엘과의 하루 저녁에 폭풍처럼 주고 받은 이메일을 마지막으로 이후에 그녀는 메일을 한 차례 더 보냈지만, 더 이상 답장이 없었다. 왜 그럴까? 왜 그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한번 그녀와 이야기하고 나서는 더 이상 연락이 없는 것일까? 영어를 못해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다니엘은 자신의 사진을 보낸 것이 부끄러워서였을까? 아니면 누구 말처럼 그냥 ‘이상한 애-변태 같은?-‘라서 목적을 달성하고 더 이상 이메일을 보낼 필요성이 없어서일까? 아쉽지만, 이태리에서 느끼지 못한 이태리 남자를 이메일로 느끼니 ‘아, 이게 이태리 남자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이태리에 가면 그 곳의 남자들에게 잘 적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금요일에 이어 3일째, 사무실에서 그녀는 할 일이 없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너무 불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과장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과장님, 저 일 좀 주세요. 이러다 일하는 방법 다 까먹겠어요. ㅋㅋㅋ. ㅜ’
그러자 곧바로 과장님에게 메일이 왔다. ‘있어봐봐.ㅋㅋ. 차장님이 준 일 다했어요?’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답장을 보냈다. “네, 그건 어제 벌써 다 끝냈죠!!!”
다시 감감 무소식.. 과장님이 답장이 없다. 결국, 연속 3일째 오전 시간동안 별 다른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그녀다. 오늘도 역시 이것도 저것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 내지 못한 채 점심 시간이 와 버렸다. 화요일은 팀 점심을 먹는 날이다. 그래서 팀장님 이하 모든 팀원들이 다 함께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지난 주에 이어 두 번째 팀 점심인데, 지난 주에는 노사위원장님과 함께, 그리고 이번 주는 부장님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사실 약간은 가족적이고 화기애애한 팀 점심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매 번 팀 이외의 그다지 편하지 않은 팀 외의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면서 팀장님과 부장님 그리고 외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식사에만 열중한다.
특히 정직원도, 인턴도 아닌 그녀는 할 말이 없다. 물론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를 궁금해 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어차피 이 회사에서 오래 일 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직업과 직장이 그녀가 살면서 삶에서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저 그녀의 경제적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더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맡은 일을 되도록 완벽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욕심, 그래서 그 일 자체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은 있으나, 회사에서 일을 잘 해서 오래 회사에 남아있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은 없기 때문에, 더욱 회사 내에서 개인적인 관계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길고 어색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과장님, 차장님이랑 걸어오면서 지난 금요일 체육대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때마침 그녀는 과장님에게 ‘저 3일 연속으로 놀고 있는데 어떡해요? 이건 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 라고 했더니 과장님과 차장님은 이구동성으로 ‘놀아, 놀아~. 할 일이 없는데 어떡하겠어?’ 거기다가 과장님은 한 술 더 뜨신다.
‘놀긴 노는데, 한글 창은 하나 띄워놓고, 서류들도 책상에 쌓아 놓고 놀아. 팀장님이 미나씨 노는 줄 알면, 내가 혼나거든.’
으하하하하하. 과장님 얘기를 듣고서 그녀는 완전 배꼽을 잡고 쓰러질 뻔 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조금 더 맘 편히 다른 짓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무실에 들어오는 길에 ‘근무 중 딴짓’에 대한 허락을 공식적으로 득하고 나니, 마음이 무척 가볍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오전시간보다는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최대한 ‘일하는 척 하면서, 딴 짓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옆 자리에 부장님이나, 또 다른 옆에 계신 옆 팀 팀장님이 그녀의 자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그녀를 봐도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관건이다.
일단 근무 중에 쓰는 한글 문서 창을 켰다. 모니터에 꽉 차게 창을 띄워 둔 뒤에 인터넷 창을 켰다. 그리고 창의 크기를 많이 줄였다. 그리고 그 창을 모니터와 한글 문서창의 아래 쪽에 배치했다. 그런 다음 여기저기 사이트들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서시더니 스트레칭을 하신다. 그녀의 모니터를 바라보시는 눈길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느껴진다. 순간 뜨끔!하여 창을 닫았다.
‘아.. 아무래도 이 방법은 너무 눈에 띄어서 안되겠어. 마음이 편하지를 않아.’ 계속해서 인터넷 창을 열었다 닫았다. 책상위에 있는 서류를 들춰보았다가 말았다가, 한글 문서창을 켰다껐다하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집중도 못하고 계속 안절부절이다.
첫 번째 방법은 실패. 두 번째 방법으로 선회했다. 이제 컴퓨터 모니터는 포기하고, 책상 위에 있는 노트를 활용하기로 했다. 어제 점심시간에 서점에 가서 열심히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리스트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11월 오프 수업 과제를 하기 위해서 그녀가 쓰기로 한 책이 비슷한 책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 봤던 책 스물 한권의 제목을 모두 적었다. 그런데 다음 스텝이 문제다. 차이점을 알기 위해서는 그 책들을 자세히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검색을 해야 하고, 검색을 하기 위해 다시 인터넷 창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도 실패.
일단 딴 짓을 할 때도, 마음이 편해야 하고, 갑자기 누군가가 곁으로 오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티가 나지 않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하!!! 글을 써야겠다. 일단 그녀가 계속 써 오던 글은 너무 티가 나니까 따로 작은 창으로 하나 열어 두고, 업무용 한글 문서에 글을 써서 붙여넣기를 하는 것이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글을 쓰는 것도 딴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한 번에 쓰는 양은 2-3줄로 제한한다. 그리고 계속 오려서 갖다 붙인다.
그녀는 곧장 실행에 옮겼다. 한글 문서 창을 하나 켜고, 그 중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말 감쪽 같다. 아무도 그녀가 딴 짓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할 것이다. 계속 눈치 보느라 긴장되어 있던 몸에서는 긴장감이 조금 가셨다.
그리고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녀는 그렇게 퇴근시간까지 남은 한 시간 반동안 글을 써 내려갔다. 글을 쓰다가 보니, 웃음이 픽 난다.
무슨 007첩보 작전도 아니고, 두 세줄씩 글을 쓰고 복사하고, 오려 붙이고 있는 자신을 보니 웃음이 난다. 더 재미있는 건, 그러면서 은근 그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스릴이 있다는 것이다. ‘스릴 만점’이란 단어는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나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도, 아직 퇴근 시간이 40분이나 남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몹시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순간,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로 있어본 적이 있던가?’ 라고 생각해 본다. 완전 갓난아기일 때는 모르겠으나, 그 때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되짚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때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 같다. 깨어 있는 순간에는 무엇이든 해야 하는 성격이다.
회사생활 2주째인데 사실 조금 걱정이 된다. 편하게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적당히 눈치 보면서 딴짓하기, 1시간만에 끝낼 수 있는 업무를 2시간만에 끝내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기.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 버리지는 않을까 약간은 두려움이 앞서는 그녀다. 얼마 전에 만난 분이 그녀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미나씨, 그 노래 알아요?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이런 가사가 나오는 노래 말이에요.?”
그녀,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죠.”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던 그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내년에는 이태리로 나가고 싶고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거죠. 구체적인 것은 그 때가 되어 봐야 알 것 같아요.’ 이렇게 대답한 그녀가 그에게는 변진섭의 노래 ‘희망사항’의 노래 가사처럼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꿈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2시간 남짓의 만남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모습이 그렇게 완벽한 건 아니에요. 얼마 전, 하나를 포기했죠. 직업과 그에 따른 가치를 포기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그저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지금 회사에서 맘 편히 일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는 “포기 했다고요?”라고 놀란 표정으로 물으며, 그제서야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말 그녀의 말처럼 직업과 직업에서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를 버렸다. 그저 ‘밥벌이’의 수단으로 일을 하고 있다. 많은 직장인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 그녀이기에 한 순간에 그렇게 바뀌기란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무언가 그녀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 완벽하고 신속하게 일을 끝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근무 시간 중에 놀아야 하는 상황도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그녀가 그런 상황들에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해도 괜찮아. 직장이라는 게 다 그런거니까.’ 라는 생각과 ‘이렇게 그냥 보통 사람처럼 되어 가고 싶지는 않은데.’라는 두 가지 생각이 늘 그녀의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만은 완벽하리만큼 훌륭하게 소화 낼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경험조차 그녀에게 많은 것을 남길 것이라는 점이다. 창의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주어진 일만 열심히 처리하면 되는 일에 대한 따분함, 권위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조직 체계에서 겪을 수 있는 쓸데없어 보이는 절차들에서 오는 시간적 손실 등에서 느끼는 답답함 같은 것들이 그녀를 비바람이 몰아쳐도 계속 자라나고, 마디마디를 늘려가는 대나무처럼 조금씩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출근 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매일매일 비 오고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테니스를 치러 가던 엄마가 얼마 전 한번 심하게 앓고 나서는 하루는 집에서 느긋하게 쉬고, 또 다른 하루는 예전처럼 새벽같이 테니스를 치러 나가고 있다. 20여년간 꾸준히 치던 테니스 이외에도 독서나, 그냥 집에서 쉴 수 있는 여유를 찾은 것 같다. 건강을 생각해서 격일로 테니스를 치기로 했단다. 그런 엄마가 오늘은 테니스는 뒤로하고 늦게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서 열쇠를 가지고 있다가 사라졌는데 못 찾아서 문을 그냥 열어 두고 간다는 것이다. 그녀도 두세번 열쇠를 사무실에 있는 다른 가방에 두고 와서 문을 열어 놓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엄마나 동생이 집에 일찍 도착해서 그녀의 실수를 만회해 주곤 했다. 오늘은 엄마가 그녀에게 꼭 일찍 들어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집에 도둑이 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불안한 그녀. 야근을 해도 될 정도로 그녀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처리해야 할 서류들로 가득한데, 6시 퇴근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마자, 컴퓨터를 끄고 팀장님이 눈치를 주던지 말던지 신경도 안 쓰고 쌩하니 퇴근을 해버렸다. 나와서 버스를 타려는데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엄마 한 군데 더 들렀다 가야 해서 늦을 것 같아. 너 지금 출발 하지? 집에 혹시 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문은 꼭 열어놓고 들어가. 방 구석구석이랑 베란다까지 있는 문들은 모조리 열어놓고 별 일 없는지 확인 한 다음에 현관문을 닫도록 해. 알았지?”
지금까지 문을 하루 종일 열어 둔 적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도둑이 들어오거나 한 적은 없었다. 아파트에 사는 게 다 그러하듯, 단지 내에 엄청난 인원의 사람들이 살고 있긴 하지만, 5년이 지나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인 경우가 많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은 난장판이고, 누가 들어온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들어왔다가도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라며 놀라서 바로 도망갈 만한 상황이다. 집안을 대충 한번 훑어 보고는 엄마에게 보고를 했다. “엄마, 별일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날은 점심을 회사 1층 카페에서 우롱차로 대신하고, 퇴근 길 내내 긴장을 해서인지 더 허기가 진다. 아침에 엄마가 냉동실에 얼려 놓은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녹인 후, 김치를 잘게 썰어 볶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인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남이 뭐라고 해도 그녀는 그녀가 한 김치 볶음밥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양심상 ‘제일 맛있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말이다. 밥을 먹고 배가 불러서 잠깐 누워있는데, 그날 따라 갑자기 연애가 하고 싶다고 페이스북에 공개적으로 ‘소개팅 해 달라’고 징징대던 그녀는 가을을 타는지 기분이 급 다운 되었다. 소개팅을 해 줄만한 사람에게 염치불구하고 문자를 보내고, 집 근처에 맥주를 한 잔 할만한 사람들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뭐 그래 봤자, 그녀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사는 선배와 그녀가 자주 가는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사는 대학동기였다. 선배는 역시 다른 곳에서 술자리를 하고 있었고, 동기 녀석은 다행히 운동을 하고 씻으려는 찰나였다며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왔다. 여행 가기 전에 한번 보고 거의 3개월 만에 얼굴을 보는 친구였다. 맥주 딱 한잔이 생각날 때 자주 만나는 친구다. 기분도 울적하고, 바람이나 쐬며 시원한 맥주를 한잔해야겠다고 집을 나서는 그녀. 학교 앞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잡지를 보며 친구를 기다린다. 평소 같았으면 책을 읽고 있었겠지만, 그날 따라 책도 노트북도 가지고 나가기가 싫었다. 그냥 주머니에 손 꽂고 나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볼 생각이었다. 무언가 정해진 것은 하기 싫고, 집중도 잘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카페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친구가 그제서야 가고 있다며 문자가 왔다.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고 답을 하고 나서 생각하니, 바깥 바람을 쐬며 커피 한잔 했더니 금새 우울한 기분이 싹 사라졌다. 어찌나 단순한지. 그녀는 자기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단순한지 그냥 웃음이 난다. 친구가 와서는 의자에 앉자마자, 무슨 일이냐며 걱정스레 묻는다. 엄마랑 또 싸웠는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그냥 별일 없다고, 가끔 이렇게 갑자기 기분 안 좋아질 때가 있지 않냐며 얘기를 한다. 둘은 카페에서 나와 학교로 걷는다. 학교 앞 수퍼에서 맥주 500cc 짜리 두 캔을 사 들고 학교 안의 벤치로 향한다. 조용하고, 차갑지 않은 바람이 살랑 불어 오는 학교는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3개월. 여행을 다녀와서 상황도,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기에 여행 얘기부터 그 동안 있었던 신상의 변화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한참 하고, 최근에 연애를 시작한 친구의 이야기도 듣고 1시간 정도 농도 짙은 수다를 떨었다. 논문 쓰느라 정신 없는 대학원생인 친구는 어느 새 맥주 한 캔에 얼굴이 발그레 해지고 슬슬 잠이 오는 모양이다. 그녀도 요즘 12시면 잠자리에 들고 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두 사람은 대화를 슬슬 정리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그녀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는다. “두런두런 즐거운 수다와 맥주 한잔의 행복 – 숭실대에서”
요즘 저녁에 매일 그녀가 하는 일이 있다. 설거지 하기와 다음 날 아침 밥 해 놓기. 예전에 남동생이 함께 살 때는 매일 저녁에 동생이 매일 일 하느라 피곤하고 새벽에 일찍 운동하고 일 하러 가는 엄마를 위해 하던 일이다. 이제 동생도 없고, 엄마도 몸이 안 좋아지니 그녀가 맡아서 하고 있다.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고, 밥까지 하고 나면 2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 적은 시간이지만 그만큼 투자해서 조금이라도 엄마가 편할 수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 마음 같아서는 엄마 말대로 그녀가 돈을 다 벌어서 엄마 생활비와 용돈을 팍팍 드려서, 바깥 일과 집안 일을 하지 않고도 엄마의 삶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니, 일단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기로 했다. 예전에 매일 밤 설거지를 하는 동생을 보며 ‘참 대단하다. 저 시간에 와서 어떻게 저렇게 하고 자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는 너무 철이 없었나보다. 남동생은 지금도 가끔 그녀에게 집안일을 많이 하고 있냐고 묻는다. 얼마 전 영상통화에서도 그렇게 물어서 너무나 당당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가 동생한테 혼이 난 그녀다. 엄마 힘든데 그것도 안 하고 뭐하냐고 말이다. 동생들보다 철이 늦게 들어 늘 걱정만 한 가득 안겨주는 그녀가 이제는 엄마랑 둘이 살면서 엄마의 삶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 보고,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 더 ‘그녀 중심적 사고’에서 ‘엄마의 상황까지 이해할 수 있는 사고’에 이르게 된 것 같다. 좀 더 간결하게 이야기하면 예전보다는 더 ‘이타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색하진 않지만, 맏이이기 때문에 오는 중압감들이 어릴 적엔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중압감을 오랜 시간 견디고 짊어지고 오다가, 어느 순간인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놓아버렸던 것 같다. 아마 이 순간부터 동생들이 그녀에 대한 걱정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약한 모습을 받아 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맏이로서의 책임감을 더 쉽게 놓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동생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보다 엄마를 더 많이 걱정하는 동생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다른 맏이들보다 조금, 아니 더 많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동생들이 엄마와 그녀의 곁을 떠남으로써 그녀가 다시 맏이로써, 딸로서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오늘도 친구와의 수다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설거지와 밥 하기를 마무리하고는 개운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