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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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데이트
<태어나서 5년 11개월, 경복궁1>
"민호야, 오늘 아빠랑 소풍 가는 날인거 알지? 데이트 가자"
"응, 나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래서 기분이 좋았어, 근데 데이트가 뭐야?"
"데이트?... 둘 만의 시간을 가지는 거지"
얼마 전 서울로 이사를 한 후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쉬는 날 마다 서울로 가고, 근무에 맞춰 당진으로 옵니다.
민호가 유치원에 가기 때문에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사 후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온전히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휴가를 내고 민호와 데이트를 약속했습니다. 데이트 장소는 경복궁입니다.
개인적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나무와' 정기 모임이 그곳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집에서 밀린 숙제를 하기로 했지요.
'나무와' 모임은 2002년 한겨레문화센터의 생태강좌를 수강한 사람들이 꾸린 동호회입니다.
한달에 한 번 오프모임을 통해 나무와 풀을 관찰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죠.
산악회처럼 정상을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천천히 관찰하며 걷는
느릿느릿한 모임이기에 아이에게도 맞겠다 싶었습니다.
'나무와' 모임에서 저는 가뭄에 콩나듯이 참석하는 불량회원입니다.
가끔 참석해서는 신입회원처럼 매번 질문을 쏟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게 뭐에요? 매실인가 살구나무인가? 개나리는 열매가 없나요? 아, 예전에 본 나무인데..." 등등
30분 정도 지나자 매표소 앞에 회원들이 하나 둘 모입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쨍한 날씨였습니다. 관광객들이 꽤 많았습니다.
광화문 뒤 편의 너른 마당에 들어서면서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민호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 것 입니다. 앗차 싶더군요.
전 느리게 나무 주위를 맴도는 회원들을 따라다니는 것조차 포기했습니다.
그냥 민호와 둘이 산책을 나온 듯 경계선으로 쳐놓은 줄에서 줄타기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민호 손을 잡고 끝에서 끝까지 줄타기를 하며 왔다 갔다 했습니다. 잠시 앉아 과자도 먹었습니다.
그늘이라 시원했고, 민호도 즐거워 했습니다.
둘 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는 상대의 속도를 맞춰야 함을 잊을 뻔 했습니다.
상대가 작은 아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경복궁2>
#2. 처음 보듯이
시간이 지나자 민호가 편안해 지고 활력이 생겼습니다.
'나무와' 회원들도 멀리 가지 않고 흥례문 금천 주변의 매실과 살구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민호도 아는 삼촌들이 있어 조금씩 모임에 관심을 가집니다. 함께 근정전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나무가 없는 근정전은 슬쩍 지나치고 경회루 쪽으로 향했습니다.
큰 연못도 있고 잔디밭에 나무도 많아 한층 쾌적합니다.
매점 앞에서 가져온 간식도 먹으며 사진을 찍으니, 민호도 나름 모임의 회원으로서 자리 잡은 느낌입니다.
그 때부터 민호의 본격적인 나무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하는 모습을 잘 보고 듣더니 따라하는 겁니다.
나무 모양과 잎, 낙엽, 꽃 들을 잘 관찰합니다. 질문도 하고 공책을 들고 뭐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잘 모르는 단어가 많으니까 저에게 써달라고 하고 베껴씁니다. 긴 문장은 아예 불러주고 저에게 쓰라고 합니다.
낙엽과 열매는 채집해서 자기 가방에 넣습니다.
"개미가 나무가지 가져간다"
"왕버들, 부드럽다"
"명아주, 나비 닮음"
"소나무, 까칠까칠함, 멀리 날아감"
"때죽나무, 많이 떨어진다. 술냄새"
"사진 마니 찍는다"
"산딸나무 밑에 솔방울 떨어진다"
"쉬나무, 숨구멍 있다"
민호의 감각으로 관찰한 것들입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맡고, 손으로 만지면서 생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민호에게는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겠지요.
세상에 대한 경이와 호기심이 민호의 세상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경복궁2>
그런 민호를 보고 '나는 세상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아니오'.
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손으로 만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머리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보는 세상이 답답했던 것은 경이감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경이롭습니다.
민호가 태어나서 넉 달 즈음에 산책을 하며 나무를 바라보던 눈빛이 떠오릅니다.
처음 보듯이,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 세상을 볼 때에 지루함은 끼어들 수가 없겠지요.
그 눈빛을 잊지 않겠습니다.
<태어나서 1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