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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9일 10시 05분 등록

<꼭지26. 어느 연휴.>

하나씩 늘어나는 숫자의 나이와 함께 어김없이 찾아오는 설날 연휴다. 주말과 함께 시작되는 연휴 이틀 전, 일을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큰일났어!!”

??”

이번 설 연휴에 삼촌네 가족이 온데. 어쩌냐? 이번에 아빠 제사는 딸기랑 나물 몇 개만 놓고 간단하게 지내고, 영화보러 가려고 했는데. 니네 삼촌이 오면, 음식 많이 해야하잖아. 아침에 몇 시에 오면 되냐고 묻는데, 몇 시에 오라고 할까?”

그래? 어쩔 수 없지 머. 9시나 10시쯤 오시라고 해.”

니가 전화 해. 너랑 얘기 해 보고 니가 연락할 거라고 했어.”

 

전화를 끊고,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설날 당일에 9시까지 오시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내 머리 속은 하얗다. 제사상에 필요한 음식보다,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지저분한 집이 문제다. 정리 유전자가 100%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엄마는 평소에 쓰는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집 부엌 바닥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항상 널려져 있다. 그리고 안방은 지금까지 입었던 옷들이 널부러져 있다. 집안을 생각하니 머리가 새하얘진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하나???

 

토요일 아침. 9시쯤 눈을 떴다. 더 누워 있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부엌을 치우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누가 갖다 버린 책장 두개를 주워 와서, 다행히 수납할 공간이 생겼다. 버릴 것들은 바닥으로 그리고 안 쓰는 물건들은 책장 아래쪽과 맨 위쪽으로, 자주 쓰는 것들은 눈 높이에 맞추어서 정리를 했다. 씽크대에 있는 것들도, 냉장고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들 중에서도 사용한지 1년이 넘은 것들을 모조리 갖다 버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버릴 물건들이 현관 문 앞에 산처럼 쌓이고, 양 손 가득 들고 두 번을 버리고 오니, 현관 앞에 쌓인 것들이 사라졌다. 10평 남짓한 집에 있는 작은 부엌을 정리하는 데 장장 7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안방만 치우는데 또 다시 5시간. 그렇게 설날에 손님을 맞이 하기 위해 12시간 집을 치웠더니, 다행히 다른 이들 사는 집 정도로 깨끗하게 되었다.

 

설날 새벽까지 엄마와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설날 아침에 찾아 온 삼촌 식구들과 아버지 제사를 지낸다. 그 동안 서로 못 나눈 이야기를 반찬 삼아, 아침 식사를 하고, 삼촌네 식구들과 엄마는 할아버지 제사 대신 뭐라도 하기 위해 종로에 있는 조계사로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남은 시간, 한 시간 남은 숙제 마감시간을 지키기 위해 폭풍처럼 숙제를 하고, 12시가 조금 넘어서 겨우 과제를 올리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이제 앉아서 책 좀 볼까?’하고 책을 꺼내 보고 있는데, 엄마가 벌써 돌아왔다.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오늘도 영화를 보는 시간 중에 절반은 주무시는 엄마. 계속 깨우다가, 결국에 포기하고 나 혼자 영화를 본다. 얼마 전, 개봉한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봤다.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 했다는데, 보면서 가슴이 아프다. 특히, 배우 안성기가 독방에서 3인실로 옮긴 후, 함께 있던 재소자에게 온갖 못된 짓을 당하고, 가족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도 함께 울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엄마는 잠에서 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 왈,

내가 30분 정도 잤나?”

아니, 절반 이상은 주무셨거든요?”

그래도, 엄마는 영화 내용 다 알아.”

 

못말리는 엄마다. 정말!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에도 계속 그 장면이 생각이 난다. 얼마 전, 팟캐스트에서 새롭게 시작한 통합진보당의 유시민과 노회찬의 저공비행 방송을 듣는데, 과거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나라의 각종 부정부패와, 불법적으로 얻은 권력으로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속에서 끓어 오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을 평생 모르고 살아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편으로는 등골이 오싹하다.

 

연휴 마지막 날, 친구네 애완묘인 뽀레의 밥을 주러 1시간 거리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갔다. 이틀동안 굶어서인지,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엄청나게 날카로운 뽀레가 예리한 발톱을 마구 세워 나를 위협한다. 온갖 신경질을 다 내고, 계속 나를 긁고, 물려고 애를 쓴다. 손은 긁혀서 피가 나고, 겨우 밥을 주고 난 뒤에 나는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길. 잠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한다. 얼마 전에 이사를 간 친구한테 놀러를 갈까. 아니면 그냥 집 앞에 있는 카페에 갈까? 친구에게 새해인사를 할 겸 문자를 보냈다. 다음에 집으로 놀러 오라는 답장에 친구에게 놀러 갈 계획은 포기. 그냥 집 앞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데이트를 하는 듯한 커플들이 몇몇 보인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든다. 황금 같은 연휴에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왠지 오늘 같은 기분에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 현실을 직시하자. 어쨌든, 지금은 내 곁에 그 누구도 없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포기가 빠른 내 성격이 감사하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니 말이다. 그리고 동네 늘 가던 카페에 도착. 커피를 한잔 시키고, 노트북을 켠다. 외면하고 있던 동기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단다. 그리고 또 다시 나의 이런 일상을 기록한다. 어느 새 나의 마음에는 평온함이 찾아오고, 이렇게 연휴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간다.

 

꼭지27.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인간관계에 대한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싶은 것일까? 지난 연말, 파주에 있는 북카페에 바람을 쐬러 가는 길에 갑작스레 들려온 친구의 비보로 멍하니 있는 나의 놀란 가슴을 광화문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핫쵸코 한잔을 사 주며 달래주었던 친구가 있다. 카페에 있는 3시간 같이 길게만 느껴졌던 30여분의 시간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내 곁을 지켜 주었고, 안양에 있는 장례식장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갔다 와서도 괜찮냐고, 친구 좋은데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겠다고 따뜻한 문자를 보내주었던 친구다. 장례식이 끝나고, 친구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었다. 갑작스레 생긴 일 덕분에 친구의 휴가를 망쳐버려서 미안하기도 하고, 정신이 없었던 나를 잘 챙겨주었던 것이 고맙기도 해서 커피든 밥이든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메신저에 항상 접속 해 있던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내고 계신가?? 요즘 많이 바빠?”

, 프로젝트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 조금 정신이 없네.”

그렇구나. 내가 문자 두 번이나 보냈는데, 다 씹었어.ㅜㅜ.”

, 그랬나?? 카톡으로 보냈구나? 일할 때는 귀찮아서 알람을 꺼 두거든. 보낸지 한참 됐구나? 답장 없어서 마음 상했구만??”

그래, 내가 좀 소심하잖아.ㅋㅋ 아니, 그냥 차나 한잔 하자고. 밥을 먹어도 좋고.”

? 너 자주 가는 카페에서 차 한잔 할까? 어디서 볼까? 서울대입구? 숭실대? 어디 맛있는 거 있어??”

뭐 상관없어. 차든 밥이든. 차 마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굴 보려고 하는 거니까.”

그래, 그러면 내일 저녁에 보자.”

 

다음 날 저녁, 약속 시간 7시보다 30여분 늦은 시간에 친구와 만났다. 친구의 차를 타자마자 얼굴을 봤는데, 무언가 많이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다. 회사 프로젝트 기간을 한달 남겨둔 상황에서 소위 의 입장에 있는 회사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덕분에 우리의 만남은 시작부터 뭔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친구를 만나기 전, 카페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내 기분 역시 갑자기 다운되어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라서 친구의 좋지 않은 감정에 공감을 해 주고 기운을 북돋아 줄 여력이 내게도 없었다. 주말에 산 옷의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바꿔야 한다며 우리는 신도림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별 다른 말 없이 라디오를 들었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시간이나 걸려서 가게 되었다. 매장에 도착해서 친구는 바쁘게 아래 위층을 뛰어다녔다. 옷을 바꾸고 나서, 친구는 지난 주에 문을 닫아 못 먹었다는 타코를 먹자며, 지하 푸드 코트로 나를 데리고 갔다. 가는 길에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또 다시 친구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메일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 같은 통화를 끊고, 친구는 이메일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내기까지 꽤 긴 것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먹는 동안 마주 앉아 있는 동안에도 계속 대화는 없었다. 친구는 계속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딱히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힘들다. 함께였지만, 각자의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차로 향하는 길.

근데, 오늘 왜 보자고 한거야? 뭐 할 말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 그냥 차나 한잔 하자고 했던 거지 머.”

그럼 차 마시러 갈까?”

“(버럭 화를 내며) 됐거든!!!”

 

사실 친구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차든 밥이든 고마운 마음에 사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에너지가 없었던 상황에서, 더 에너지가 없는 친구 덕분에 내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고, 친구와 함께 있는 그 시간동안 나는 같이 있는 둥 마는 둥하면서 계속 핸드폰이나 보고 있는 친구의 태도에 기분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평소 같았으면, 그냥 둘다 상태가 안 좋으니, 집에 가자고 좋게 말했을 상황인데도, 버럭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는 심지어 마을버스를 타는 정류장을 지나갈 것 같아서,

, 마을버스 지나가네. 나 그냥 마을 버스 타고 갈게.” 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친구가 버럭 화를 낸다.

, 내가 집까지 안 데려다 주겠냐?”

 

그렇게 또 둘 다 말 없이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고, 집으로 향한다. 어색한 침묵과 이 상황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온 몸에 긴장감을 유지한 채 말이다. 집 앞에 도착해서, 내리는데 친구가 말한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다음에는 상태가 좀 좋을 때 보자. 근데, 아마 프로젝트가 끝나고 난 뒤일거야.”

그래, 데려다줘서 고마워. 회사 일 마무리 잘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렵다. 얼른 떠나야겠다. 아무도 만날수 없는. 그저 스치는 인연들만 있는 곳으로. 그러면 편해지겠지. 지친다. 관계들로 인해. 차라리 고독을 택하는 게 마음은 훨씬 편할 것 같다. 진심.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댓글을 남겼다.

너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거야~~~”

내 말이~~~”

이유가 있는데 본인이 거부하는 이유가 아닐지.”

그저 토닥토닥…”

 

그리고 나는 댓글을 남겼다.

선배.. 이유라.. 그냥. 어느 순간 지금까지 내가 관계를 맺어온 방법들이 다 잘못된 것 같은.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인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사람들을 가리게 되는. 이게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람 자체가 피곤하다기보다 어떤 상황들이 피곤한 듯…”

여기에 선배는 또 다시 내게 말을 걸어준다.

. 그럴수록 외면하지 말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리를 꼭 끝내두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안 치워둔 방처럼 짜증나거든. 결국 치우기는 싫고 치울 엄두도 안 나니 이사 가버려야겠다 생각하는 건 안되거든.^^”

 

그렇다. 뭔가 정리가 필요했다. 어제 친구와의 상황부터 생각해 보자. 어제는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것일까? 아니 어제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일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사람들과 만나기가 싫어졌다. 좋지 않은 기분에 사람을 만나면, 어떤 만남이든 그러하듯,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꺼내놓기 마련인데, 그것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하지만, 공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좋지 않은 기분에 사람을 만날 때면 내 머릿속에는 늘 이 생각으로 가득해 진다.

 

이 대화를 어떻게 끝내지. 어떻게 마무리하고 집에 빨리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시작되면,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단답식이 되어 버리거나, 예민하게 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새 대화는 끊겨 버린다.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 버린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예전보다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대한 나의 반응은 사람들과 거리를 만들고, 그 상황이 불편해지고,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 상태에서 만나든 편하게 나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간관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하나둘씩 정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친구와의 만남도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친구를 만나기 전부터 내 기분은 별로였고, 거기다 친구의 감정상태까지 더해져 상황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태리든 호주든 내가 얼른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상황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든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아주 먼 거리가 생길 테니 말이다. 물론, 이것에다가 얼마 전 스스로가 공감해 줄 수 있는 능력까지 결여되었다는 결론까지 내리고 나니, 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상태는 있는 나날이 최악이 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더 큰 문제는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 친구를 만나고 나서, 오늘아침이 되고 내 기분이 다시 좋아지고 나서야, 어제 있었던 상황들, 내가 했던 말들을 다시 곱씹어 보기 시작했으며,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의 감정들과 오늘의 미안함을 어떻게든 전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넘겨야 할까?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다. 이런 감정 상태의 순환이 계속 된다. 그리고 나는 결국 사람들과 다시 거리를 계속 두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주할 자신이 없고, 선배의 말처럼 계속 피하게만 된다. 당분간은 이런 상태가 계속 될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나의 모습들을 마주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인생이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신치가 미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1)     사람은 다른 사람이 겪은 고통을 앎으로서 자기가 인생에 무엇을 기대할까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일이며, 결코 자기가 특별히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큰 것이다. 물론 남의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행을 피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지만 불행에 순응하고, 그것을 참고, 혹은 그것을 이기는 데는 매우 큰 힘이 된다.(<괴테 시와 진실>, p79)

2)     우리들에게 결코 부족한 법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애정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연습할 필요 없이 쉽사리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교적 도덕은 우리들이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점에 있어서 아무리 진보하려고 마음먹어도 전부를 배운다는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괴테 시와 진실> p277)

 

#3. 수정하기

나의 깨달음 자극제들

오늘은 오랫동안 6개월 전을 마지막으로 본 친구와 홍대에서의 급만남이 성사되었다. 얼마 전 이사를 해서 집 근처에 있는 맛있는 카페를 발견했다며 어디 소문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친구를 따라 갔다. 테이블 3개가 전부이고, 카페 전체 크기의 1/3 이상은 로스팅하는 기계로 꽉 찬 공간, 그리고 왠지 모를 예술가의 포스가 느껴지는 사장님의 얼굴을 보니, 커피 맛이 궁금해진다. 커피를 주문하고 친구와 6개월 동안 각자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폭풍 수다를 떤다. 못 본 사이에 친구에게도 참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관계에서의 변화, 신상의 변화, 외모의 변화 등등. 너무 많은 고민들로 살이 쪽 빠져 버린 친구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 남들과 달리 뛰어난 언어 감각을 되살려 다시 영어 강사로 돈벌이를 시작한 친구가 삶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고 하니 마치 내 일처럼 기쁘다. 고민의 내용도, 각자 추구하는 바도, 삶의 모습도 다르지만, 친구도 나도 저항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에 삶이 휩쓸려 가듯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얘기했다.

 

나 있지. 이번 여름에 열흘간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이 나한테 엄청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 같아. 삶에서 얻게 되는 행복을 과거의 부분이나 이루어지길 바라는 미래의 어떤 모습이 아니라, 현재에서 찾기로 했거든. 사실 지금껏 살면서 현재에서 즐거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아. 항상 내 주변에 있었던 소소한 행복들을 너무 놓치면서 살고 있었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항상 내 곁에서 내 결정에 지지를 보내주고 있었던 가족들, 친구들과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얻는 위로와 격려, 쓸만한 노트북과 핸드폰,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몸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발견하게 됐지. 비록 돈은 없지만, 그냥 무엇이든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굳이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목 매야 하거나, 놓기 힘든 화려한 커리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한국에서 돈을 버나, 해외의 어딘가에 나가서 돈을 버나 별로 다를 게 없는 거지. 물론 언어가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 말은 나가기 전에 열심히 배우면 될 것 같아. 이태리 가서 살려고. 내년에? 이태리의 루카라는 마을이 있었어. 옛 로마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작은 마을인데, 너무 평화로워 보이더라. 그냥 그 곳에서 조용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졌어.”

 

한참을 그렇게 떠들고 나서, 헤어지기 전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가 내게 한 마디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서 살겠다고 하면, ‘무슨 해외야. 여기에서나 제대로 잘 살 것이지.’라고 콧방귀 뀌었을텐데 말이다. 너는 왠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태리어도 재미있게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말이지. 다 잘 될 거야. 걱정 마.”

 

너무나 큰 힘이 되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친구는 그렇게 버스를 타고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이탈리아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홍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얘기했다.

 

그래, 난 잘 할거야. 잘 할 수 있어. 스물아홉의 나이. 어쩌면 수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었어야 하는 나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너에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게 거침없이 나아가라고 주는 기회일지도 몰라. 그 기회를 잡자. 멋진 정원? 세상이 너에게 만들어주는 멋진 정원 따위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을지도 몰라. 멋진 정원이란 니가 만들기 나름인걸!!! 파이팅!! 이미나!! 잘 될거야!!!’

 

멀리 보이는 한강도이 곳은 이제 니가 있을 곳이 아니야. 진짜 니가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 어서.’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어느 저녁, 오늘도 어김없이 느즈막히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이것저것 끄적이다보니 어느 새 시계는 오후 6시를 향하고 있다. ‘카톡!’하고 문자가 온다. 동네에 살고 있는 친한 학교 선배가 보낸 문자다.

 

저녁에 약속 있니? 맥주나 한잔 하자고.”

별 약속 없어요!!! 맥주 좋죠!!”

그래, 그러면 서울대입구역에서 보자.”

선배는 지금 어딘데요?”

나 지금 대림.”

, !! 지금 바로 나갈게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화려한(?) 백수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다.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맥주 한잔 생각나면 늘 연락하지만, 항상 선약으로 바빠 얼굴 보기 힘든 선배인데 먼저 연락이 오니 더욱 더 반가운 마음이 크다. 그러다 문득 나는 생각한다.

 

좋아하고, 편안한 사람들만 만나기도 부족한 시간이야.’

 

이제는 여러 가지 고민들도 정리되고, 살고 싶은 삶의 모습들도 그려지니, 나의 마음에도여유가 찾아왔나보다. 그 동안 잠시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여유,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된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내게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을 사람들도 알게 되었는지 그 동안 연락이 뜸했던 이들이 하나 둘 연락을 해 온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가 보다. 멀리 있어도 내게 다시 찾아 온 여유로움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드디어 백만 년 만에 선배를 만났다. 매운 쭈꾸미가 먹고 싶다는 선배와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걸으니, 그날 따라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진다. 쭈꾸미에 맥주 한잔을 하며 얼굴 못 본 시간동안 면접에서 떨어진 이야기, 백수 생활이 체질이라는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등 다양한 주제들로 이야기 꽃을 한참 피웠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터라, 쭈꾸미보다 물을 더 많이 덕에 배가 터질듯한 나와 남기지 않겠다며, 배불러도 열심히 먹은 선배. 둘 다 한껏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선다. 저녁 9. 왠지 아쉬워 한잔 더 하자는 말에 배가 불러 도저히 못 먹겠다는 선배를 차마 붙잡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우리 둘은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아쉬운 마음 역시 전해졌는지 때마침 한강에 맥주 마시러 간 동아리 후배들에게 연락이 와서 한강으로 당장 오라는 유혹의 손길을 덥썩 잡는다. 그리고 집으로 가던 발걸음은 한강으로 돌린다.

내 삶은 늘 이런 식이다. 그 때 그 때, 큰 선택이건 작은 선택이건 그저 마음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오늘 따라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여의나루역에 내리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나를 맞이 한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 왔나 보다. 그래서인지 여의나루역 앞 한강변은 그 바람을 맞이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어렵게 사람들 틈 속에 있던 후배들을 만났다. 못 본 사이에 각자가 있었던 얘기와 어쩌다 시작하게 된 각자의 고등학교 이야기에 웃음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 중 한 명은소위 지방 명문고에서 있었던 고등학교 생활을 이야기하는데, ‘뭐야~~~ 고등학교 생활 왜 그렇게 재미없게 한 거야??’라며 핀잔을 준다. 그리고는 누가 더 놀았나?’ 대회가 열린 것마냥 하나 둘씩 고등학교 생활이 담긴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나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때 첫사랑과의 기억을 꺼내 놓으며, 잠시나마 행복했던 지난 날을 떠올려 본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한강대교를 밝히던 불빛들도 하나 둘 꺼지기 시작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 버렸다. 다음 날,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는 후배 하나는 눈이 절반쯤 감겨서 졸음을 애써 이겨내고 있다. 지하철역 앞에서 후배들을 한번씩 안아주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그 동안 돈이 없어서 후배들 만나기가 조금 꺼려졌기에 후배들과의 이런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인지 모른다.

오래간만에 만난 후배들과 이탈리아 여행에서 있었던 추억들을 나누고, 이탈리아에 가서 살고 싶다는 계획을 이야기 했을 때, 후배들의 반응이 내게는 또 다른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 왔다.

 

언니는 정말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요!!!’

, 그래? 내가 그랬나?’

그냥, 항상 그렇게 사는 것 같아서 되게 부러워요.’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항인 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처럼, 동물원 우리 속에 있는 사자가 우리 속에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말 한마디로 한번씩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 분방한 삶에 대해 인지하곤 한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운 삶이라내가 살고 싶은 삶이지.. 나는 어떤 자유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잠을 청한다.

 

<신치가 미나에게 들려주는 세 번째 이야기>

이야기 하나.

모이어스 :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조셉 캠벨 :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신화의 힘>, p302)

 

이야기 둘.

나는 라이프찌히에서 매우 좁고 꼼꼼한 일에만 친숙했고, 또한 프랑크푸르트의 경우는 나의 독일 문학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넓혀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신비적, 종교적, 화학적인 일은 나를 암흑의 세계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넓은 문학계의 수년 내의 사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헤르더를 통해서 최근의 모든 활동과 그것이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방향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괴테, 시와진실>,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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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0 09:07:55 *.166.205.132

선배의 말이 콕 찌르는 구나.

 

. 그럴수록 외면하지 말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리를 꼭 끝내두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안 치워둔 방처럼 짜증나거든. 결국 치우기는 싫고 치울 엄두도 안 나니 이사 가버려야겠다 생각하는 건 안되거든.^^”

 

집 청소하는 너의 모습도 연상되고...ㅋ

근데 나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지...

어떻게 하면 될까나~~

 

<시와진실> 여전히 나에겐 난해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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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0 10:26:25 *.163.164.179
미나야.

어느 연휴날의 꼭지에는 일상의 전체를 보여주는 것 보다는

특정한 하나에 주목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느낌....

그리고 그런 느낌을 이어서 <사람의 관계>를 하나의 메시지로 묶는 것도 괜찮겠다라는 생각

사람의 관계도 집안의 정리처럼 가끔은 분리수거가 필요하니까...등등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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