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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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가까워온다. 아직도 팔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결린다. 김장 담그기가 이렇게 고될 줄이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김장 담그기는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날카로운 채칼로 조심조심 무를 썰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쪽파를 다듬고 고무 다라이 가득 찬 시뻘건 양념을 두 손으로 섞는 일은 막노동이나 다름 없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양념을 배추 속살에 바르는 일은 단순노동이지만 힘겨웠다. 직장에 다닐 때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얌체같이 김치만 얻어 먹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전업주부가 김장과 같은 집안의 큰 일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다 이 나이 되도록 김장 한 번 제대로 담근 적이 없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진다. 눈을 비비며 거실에 나와보니 정신이 어지럽다. 오후 6시쯤 이었나? 잠깐 눈을 붙이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남편에게 거실 청소를 부탁했었다. 남자들은 왜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물건 정리를 한 후 물청소를 해야 하는데 남편은 물건들은 그대로 둔 채 걸레만 이리저리 왔다갔다한 모양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내일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다음에 다시 부려(?) 먹을 수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이렇게 놔둘 순 없다. 내일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연구원 오프라인 수업. 내일 오전 9시부터 우리집 거실이 교실이 될 터였다.
팔을 걷어 부치고 거실 테이블과 식탁을 정리했다. 책은 책꽂이에, 쌓여있는 신문들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손톱깎이는 서랍에, 아이들이 벗어 놓은 양말은 세탁기에, 컵은 싱크대에. 물건들은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잠시 후 더욱 넓어 보이는 거실을 바라보며 미소가 지어진다. 말끔해진 거실을 둘러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리는데 욕실이 마음에 걸린다. 욕실청소를 언제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세면대의 물때와 변기에 붙어있는 누런 얼룩들이 눈에 들어온다. 큰 집으로 이사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욕실 청소다. 두 개나 되는 욕실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사 도우미를 부르고 싶은 유혹에 끝없이 시달리지만 남편 월급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하다. 그냥 잘까, 하고 잘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 간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 욕실청소를 진정 해야 한단 말인가? 팔이 다시 콕콕 쑤셔온다. 그런데 정신은 명료해진다. 잘 것이냐, 할 것이냐? ‘박박, 싹싹, 쓱쓱’ 결국 고무장갑을 끼고 두 손에 세제와 청소 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욕실 거울에 비친다. 시작한 이상 대충할 수는 없다. 세면대, 변기, 욕조에 이어 샤워부스, 욕실 바닥까지 세제를 뿌려 박박 닦고 물을 뿌려 헹군다. 얼룩 진 거울은 깨끗한 걸레로 싹싹 닦는다. 가슴 속까지 후련하다. 상쾌한 냄새를 맡으며 욕실 청소 마감하고 나니 시간은 이미 2시가 다 되어 온다.
나는 왜 자정 넘어 욕실 청소를 하는 여자가 되었을까? 사부님을 비롯한 동기 누구도 거실이 지저분하다거나 욕실에 얼룩이 있다고 지적할 사람은 없다. 아니 사실 그들은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밤에 그 일을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나는 그 일을 미루어 놓고 잘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인생을 힘들게 사는 것일까? 내 신세를 스스로 볶아대는 내가 가끔은 한심하다. 내가 쉬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완벽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슨 일이든 대충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일에 있어서는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왜 저러나 싶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완벽주의의 근원은 무엇일까? 언젠가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엄마가 서울에서 못다한 공부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혼자 청주집에서 자취 생활을 하셨다. 엄마는 열 일곱 살 소녀처럼 여고시절을 한껏 즐겼지만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추레해지는 홀아비 같았다. 주말마다 집에 내려가 청소며 빨래며 아버지 먹을 것을 마련해 놓느라 엄마도 고달팠지만 그 상황을 묵묵히 견디어야 했던 아버지도 쉽지 않았다. 그 시절 집에 내려가면 집은 마치 작은 반찬공장 같았다. 아버지는 소일 삼아 매실 장아찌를 만들고 오미자 술을 담갔다. 호박을 썰어 말리고 무말랭이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려오는 자식들에게 그것들을 들려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사셨다. 어느 가을 날, 집에 내려간 주말 오후였다. 거실에 들어서니 햇살이 가득하다. 거기에 아버지의 작품이 있었다. 하얀 광목 천 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 맞추어 일렬로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는 붉은 고추들! 잠시 후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1번부터 마지막 고추까지 차례로 몸을 뒤집어 주셨다. 고추들은 마치 빨간 모자를 쓰고 정렬한 영국 근위병 부대 같았다. 군기가 딱 들어가 있고 각이 딱 잡혀 있다. 줄 맞추어 얌전히 누운 고추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그것이 아버지의 고추 말리는 방식이었다.
아침을 먹으며 조간신문을 훑어보는데 ‘엄마의 눈빛 가지고 돌아온 女帝’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내달 9년 만에 독주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한때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고 불릴 만큼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여제가 이제는 삶을 관조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계기는 부상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왔다. 2005년 9월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내한 때, 정경화는 오른쪽 검지를 다쳤다. 무통 주사를 맞고 손가락이 퉁퉁 부은 상태로 연주를 강행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로부터 9년 동안 그는 바이올린을 잡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언니 정명소, 친구 겸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레이번, 그리고 그녀의 우상인 어머니를 잃었다. 정경화는 그간의 공백을 ‘죽음과 방황, 인내로 점철된 시간’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그는 어머니의 유골을 묏자리가 있는 뉴욕 퀸스까지 품에 안고 가면서 깨달았다. ‘일생을 잡고 살아온 완벽주의를 이제는 벗어버릴 때가 되었다.’ 그녀는 앞으로는 기교는 조금 무뎌졌을지라도 몸이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일본의 정원사는 균형미를 이룬 정원의 한쪽
구석에 민들레 몇 송이를 심는다.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섬세하게 짠 양탄자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 놓는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 이른다. 또 인디언들은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 때 살짝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었다고 한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불렀다. 영혼을 지닌 것은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가 없다. 당신이 만들어 가는 삶의 천에 '페르시아의 흠'과 같은 올이 하나 들어갈 수 있다면, 당신이 꿈꾸었던 삶의 천보다
더 멋진 천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기도』 중에서
나는 항상 완벽한 삶을 꿈꾸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유능한 직업인, 현명한 아내, 자상한 엄마, 살가운 며느리, 믿음직한 딸이고 싶었다. 어디든 작은 흠이라도 있으면 거슬렸다.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한 대로 진행되어야 마음이 편했다. 대충 하는 사람은 못 마땅했다. 모든 일에서 탁월함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삶이 고달팠다.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쉬웠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겠다. 삶에는 흠도 필요하다. 삶에서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완벽함 보다는 소중한 것들이다. 내가 완벽했던 나의 커리어 계획에 과감히 쉼표를 찍고 이렇게 멈추어 서있는 것도 소중한 것들을 돌보고 가꾸기 위함이다. 잠시 멈춤이 긴 인생에 있어서 뒷걸음질 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내고 있는 지금의 안식년은 아마도 내 경력에 있어서는 ‘공백’ 또는 ‘흠’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페르시아의 흠이자 영혼의 구슬이 될 것이다. 나는 한껏 인간적이고 여유로워진 사람이 될 것이다. (사실 외모는 최근 들어 더욱 급격히 여유로워지고 있다.) 그리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가꾸고 일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완벽함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삶에는 시련도 필요하다. 나 역시 시련을 겪고 나니 ‘이 시련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과연 뭐였나’ 생각하게 되었다. 시련을 겪으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었다. 시련을 겪고 나서야 삶의 지혜를 발견하는 존재가 인간인가 보다. 정경화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부상으로 인해서 평생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완벽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정경화가 1987년 발표한 앨범 『콘
아모레』를 들으며
차 한 잔을 마신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흘러나온다. 나는 생각한다. ‘내 나이 내년이면 마흔. 그래도 나는 예순을 넘긴 정경화보다 삶의
지혜를 20년이나 먼저 깨우쳤다. 그러니 내가 참으로 기특하지
아니하지 아니하지 아니할 수가 없지 않지 않은가?’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하고 웃어본다.

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담 해도 나쁘지 않아요.
그걸 하느라
숙제를 못하거나, 식구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스스로를 한심스러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
요즘..생각해보는데요.
휴식이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라면
사람마다 자신을 돌보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아요.
제대로 쉬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게 우선이겠죠?
ㅎㅎ
참고로 전 '정리' 를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스타일이랍니다!
뭔가에 마음을 빼앗겨 '통제하고 조직'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못내기 시작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너무 각잡힌 생활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마구 널부러뜨려놨더니...
오히려 더 힘들어지더라는... ㅋㅋ
그래도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것도 있어요.
제게 필요한 건 '각 잡힌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각을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그니까 제가 잡아놓은 각을 흩트리는 사람(혹은 상황)은 방해꾼이 아니라 고마운 놀이제공자라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물론 것도 정도껏 할 때의 이야기지만요. ㅎㅎ
언니는 어떤 사람일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