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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d: 문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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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8일 09시 22분 등록
 

 칼럼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기도 바치는 것을 좋아했다. 수업을 마치고 야간자습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 시간 내어 정결한 여인 마리아상 앞에서 무언가를 기도했다. 특히 해가 짧은 가을날 그 앞에 서서 성모송을 외우기라도 하면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성모마리아와 단 둘이 마주하게 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베아트리체처럼 고결하고 순수해지는 느낌이었다.

   신부님과 이십여 년 만에 통화를 하게 되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나에게로 전달된다. 잊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수많은 기억들 속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하나의 기억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은 채 한 순간에 많은 것들을 복원시켜 주었다. 아무리 오래된 과거라고 해도 과거는 죽어 버린 것이 아니다. 과거는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 내재된 현재인 것이다.

   한참동안 통화를 하다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목소리에 놀라 정말 J신부님이 맞느냐고 물어 보았다.

   “목소리는 그대로일지 모르겠지만, 오랜 유학 생활동안 고생 많이 해서 폭삭 늙어버렸다. 머리는 하얗게 되어버렸고.......”

  이 말에 가벼운 슬픔이나 연민이나 그런 마음은커녕,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한줄기 안도감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한 때 많은 성당 여학생들의 연모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머리는 하얗고 얼굴엔 주름이 잡혀버렸다는 것에 대해 오래 전에 들끓었던 질투심이 어떤 위안을 받고 있는 듯 하였다.

   지금의 신부님을 만난 것은 우리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고, 성당에서는 신학생이었던 그를 학사님이라고 불렀다. 학사님의 첫인상은 석고상 ‘줄리앙’을 연상케 하였다. 물결치는 듯한 곱슬머리와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는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는 그런 인상의 소유자였다.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다.

  “애들과 좌충우돌하면서 살고 있죠...”

  “그러면 잘 사는 거다.”

  아이들과 좌충우돌하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난 이해한다. 어디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여 이방인처럼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고,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했던 수십 년 전의 나를 신부님은 기억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과의 갈등 그리고  세상을 향한 반항은 접어 버리고 아이들과 다투고 있다는 것은 건강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난 자신과의 갈등을 끊임없이 겪고 있는데.   

   학사님의 제안으로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독서토론이나 음악 감상을 하였다. 봄에는 하얀 사과 꽃 아래서 여름에는 포도나무 그늘 아래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 모임에 학사님도 어쩌다 자리를 함께 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특권의식마저 가졌다.

   학사님이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면 우리는 편지를 보내곤 했었다. 그 때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월간 신동아’를 보고서는 별 관심도 없는 정치이야기나, 학교와 사회는 회색도당들처럼 우리들로부터 순수함과 낭만을 빼앗아 간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러면 답장에는 ‘생각이 그토록 깊은 줄 몰랐다. 앞으로 그런 남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느껴야 할 것이며,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해내어야 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어느 겨울 방학 때 ‘닥터 지바고’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모임의 멤버인 경화는 “이제부터 나를 ‘라라’라고 불러. 학사님이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라라와 너무나 닮았다면서 예명을 지어 주었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경화는 그때 털실로 짠 검은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눈에 두툼한 입술은 정말 정열적인 라라와 닮아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그동안 경화에게 품고 있던 우리의 열등감과 질투심이 콜린 맥컬로우의 소설 <가시나무새>를 토론하면서 그만 폭발해 버렸다. 책의 내용은 랠프신부는 메기라는 여인을 사랑하였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랠프신부는 자기의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아들인 오닐의 죽음을 접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경화는 “신부이기 전에 한 인간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의 심판을 받을 수도 없으며, 심판을 해서도 안된다.” 면서 랠프신부를 적극 옹호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학사님이 소설 속의 랠프신부이고, 경화는 신부님이 사랑했던 메기라도 되는 것처럼 신랄하게 주인공들을 비난하였다.  

  “랠프신부는 신부이기 때문에 어떤 이름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으며 구원받을 수 없어. 그리고 메기라는 여자 또한 랠프신부를 파멸로 이끌었기 때문에 죄과를 치루야만 되.”

  우리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급기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서로를 시샘하고 견제하면서도 대학에 갈 때까지 모임을 이어갔다.

  우리가 대학에 진학을 한 그 해 봄에 학사님은 계산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모두들 새로 탄생한 신부님을 축복하는 자리였는데, 우리 네 사람은 아쉽고 슬픈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체투지를 하고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서원을 할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어떻게 하다 길고 검은 수단을 입은 신부님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신부님은 우리를 보았다.

  이제 공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생을 바쳐야 하는 신부님을 더 이상 뵐 수 없음을 예감했다. 우리의 학사님도 아니고, 우리의 신부님은 더더욱 될 수 없다는 그 생각이 슬프게 만들었다. 서로가 드러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학사님은 우리 모두에게 짝사랑이긴 했지만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혹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감추어 두고 싶다.

  신부님은 그 후 나에게 두세 번 정도 전화를 하여 대학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자신을 좀더 많이 사랑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록 세월은 이십 여 년이나 흘러버렸지만, 그때 신부님의 관심과 격려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보여드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책을 한 권 보내드렸다.

  “신부님, 제가 불교 책을 보낸 것에 대해 오해는 하지 마세요.”

  “궁극에는 같은 길인데 그것은 아무 상관없다. 네가 쓴 책이라면 어떤 책이라도 괜찮다. 네가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신부님의 말씀으로 수십 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은 것 같았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이었다. 그 말씀은 내 가슴 속에서 격류처럼 휘돌았다.

  우리들의 신부님이 계시는 곳은 천국의 어디쯤 될까? 지금의 풍광이 베아트리체가 인도하는 천국의 풍경아닐까 싶다.

IP *.85.24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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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6:02:23 *.36.14.34
아름답고 사실 그대로인 청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어쩐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신부님의 표정이 반전의 묘미네요! 깔리여신님의 글은 그 때 그 때마다 형형색깔이 다채로와요. 이번 글은 맑은 파스텔톤 수채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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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6:11:35 *.39.134.221

이 분위기 우리 고등학교 다닐때 보았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때는 전영록 임예진 두 주인공이 많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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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7:47:07 *.194.37.13

잠시 저도, 첫사랑의 추억에 빠졌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잔잔한 필름의 영상이 제 머리 속에 비추면서 지나가네요.  

그 중에서 마지막 장면인 글을 쓰고 있는 누님의 영상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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