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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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살아있다.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다. 인간 욕망의 찌꺼기들, 먹고 마시면서 배설되는 모든 것이 모여드는 곳이다. 조셉 캠벨은 ‘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이다. 대극이 있는 곳이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하다.’라고 말했다. 그 곳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극이다 그리고 극대와 극미의 세계이다. 이러한 이원화된 현실을 연결해주는 것이 ‘현미경’이다. ‘현미경’이라는 원형의 렌즈를 통해 그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해 온 미생물이다.
현미경 렌즈 뒤에 눈을 대고 나는 내려다 본다. 한 손으로 초점을 맞춘다. 희미한 움직임이 보이면서 조금씩 선명해 진다.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신 또한 광활한 우주 너머에서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작게 느껴진다. 둥근 모양의 렌즈를 통해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그 순간, 나는 태어나기 이전, 의식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가 원형 속의 나를 발견한다.
현미경 렌즈는 불빛을 하나로 모으고 유리판 위의 미생물들을 투명하게 비쳐준다. 강한 빛으로 그들의 내부까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이 모습은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광대의 이미지와 닮았다. “봐라, 나는 궁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인다. 나를 통해서 보라.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통해서 보라!”
투명하게 비친 미생물의 형상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면에 숨어 있는 다른 존재가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나의 생각을 뒤집는다. 나는 보이지 않던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본다. 그들의 움직임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이다. 유기물과 세균들을 순식간에 집어 삼켜버리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무의식 속에 무언가 꿈틀대면서 올라온다. 나는 그들의 몸통에 올라타서 함께 움직인다. 그들과 나는 하나가 되어 춤을 춘다.
‘왕뱀 퓌톤’ 처럼 Aeolosoma가 유기물을 집어삼키고 있는 모습
그리스 신화에는 혼돈시기의 생명 창조를 ‘물과 불’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홍수가 지나간 뒤 대지에 덮었던 진흙이 하늘에서 비치는 태양의 그윽한 열기로 다시 더워지자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생명을 지어내었다. 대지가 산 것 중에서 크기로 치면 으뜸이 될만한 '왕뱀 퓌톤'을 지어낸 것도 이때였다’(변신이야기, 40p)
똥 덩어리 속에는 수 많은 미생물이 존재한다. 그들이 폐수처리장에 들어오면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 낸다. 반응조(유기물을 미생물로 분해하는 곳)에 산소가 공급되면서 잠자고 있던 미생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Aeolosoma같은 거대한 몸집의 미생물들이 활동한다. 신화 속 혼돈 시기에 태어난 ‘왕뱀 퓌톤’처럼 주변의 생명들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삼킨 유기물과 세균들이 분해되는 모습이 보인다.
알을 품고 다니는 Macrobiotus
다음에는 왕뱀보다 몸집이 작은 Macrobiotus 가 나타난다. Macrobiotus 은 수십 개의 알을 품고 다닌다. 죽으면 새끼들은 어미의 몸을 먹고 자란다.
한 곳에서 고착 생활하는 Opercularia
다음으로 고착형 미생물인 Opercularia 이 출현한다. 그들은 유기물 덩어리에 붙어서 자란다. 그리고 지나가는 먹이를 끊임없이 빨아 들인다. 시간이 지나면 수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 모양이 된다. 암소로 변한 이오를 지키는, 눈이 백 개 달린 아르고스의 모습과 닮았다.
마지막으로 먹이와 미생물이 평형이 이루어진 시기에 Aspidisca가 나타난다. 폐수처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이다. 그의 존재는 곧 깨끗한 물을 볼 수 있는 신호이며, 상징이다. 그 동안 온갖 욕망의 영혼들과 싸워서 이긴 승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며 먹이를 찾아 다닌다. 그는 혼돈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다. 나는 항상 그의 모습을 기다린다. 그에게 의식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내가 혹여 아프거나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나의 광휘이고 에피파니였다.
현미경 유 리판 위의 미생물은 뜨거운 빛으로 서서히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터져버리고 증발해 버린다.
이렇게 미생물의 삶은 순간의 연속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이 탄생할 때부터 시간의 단편들로 이루어졌으리라.
나는 단지 원초적인 존재들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할 뿐이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환희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록 필멸의 운명이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혼돈 속의 탄생, 존재의 몸부림, 고난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다.
그들은 매 순간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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