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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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13. 죽음의 메타포
삶은 철과 비슷하다. 사용하면 마모된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면 녹슨다. - 카토
1. 19세기 미국 남부의 노예농장이었던 곳에서 일꾼들이 단지를 무덤위에 버리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백인 감독원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에서 도기류는 취사나 물을 나르는 용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깨어진 그릇의 원상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시간의 한계성, 즉, 생명이 죽음으로 변하면 그 이전의 상태로 역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도기를 부수는 의식은 양자 사이의 깨끗한 단절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세계 여러 곳에서 결혼과 삶의 의식들이 창조를 수반하듯이 죽음의 의식 중에도 단지를 깨트리는 의식이 수반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서 아프리카에서 산파는 옹기장이의 역할이며 죽은 자를 땅에 묻는 일은 대장장이인 그녀 남편의 몫이었다.
2.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 입니다.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하나에 각각 알맞은 몸을 주십니다.....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그리스 정교회의 기도문에는 유족들이 무덤에 둘러서서 여러 가지 과일과 씨앗들을 먹듯이 “그대를 먹여 키웠던 흙이 이제 그대를 다시 먹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죽음을 식물에 비유하는 것은 짧은 시간과 사망의 이미지 때문 일 것이다. 인간의 날들은 단지 풀잎과 같다. 인간은 들판에 피어있는 한 송이의 풀과 같은 처지이다. 바람이 꽃을 덮치면 꽃은 그것으로 끝난다. 장례식에 쓰이는 화환은 곧 시들어 죽고 말 뿌리 짤린 꽃들이다.
3. 고전주의 시대 이래로 불 꺼진 횃불은 죽음의 상징이다. 영어에서 장례를 뜻하는 퓨너럴(funeral)은 로마 장례식에서 사용했던 횃불에 해당하는 라틴어에서 파생했다. 아직도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공원의 지하 납골당 출입문은 횃불로 장식된다. 이탈리아의 무명용사들의 무덤에 설치된 램프는 생명의 불멸성, 기억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종교개혁 이전의 부활절에 지성소의 불은 일단 꺼졌다가 거대한 부활절용 초와 함께 다시 점화되었다.
멕시코의 차무라 부족은 각자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태양의 복합체인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저마다 길이가 다른 초가 하늘에 켜져 있다. 그 초가 다 타버리면 그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4. 영국 교회의 뜰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혀있고 그들의 묘석에는 흔히 “고이 잠들다”라고 적혀있다. 영어의 “묘지”라는 단어는 “잠자는 곳”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정통 기독교 교회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이 울릴 때 육체가 부활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죽음을 잠과 동일시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직도 시신 주위를 입을 다물고 살금살금 다니면서 망자의 잠을 방해할까봐 속삭이며 말한다. 산자들이 죽은 자들의 시신에 둘러앉아 밤을 새우면서 잠의 처벌은 곧 죽음이라고 여기는 철야제에서 잠과 죽음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죽음이 잠이라면 무덤은 침대다 이러한 생각은 남편과 부인을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낳았다. 즉 짝을 맞추는 개념이다.
5. 유태인들의 장례풍습에는 전통적으로 천을 찢는 행위가 있다. 세계의 여러 곳,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직물의 날실을 자르는 행위는 죽음, 인간 사냥,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같은 사회적 조직 속에서 시간의 날실을 가르는 행위다. 천을 찢는 것은 일종의 의식행위이므로 관료적 의식적 정의가 필요하다. 옷은 목 부근, 거기서부터 앞부분을 찢되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찢어야 하고 솔기는 찢으면 안 된다. 가까운 친척의 초상인 경우에는 찢어진 틈을 7일간 애도한 후에 다시 시침질 해야 한다. 그리고 30일이 지나면 완전하게 꿰매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의 경우엔 찢어진 틈은 30일이 지나서 시침질만 가능하며 완전하게 꿰매는 것은 금지된다.
계절이 자연 순환의 일부이듯 슬픔도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점점 동질화되어 긴다. 일년내내 딸기를 살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질적으로 더 이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시간은 자신의 리듬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11월은 죽음의 메타포를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모든 성인의 날이 11월에 있고 모든 먼저 간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는 달이다. 위령성월.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삶이 완전하면 할수록 창조력은 그만큼 더 발휘된다. 삶이 완전하지 못할수록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불완전함이다. - 리슬 굿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