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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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자들에게 띄우는 편지
두 돌이 넘은지 얼마 안 된 딸아이가 옆에서 티비를 보고 있다가 제가 하는 자세를 따라하며 매우 뿌듯한 눈을 들어 저를 바라보더군요. 무엇이 그리 뿌듯한지 제 자세를 그대로 따라하려 하면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웃음이 나더군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공포심같은 게 살짝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때 옆으로 누운 채 티비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그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것을 매우 자랑스레 보여주고 있었지요. 이 녀석은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생각 못하고 그대로 따라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요. 이래가지고는 앉아서 티비보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어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저의 딸아이는 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할 만큼 커버렸더군요.
그래요. 이런 일도 있었네요. 저희 엄마와 저는 하루의 끝자락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을 좋아했는데 언젠가 소꿉놀이를 하던 녀석이 이래저래 늘어놓고 컵에 따르는 시늉을 하면서 “맥주야.”라고 말했지요. 이런, 어린 녀석이 소꿉놀이를 하며 술상을 차리고 있다는 충격을 맛봐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대로 따라하더군요.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말려도 보이는 그대로를 따라합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히 큰 것이고, 그러기에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새도 없이 그대로 따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우리도 어릴 적 우리 부모가 최고라 생각하며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경험이 있을 텐데요. 나는 누워서 티비를 볼 테니 너는 앉아서 보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어요.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붓글씨를 쓰게 하려면 떡이라도 썰어야겠지요.
아마, 이 아이는 제 행동과 생각의 여러 부분을 따라하게 되겠지요. 그것은 저에게 최초의 충격이었습니다. 이모저모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을 둘러보았지요. 이대로 살게 된다면 좋은가. 아이가 이것을 따라해도 좋은가. 누워서 티비보는 것은 그렇다치고, 그리 간단한 건 넘어간다 쳐도 이건 아니더군요. 나와 똑같은 존재로 크는 것은 좀 무섭겠던데요. 내가 느낀 좌절에서 온 비뚤어진 생각을 그대로 하고, 행동을 그대로 하는 인생이라. 생각만해도 무섭더군요. 어느 날 많이 자란 아이가 “그래 세상은 다 그런거잖아.” 라고 말을 한다면. 그래도 따라하는 아이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가장 많이 영향을 주는 이를 따라하겠다는데. 이 어린놈이 벌써부터 따라하는데 지금부터 하지마라 한다고 그리 되지 않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인생을 답습하게끔 놔둘 수도 없었지요. 제 인생에는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이 되고 처음으로 받았던 과제는 ‘유언장 써오기’였습니다. 뭐, 쓰다보니 눈물이 나더니, 읽다보니 폭풍 눈물이 나더군요. 혼자 키워온 아이, 그 아이를 두고 간다는 생각이 눈물이 나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당시에 썼던 유언장의 일부분을 옮겨봅니다.
“커가면서 많은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단다. 주저 앉고 싶은 순간도 닥칠 수 있단다. 하기 싫은 일들만 가득 쌓여서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닥칠 수도 있단다. 그래도 살아가는 거란다. 이왕이면 웃으며 살아가는 거란다. 최악이라 보이는 순간에도 언제나 신은 네 자리를 비워 둘 거란다.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줄 거란다. 네가 세상을 향해 웃는다면 세상도 너를 향해 웃어 줄거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때로는 움츠러드는 순간이 있겠지만 그 시선들이 너를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조금 늦는다고 걱정하지도 말아라. 너는 언젠가 어려워 보이는 계산 문제를 척척 풀어낼 수 있는 때가 올 것이고, 그 때가 하루나 이틀 쯤 늦게 온다고 해도 그건 문제될 것이 없는 거란다. 오늘 내일 네가 원하는 것이 오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든 네 앞에 오게 될 것이니까. 너는 그렇게 운명지어진 아이이니까. 네가 할 일은 그저 네 모습을 사랑하고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서 걸어 나가는 것 뿐이란다. 누가 뭐래도 넌 네 모습 자체로 그저 사랑스러운 엄마의 딸이니까. 네가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에 너에게 해주던 말이 생각나는 구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너를 보게 된다면 너를 안아보게 된다면, 너를 알게 된다면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거야.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에 상처받지 않고 네가 가진 것들을 감사하며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항상 기원할게. 부는 바람에 내리는 비에 잠시라도 나를 느껴줄 수 있다면 고맙겠구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 네가 어떤 모습이던 너를 사랑한다.“
이 길고 장황한 내용속에서 아이에게 단 한가지 남기고 싶었던 말은 있는 그대로 너는 사랑스러운 아이이니, 자신을 사랑하고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걷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싶었지요.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너는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것. 아이가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느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저부터 그리 살아야 했지요.
아마 저는 매 순간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 사랑에 목이 말랐던 것은 아마 저였겠지요.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지에 대한 이유도 저는 따져묻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모두가 어쩔 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탓하고 살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누구의 아픔이 큰지 무게를 재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원래 저는 아픔이란 무게를 잴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어느 날 친구를 잃은 슬픔과 어린 소녀가 곰돌이 인형을 잃은 슬픔은 같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너무 비유가 그랬나요? 하지만 어린 소녀가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인형이라면 그 인형을 잃은 것이 그만한 슬픔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가는 오로지 자신만이 결정하는 일이잖아요. 누군가에게 별 것 아니었던 일들이 어떤 이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을 안겨 주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일들이 어떤 이에게는 아픔이 되어 마음을 찌릅니다. 저는 여기서 누군가의 아픔을 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희망을 노래하고 싶을 뿐입니다. 희망과 사랑을 말이지요.
왜 하필 나에대한 사랑을 노래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에도 그리 할 말은 없습니다. 쉽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 제가 얻고 싶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었고, 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작은 성과에 스스로 기뻐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넘어져도 희망을 안고 일어나기를 바랬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칭찬해 주지 않아도, 넘어진 나를 보고 비웃거나 비난을 퍼붓더라도 저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제 자신과 힘차게 걸어나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보아도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눈부신 태양과 각종 자연물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들도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은 제 자신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아니 제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저 혼자 어둠속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눈부신 세상 안에서 저 역시 눈부셔지고 싶었습니다. 더는 역광 사진을 찍은 듯한 모습을 가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나 없이도 너무 잘 돌아가는 세상이 얄밉도록 싫어요.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너 같은 건 없어도 된다는 말을 하는 듯이 무심한 세상이 싫어요. 더는 원래 그런거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거예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받아들이지 않을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인걸요. 저의 세상인걸요. 그런 존재가 되기에 저는 너무 소중한 걸요. 세상이 나에게 말하듯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어느 순간에 저까지 믿어버렸나 봅니다. 저는 저에게 말합니다. “난 여기 있어.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나지. 그래 넌 소중해. 난 사랑러워.”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저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저는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많은 시간 동안 저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이해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자신이 가장 먼저 나에게 배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주변의 말을 들어 공부나 열심히 하고 아무나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전희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비록 실패와 실수로 얼룩진 것이라도 아직은 있다고 믿습니다. 행복을 노래하는 파랑새는 아마 가장 까가운 곳에 있을지로 모릅니다. 저는 그것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이 기록은 저를 위로하던 것들입니다. 그 안에 당신 역시 위로와 희망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두가지냐면요. 유언장을 중심으로 앞 뒤로 두개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 같아요.
아이 이야기가 나오다가 -> 변화가 필요해서 -> 변경연에 왔는데 -> 유언장을 쓰다보니 ->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더라. 라는 구조가. 썩 매끄러워 보이지는 않아서요.
저는 앞이나 뒤나 둘 중 하나를 더 중심에 세워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1.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자들에게 쓰는 편지라면,
본인한테 쓴다고 생각하고 써 보면 어떨까요.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의 대표주자가 루미님이니까요. ^^;
그러면, 앞쪽의 사연보다는 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계기의 순간을 돌아보는 글이 나올 것 같아요.
2.
혹은 앞 부분을 살리고,,,
아이가 꼭 닮았으면 하는 내 인생의 한 부분, 한 순간을 꺼내 놓는다.
라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는거죠.
변화가 필요했다가 아니라. 루미님은 이미 변했고. 아이에게 엄마를 닮으렴! 이라는 관점에서 쓰는거죠.
죄송스럽게도 그동안 글을 열심히 읽지 못해서... 이런 순간 후회스럽네요.
열심히 댓글을 달고 싶은데 소스가 별로 없으니. ㅠ
오프수업 기록을 봐도 루미님에 대한 이야기는 없더라구요.
일단 서문만 살펴본 이야기이니. 그냥 참고만 해주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