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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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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11시 37분 등록

마흔살 여자의 신화 읽기

 

 

<신회의 힘>은 원래 일반인을 위한 TV 시리즈물이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유튜브에서 대담을 찾아보는 대신, 86년과 87년 사이에 집에서 이 프로그램을 TV로 보고 있는 마흔 살 전후의 여자를 한 명 상상한다.

 

내 맘대로 그녀는 시애틀 즈음에 산다고 친다. 안개와 비 매연이 많은 그 도시 어디 쯤에서는 영화 만추 속 탕웨이와 현빈이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고, 바다 가까운 해안 번지 어딘가에서는 잠 못 이루는 또 다른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 두 사람이 만날 미래를 위한 자잘한 복선과 동시성의 인연이 철커덕철커덕 가설되고 있다. 혼자 사는 그녀는 걸어서 출퇴근하는 직장에서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 왔다. 냉장고에 정리하면서 습관적으로 TV를 켠다. 어디에나 있는 익숙한 가구 같은 인상의 여자다. 그녀는 영어를 쓴다. 미국에서는 갑이나 을이나 노숙자, 범죄자나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 낮에 직장 의료보험에서 건강검진 통지서를 받았다. 그녀는 3달 전에 자궁경부암 검진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자궁에 근중이 생겼으니 3개월마다 검진을 해서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결혼한 적 없고, 아이를 낳지 않은 그녀는 산부인과 진료가 상당히 거북하다. 앞으로 자궁을 생산의 도구로 쓰든 말든 그 소식은 우울했다. 출근을 위해 화장대에 앉아 있다가 아직은 염색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기 시작했다. 기초대사량이 줄었는지 살 찌기가 쉬워진 것 같다. 연인의 저자 마르그라트 뒤라스는 세월이 자신을 변모시키는 걸 흥미있게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흥미롭게보담은 두렵게 기다리고 있다. 직장 연차는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장애야 출산율, 특히 모체의 노후로 인한 염색체 이상 장애아 출산률을 거론하면서 35세 이상 여자는 알 못낳는 퇴계나 늙은 암소 취급을 받기도 했다. 생리량이 줄었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주변에는 한 번은 결혼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결혼한 사람들이 애인으로 삼고 싶어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경계를 유부녀들에게 받기도 한다. 출산률 저하의 원인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원치 않았지만 소수자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일요일날 가족단위로 풍겨내는 바비큐, 한국식으로 하면 삼겹살 냄새가 주택가의 저층 공기 속에 섞일 때 좀 외롭다 느낀다. 근데 이건 데드맨 워킹의 수전서랜드 수녀도 그랬다고 했다. 한편 사십 대는 일하기에 참 좋은 시절일거라고 추측한다. 이십대와 삼십대의 출렁임이 많이 평온해졌다. 이유는 모른다. 일머리도 좀 생겼다. 수많은 좌충우돌의 경력과 경험 덕분이거나 어쨎든 버텼기 때문일거다. 이 나라 여자의 평균수명과 집안 여자들이 돌아간 나이를 생각하면 그녀의 시계는 정오 즈음인 듯 한데 다들 뭐 라는지 정신이 없다. 몇 년 전부터는 좀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마흔은 두 번째 스무살이라고도 부르고, 마흔에 대한 많은 책을 다른 이들이 썼다는 걸 도서관에서 알았다. 다들 사춘기를 앓듯 한 번씩 재점검의 시기를 맞이하는구나 싶었다.

 

TV 화면의 왼쪽에 여든 살 조셉 캠벨 옹이 있겠다. 어깨가 좀 구부정하시다, 오른쪽에 장년을 지나 노년을 향하는 쉰 줄의 모이어스가 반듯한 올백 머리를 한 채 팔걸이 있는 의자에 앉아있다. 두 사람의 자리는 카메라 위치나 조명에 따라 오른쪽과 왼쪽이 바뀔 수도 있겠다. 가운데에는 스타벅스에 있을 법한 둥근 티테이블 위에 음료 컵이 있다. 고급스런 물컵과 손님용 커피 잔이다. 뒤에는 장식용 벽난로와 무난한 그림과 초록 화분 세트가 보인다. 엄청난 상식과 그것을 갖게 했을 만만찮은 독서량을 짐작케 하는 빌 모이어스는 대표 질문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신화에 대해 듣도 보도 못했던 이들이 물음직한 기초적이어서 중요한 질문을 천연스럽게 한다. 이 책을 기획한 이는 조셉 자보르스키의 책을 만든 여자다. 그녀는 언젠가 그 대담을 자신이 책으로 기획하리라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채로 우연히 집에서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다. 그 도시는 50개 주 중에 미국스런 지명을 가진 곳이다.   

 

가벼운 저녁식사가 담긴 접시를 포크로 찍으면서 소파에 앉아 보는 TV 속에서 비교신화학자라는 이가 신화를 말한다. 웬 뜸금없는 신화람. 마침 성인식에 대해 다룬다. 남자아이는 성인식이 특별히 필요하지만 여자 아이는 초경이라는 분명한 몸의 표지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성인식이 필요가 없었다고? 정말 그랬던가? 생물학적으로 생산이 가능한 나이가 되면서 어떤 안내를 받았던가? 선거권이 생기는 즈음에 이 사회에서 해야할 역할에 대해 어떤 안내를 받았던가? 성과 남녀 관계를 가르치는 제사장은 일본판 하드코어 AV 언니들과 관객을 위해 숨소리를 죽이던 털북숭이 근육맨이 아니었을까? 나는 공식적인 성인 여자로 벌써 20년은 살았는데 제대로 시늉하고 있나? 내가 가야 할 중년과 노년에 대한 지도는 어디 있지? 전 세계에 공통적인 내면으로의 탐험에 대한 걸 조셉 캠벨 저 사람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마흔 몇 살에 책을 쓴 적이 있다고? 그럼 그거 한 번 읽어봐야겠네. 무엇이던가? 나에게 살아있음의 활홀, 경험을 주는 경험은? 나는 누구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인제 <신화의 힘>을 읽고 있는 마흔 살 여자인 나로 돌아온다. 나와 신화의 인연은 무엇이지?

 

자연 속에서 촌놈으로 자랐다는 것과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내  유년의 커다란 행운으로 여긴다. 지네를 죽이고 처녀와 결혼한 청년, 슬겅슬겅 톱질하자는 의성어의 울림,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오는 느낌, 총각이 숨어서 엿보니 자기 몸을 씻어서 맛있는 된장찌개 국물을 만들던 우렁각시, 동굴 속에 큰 마을이 있던 이야기를 잘도 지어내서 저녁마다 들려주셨다. 우리 형제들이 옛날 이야기를 듣던 나이는 10살 이전이었을 거다. 초등학교가 공부의 끝이었던 아버지는 어디서 이야기의 재료를 가지고 왔을까? 아마도 공부를 더 시키지 못하는 동생을 안쓰럽게 보던 사촌형님이 사다준 중학교 교본이 출처였으리라. 아라비안나이트는 아버지가 사다주신 유일한  책이었다. 여자에 포한이 진 왕이 하룻밤만 자고 왕비를 죽였는데, 지혜로운 이야기꾼 세헤라자드의 ‘to be continued’에 감질나서 그거 마저 들으려고 살려주다보니 아이가 태어나고 사랑하게 되어 나중에는 죽이지 않고 같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아라비아의 왕이 그 때 조마조마하게 이야기를 듣던 내 마음 같았으리라.

 

나는 어른이 되면서 어릴 때 들은 이야기와 책에서 읽은 단군신화같은 것들이 살아가는 어려움을 설명하고 용기를 주는 경험을 몇 번 했다. 웅녀가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면서 백일을 견디고 나서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듯 사람에게는 변화를 위한 어둠, 동굴의 시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걸 생각했다. 서른 살 때 결혼기도 삼아 불교식으로 천일기도를 할 때다. 병든 아버지한테 줄 딸기를 구하러 한겨울에 길을 떠난 소녀가 작은 동굴을 따라 갔더니 큰 동굴이 있고 그 안에 굉장히 밝고 큰 마을이 있더라는 이야기는 내 마음 안에 있는 큰 세상을 들여다볼 때 종종 떠오르는 이미지다. 천지신명을 움직이는 것은 진실된 정성이라는 삼가는 마음이라는 교훈이 별책부록이었다. 커서 그림책으로 읽은 푸에블로 인디언 설화는 '태양의 아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키바를 통과하면서 변화한 걸 떠올려 내 앞에 놓인 시련의 긍정적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나는 거위가 처음 본 존재를 엄마라고 각인하듯 무엇이든 그냥 받아들이는 아이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마음의 창고에 저장해두는 것이 살아가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학교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이런 것을 고르려고 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지능제한이 있어서 시간과 배울 기회가 한정된다. 그러니까 정말로 필요한 것만 선정해서 반복해서 알려주어야 한다.

 

조셉 캠벨과의 인연은 이렇다.

 

그의 이름자를 처음 본 것은 책에서였다. 진시노다 볼린의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남신들>은 나의 탐독서다. 연구원을 지원할 때 ‘내 인생의 책 한 권’으로 진시노다 볼린의 책을 들었다. 나는 종종 잘 안다고 생각했던 동네, 거리에서 길을 잃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하고, 앞에 놓여있는 길의 안내자가 필요할 때 그녀의 책을 읽는다. 융심리학 배경의 정신과 의사인 이 양반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원형들을 이끌어와서 이야기를 해 준다. 그 책에서 수많은 주인공의 길을 신화로 비유한다.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나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데메테르나 헤스티아, 또는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의 특성과 과제에서 나를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힌트를 얻곤 한다. 조셉캠벨의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이 현대판 영웅의 이야기이고 스카이워커를 만든 조지 루카스가 스승으로 생각했던 이가 조셉캠벨이었다는 구절에서다. 말 나온 김에 스타워즈에 대해 한 마디. 나는 어린왕자를 읽을 때도 그랬는데 그 별 이야기가 내 마음의 여러 상태, 특징을 적절히 비유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우주이며, 내 안에는 여러 별이 있다. 그 별마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고, 나의 목표는 공화국 위원들처럼 이 우주를 평화롭게 운영해 가는 일이고 가끔 그 별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괴물이나 악당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폭력적으로 점거할 때도 있다.

 

<신화의 힘>과의 첫만남은 웹써핑 덕분이다. 이상은씨가 현경의 미래에서 온 편지를 읽고 만든 노래(제목이 춤추는 여신인가 그랬다)를 듣다가 그 블로그 주인장의 관심이 나와 비슷하여 한동안 머물러 놀았다. 현경선생님은 나에게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다. 그 선생님한테 듣던 기독교문학 수업 한 학기동안 비파사나명상을 했던 인연은 엉뚱하게도 나의 부디스트 길을 열었고, 그녀의 책들은 또 다른 참고서가 되어 주었지. 조셉캠밸의 <신화의 힘> 책 이름을 그 블로그에서 선명하게 읽었다. 이건 나와 관련이 있고, 내가 읽어야할 책임을 생각했다기 보담 느꼈다. 주문을 했다.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서 웹써핑을 또 했다. <신화의 힘>에 대한 서평이 주루룩 떴다. 그게 모두 변경연 연구원들의 글이었다. 그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이의 블로그를 통해 모닝페이지 모임에 갔고, 그 모임을 통해 4년 뒤에 연구원에 왔다. 의미를 부여하자니 다 우연이었네.   

 

나는 <신화의 힘> 전체에서 한 마디만 기억했다. 빌 모이어스가 서문에서 캠벨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라고 했던 말이다. 조심스럽게 속으로 머금는 말. 나도 춤추고 싶어요. 나를 춤추게 하는 노래의 내력과 이름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무엇이 나에게 살아있음의 경험, 황홀을 주는 지를 알고 싶어요. 그걸 쫓아 가고 싶다구요. 그리고 모양이 못나고 제조공정에서 수분을 덜 빼서 물컹거리는 두부라도 한 모 바가지에 사 들고 이 동네의 큰 일에 참여하고 싶어요. 큰 일이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누군가의 태어남을 축하다는 자리든 상관없어요. 암튼 그렇다구요.

 

신화를 더 읽어야겠구나. 마침 4월에 신화를 줄창 읽는다니 다행스럽다. 이때의 다행은 오미자처럼 복잡한 맛을 담고 있는 단어다. 양가라고 하기엔 부족하니, 삼가, 사가, 오가, 한 육가감정적인 단어라고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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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2:09:18 *.166.160.151

오미자의 맛이 복잡한가...콩두

새콤달콤 맛있기만 하더구만.

내 자네 믈러그를 좀 둘러보았다네. 손그림도 보고

그곳에서 신화의힘을 읽고 적어두었던 글이 있음을 보았는데. 내 과제 하느라 읽지는 못했다네

그랬구나. 변경연과의 인연이

필연을 꿈꾸지만 모두가 우연이라네...

의미부여 너무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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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4:12:31 *.114.49.161

길수형님^^

신화의힘을 예전에 읽었던 걸 믿고 게으름을 부렸더니

오늘 형편없는 북리뷰를 슬라이딩 세이브로 그저 내고서 부끄러워 죽겠습니다. ㅠㅠ

블로그에 써둔 걸 거의 그대로 내었어요.

 

오미자는 맛있습니다. 신화 읽기가 여러 맛인데 아는 게 오미자 뿐이라...

저는 '이보세요. 필연이예요' 하면서 과한 의미부여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말씀에 쿵 합니다.

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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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7:42:23 *.51.145.193

소설같은 글, 정말 재미나게 읽어 내렸습니다. 잘 계신지요?

저와 누님과의 인연이 결국 캠벨과 누님과의 인연의 결과였습니다.

이것 참, 이럴 때 '연기'를 이야기 한 사람의 신빨이 느껴집니다. ^^  

제가 우울할 때 춰 주신다던 '오랑우탄 춤' 약속, 잊지 않으셨겠지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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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7:50:39 *.154.223.199

기억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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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0:27:46 *.142.242.20

ㅎㅎ 레이스할 때는 언니 글이 참 차분하면서도 

뭔가 뭉클함을 느끼면서 언니가 따라가는 시선이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연구원이 되고 나서의 언니의 글들 (이 컬럼과 정민교수님 인터뷰 관련 글, 댓글)은 

재미있답니다. 


그나저나 내가 엊그제 맞은 백신에 관하여 

언니는 검사 받는다고 하니까 

흐으음.. 검사만 잘 받으면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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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7:51:47 *.154.223.199

넹 세린낭자^^ 재미있게 읽어주어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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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2 14:42:11 *.91.137.79

윤정님 오랜만이에요 잘지내고 계셨어요? ^^

8기 연구원 입성 뒤늦게 축하드려요

글이 무척이나 재미있네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현경님의 책은 저두 20대 후반에 읽고, 친구들에게도 선물했던 기억이 나네요

앞으로의 윤정님의 한걸음 한걸음, 무지 기대되구요, 무지무지 응원합니다 

제가 아는 윤정님이라면, 뭐가 하나 큰 일 하나 만드실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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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3 09:01:45 *.114.49.161

미녀부족장님^^ 백일천하 청룡승천!!!!!!!

선거날 서울 갔다가, 작년에 연구원 총회 가시던 버스 안에서 나란히 앉으셨던 두 분과 통화하던 거 생각했어요. 언젠가 결혼식에 갔었다는 이의 이름이 비슷해서 미녀부족장님이 그새 결혼하셨나 궁금했어요. 처음 뵙던 날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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