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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3일 11시 44분 등록

찬바람이 휑하게 몰아치는 겨울밤. 이런날은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밤이나 고구마를 까먹으며 뒹구는 게 제격인데 그렇지를 못하니. 이유인즉슨 아파트 재활용품을 버리는 그날이 다시금 돌아왔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번 정해져 있는 요일을 출장이다 뭐다해서 잊어버리다 보면 쌓여져 있는 그것들은 넘치는 산이 된다. 그래서 회식 자리에서 기분 좋게 한잔 걸치며 오늘처럼 새벽녘에 귀가해서도, 술기운인지 맨 정신인지 의식 저 너머 밑바닥에 있는 책임감과 의무감의 짐을 싸들고 집결지로 향한다. 그런데 내가 봐도 웃기다. 산타클로스도 아닌데 양손에 가득 한보따리를 챙기고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새벽녘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신사 한분이 플라스틱, 비닐봉지, 유리병, 종이류 등 각개 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함에 능숙한 솜씨로 물건들을 집어넣고 계신다. 척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듯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하니 낯이 익다. 수거일은 동마다 요일이 각기 다르고 그러다보니 간혹 안면이 마주치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이다. 가재는 개편이라고 했던가. 연배는 달라도 같은 입장이다 보니 아는 시늉을 한다.

“안녕하세요.”

“아예, 안녕하세요.”

동병상련의 입장을 만나서인지 그분은 멋쩍게 인사를 건네며 답답한지 담배 하나를 피워 문다.

“매주 이렇게 하는 게 나는 미치겠어요.”

신세한탄을 하듯 그분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살짝궁 털어 놓는다. 18년 결혼생활을 하였고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에만 10년째 거주 하고 있는데 때때마다 자신이 도맡아 재활용품 소임을 담당하고 있단다. 처음에는 서로가 맞벌이 생활을 하는 통에 남편인 자신이 가사를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시작 하였는데, 아글씨 이것이 이날 이때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단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분담해서 하시죠.”

나의 너무나 당연한 말에 그분은 혀를 끌끌 찬다.

“내가 왜 시도를 해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와이프를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어놓아서인지 내말에 전혀 반응이 없어요. 막말로 평소에 운동도 하질 않아 살만 뒤룩뒤룩 쪄가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 좋아 보여, 다이어트도 되니 밑에 층까지 다녀와라 이야기를 해도 콧방귀뿐이니. 다시 태어나면 내가 저런 여자랑 결혼을 하나 보나 라고 뒤늦은 후회를 해도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니. 너무하다 너무해. 앞으로도 계속 내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으스름한 새벽녘 건장한 남성 두 사람이 궁상맞게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여자들의 수다처럼 신세한탄을 나누고 있으니 서글픔이 하늘의 별로 맺힌다.

 

예전 여자 분들은 남자 3명만 잘 만나면 인생 팔자를 편다고 곧잘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첫 번째 남자는 아버지인데 우리의 어머니 세대 때 이분의 존재는 말 그대로 권위를 넘어선 하늘의 신분이었다. 당신의 엄명에 말 한마디 못하다가 대꾸라도 할려치면 아녀자가 어디 눈을 부라리며 맞장을 뜨느냐는 불호령이 쏟아지는 시대였고 독재의 철권을 휘둘렀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시어머니까지 합세를 해서 협공 공세를 펴면 아무도 내편이 되어주지 않음에 화병이 쌓여만 갔었다. 그래서 그때 요긴하게 활용되는 동물이 있었으니 바로 강아지였다. 지금이야 동물 애호가들에게 맞아 죽을 이야기지만 집을 지키는 용도 외에, 복날이 되면 심심찮게 인간을 위해 한 몸 희생 하였고 때때로 화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두 번째 남자는 남편이다.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삶으로 길들여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자신의 동반자를 선택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였기에, 어떤 지아비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바뀌어 진다고 생각 하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꿈이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항상 넘버원으로 꼽혔던 것 중에 하나가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였다. 물론 이런 사고는 구시대의 산물로 잊혀져가지만 그래도 정도의 차이를 떠나 지금도 어느 정도는 유지가 되고 있는 듯하다. 파트너를 선택 시 남성은 여성의 외모에 점수를 주는 반면, 여성은 태도나 성품보다는 아직도 남성의 외적인 능력을 일 순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의 모임에서는 남편이 어떤 일을 하며 경제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라는 화두가 곧잘 대두되곤 한다. 남편의 맨 파워가 자신과 동격의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임에 다녀온 아내들은 애꿎은 남편에게 화풀이를 대신 쏟아 붇기도 한다.

“자기는 학교 다닐 때 뭐했어. 놀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타고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 아냐.”

“모임이라고 때 빼고 광내서 나가더니만 왜 들어와서 야단이야.”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쀼루퉁하게 한마디를 거들지만 본전도 못 건진다.

“글쎄 말이 되냐고. 순자 그 지지배는 고등학교 같은 반일 때 뒤에서만 놀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남자 잘 만나서 강남 38평 아파트에 몇 백 만 원짜리 이태리 소파에다……. 우린 언제 그렇게 살 거야.”

그러다 막내가 출출하던 차 야밤에 간식 달라고 눈치코치 없이 끼어들면 그날 밤 아이는 거의 죽음이 된다.

결혼생활에서 이처럼 남편이라는 존재감은 하늘이라는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은 동반자, 파트너, 반쪽이라는 상징성으로 내려오고 있지만 어떤 경우엔 다음 사례와 같은 불구대천(不俱戴天) 악연의 결과로 귀착되는 경우도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해 봄이었는데 첫인상은 무엇보다 나의 체격보다 조금은더 풍만(?)해 보이는 몸집이었다. 거기에 교육 중간에 쏟아지는 질문들이 일에 대한 열정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두 번째 만남은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소속된 거래처에서였다. 그녀는 금융계통에 종사한 경력이 있었던 탓인지 똑같은 주부 영업사원 이면서도, 남들보다 동물적인 감각이나 센스가 있어 보였다. 그만큼 목표에 대한 의식과 적응력도 남들보다 빨랐다.

간간이 통화 및 문자로써 그녀와 소식을 전해 받는 가운데 12월 어느 날. 오랜만에 그녀가 소속된 거래처를 찾았다. 아침 조회를 마친 후 그녀와 같은 팀장들(중간 관리자급)만을 호출하여 오후 교육을 시작 하였다. 시점이 연말도 다가오고 해서 나는 이야기의 주제 방향성을 ‘한해 영업을 하면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일 & 새해의 덕담’으로 선정 하였다. 발표 전 각자가 해야 할 이야기들을 먼저 노트에 적어보게 하고, 개인별 발표가 끝나고 나면 서로에 대한 공감과 코멘트가 어우러지게 유도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내용을 적어나가는 가운데에도 주제가 어려웠는지 그녀는 내내 고민을 하고 있다. 앞선 분들의 발표가 이어지면서 이윽고 그녀의 순서가 되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싫어요. 이야기 안하면 안 될까요?”

“팀장님. 많이 힘든 게 있었나 봐요. “

주저하던 그녀는 계속 망설이더니 이 자리에서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외부로의 발설을 금한다는 단서를 달고 어렵게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올해 00행사갈 때 나는 사실 자살 하려는 마음을 품고 갔었어요.”

이한마디에 갑자기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고 나도 당황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그러면서 그녀는 겹겹이 쌓아 두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있는 그대로 쏟아 내었다.

“나는 얼마 전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직접 목격 했어요. (뜸을 들이면서) 그러면서도 나는 그이에게 어떠한 말도 하질 못했어요. 왜냐고요? 내가 예전에 허리를 다쳐 디스크 수술한 것 아시죠. 그런데 사실은 다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그렇게 된 것 이예요. 그렇기에 남편이 바람피우는 광경을 보고 마음은 무너져 갔지만, 여자구실도 못하는 나이기에 오죽하면 저런 짓을 할까라는 애처로운 마음이 오히려 들더군요.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딸이 나보고 이혼을 하라고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지금은 이혼할 때가 아니에요, 부장 승진이 되고 경제적 안정이 되고나면 모를까. 지금은 정말 하루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남편이지만 월급을 갖다 주기에 어쩔 수 없어요. “

 

외적으로 보기에 항시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던 그녀였기에 이런 어두운 과거의 내용들을 듣자, 나 자신을 비롯해 함께 했던 이들에게는 너무나 뜻밖으로 다가와졌다. 더구나 남자인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속 깊은 이야기들을 하다니. 라뽀(rapport) -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심리적 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적 용어 - 가 그만큼 형성 되어졌기에 가능해서 이었을까? 지금도 이따금 그녀를 떠올리노라면 당사자가 아님에도 왠지 모를 빚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같은 남자의 한사람으로 부끄럽기에. 

 

 

세 번째 남자는 아들이다. 이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톱클래스가 아닐까싶다. 가문의 대를 핏줄로 이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와 부모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적 의미가 크기에 말이다. 그러다보니 왕따를 피해 비싼 대안학교를 전전하다 급기야 온가족이 해외 이민까지도 가게 되고, 외국 유학 보낸 아들의 교육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기러기 아빠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아들을 낳지 못해 온갖 궁핍과 설움을 오랜 시간 받았고, 귀하디귀한 아들 하나 낳기 위한 별별 비책까지 등장하기도 하였으니.

 

 

하지만 어찌 보면 남성이 득세 하였던 이 같은 좋은 시절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이젠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해로 전락이 되고 있다. 아들을 그토록 원했던 부모 그들에게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의 볼멘소리들이 틔어 나오고, 이젠 딸을 더원하는 경향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하는 친구 같은 딸과 웬수 같은 아들이라는 용어가 대비되어 회자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TV 뉴스 시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남자, 여자의 특성을 고려한 수업방식을 아들 가진 학부모들이 요구한다는 내용이. 이유인즉슨 유치원 여자 아이들은 선생님이 교육할 때 잘 경청을 하는 반면, 남자 아이들은 딴 짓과 장난만 치고 체육 시간만 활발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과 탓인지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이 수학을 제외한 전 과목에서 남자 아이들보다 평균적으로 우수하다는 기사는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러다보니 미래 최고의 수익 창출이라는 아들에 대한 투자가 재검토되는 작금에 이르렀고, 전략적 사고의 전환을 통해 대신 딸로써의 성공을 바라는 대안적 회귀가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에다 최근 베이비부머(baby-boomer) 세대 은퇴 이후의 쓰디쓴 삶이 집중 조명되고 있는데, 같은 남성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현실이 또 하나 기다리고 있으니.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국민인식조사 결과 평균수명이 길어질수록 우리나라 여성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은, 늙은 남편을 돌보는 부담이 커지면서 부부 간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이가 들어갈수록 반평생을 함께 해온 애틋한 사랑의 감정보다는 이젠 또 하나의 짐처럼 해석된다는 의미인데 앞으로 우리들은 어떡할거나. 이러다 정말로 쓴물 단물 다빨아 먹고 버려지는 재활용 쓰레기의 처지가 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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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08:35:45 *.163.164.179

형님, 강훈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설날 본가, 처가 다녀오느라 정신없어서 칼럼 올리는 것이

부담되었는데...형님은 이번주도 어김없이 이렇게 올리셨군요.

존(尊)!!!

 

형님의 습관을 보면서 느끼면서 좋은 가르침을 얻습니다.

올해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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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09:53:41 *.94.245.164

새하얀 눈이 온세상 가득 환한 빛으로 내려왔다.

강훈. 추운데 건강 챙기고 미끄러운길 조심히 잘다니고.

당신의 넉넉한 미소가 그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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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19:43:06 *.143.156.74

오빠(윽, 이렇게 부르기 넘 힘들어) 올해는 더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빌어요.

가끔 새벽에 지방가는 기차타러 간다는 오빠의 카톡 메시지를 보면 마음이 짠 하네요.

이제 더 이상 청춘아니니 삼중 보온 내복 꼭 챙겨입고 다니셔요.

항상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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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9 16:19:32 *.130.104.63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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