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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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탁상달력을 살펴본다. 이번 주에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점심 약속이 있다.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에 저녁 일정이 있다. 최근 지인들과의 점심 식사 약속이 많아 졌다. 매주 초에는 그 다음 주의 일정을 잡는다. 월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한 화, 수, 목요일 중 이틀 정도만 할애한다. 더 많아 지면 바빠서 정신이 없다. 저녁 약속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나 중 하나가 집에 도착해야 시어머니가 퇴근 하실 수 있으니 남편과 미리 일정을 공유한다. 그래도 일주일에 이틀 이상은 늦지 않으려 노력한다. 더 많아지면 심신이 피로하다. 또 한창 한글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둘째의 공부 봐주기에 소홀해 진다. 그러다 보니 내 캘린더에서는 예전과 다르게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여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쓰지 신이치는 『슬로 라이프』에서 ‘여백 증후군’이란 병에 대해서 말한다. 자신의 다이어리에 빼곡히 일정이 적혀 있지 않으면 그 여백으로부터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불안해 못 견디는 사람, 그는 여백 증후군에 걸린 것이다. 사람들은 자랑하듯 ‘시간이 없다’ ‘바빠 죽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가한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잉여인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더 바쁘게 만들어야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유능한 사람이라 느껴질 것이 아닌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성공했지만 불행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 제3습관으로 ‘빈 시간, 빈 공간을 두려워한다’를 지목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공했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여백을 두려워한다. 빈 공간이 있거나 약속 시간 사이에 틈이 새기면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 비어 있다는 것은 지루하거나 괴로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비어 있는 시간으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즐거움 보다는 지루함이 앞선다. 김정운은 자주 웃고 많이 사랑하는 것을 성공이라 정의한다. 돈 때문에 자주 웃을 수 있다면 가능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높은 지위가 많이 사랑하는 것의 필수조건이라면 가능한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돈과 지위 때문에 웃음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떠난다면 그 성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성공했는데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 역시 내 인생의 여백이 참으로 두려웠다. 고심 끝에 안식년을 가지면서 그 여백이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장애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영영 복귀하지 못하면 어쩌나 심난했다. 직장을 옮길 때도 공백 없이 이어달리기를 거듭했던 내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안식년이라고 해놓고 그 어렵다는 연구원 과정에 도전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안식년 동안에 직장생활 할 때 보다 더 분주하게 살며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완수했나 보다. 그런데 나는 최근 휴식 연구를 하면서 공백기를 가진 사람들이 인생의 크나 큰 성취나 도약을 한 사례를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두 학자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의학에 대한 온 국민의 관심을 이끌어낸 허준. 그가 저술한 『동의보감』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아는가? 허준은 조선 왕조가 개국된 이후 의관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에 올랐다. 서자 출신인 그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의 벼슬을 내린 건 선조였다. 비록 신분 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선조는 왕자 신분이던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고 임진왜란의 피난길을 함께한 허준의 공을 인정해주었다. 임진왜란으로 큰 혼란을 겪던 조정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게 되자 선조는 허준을 불러 의서 편찬을 명했다. 왕명을 받은 허준은 당대의 인재들과 편찬작업을 시작했지만 정유재란으로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작업이 재개되면서부터는 허준이 단독으로 임했다. 그러나 허준의 시련은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뜨면서 시작되었다. 신분을 뛰어 넘은 그의 입지에 대한 질시와 견제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이어 왕위를 이은 광해군도 어쩔 수 없었다. 귀양살이는 1년 8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유배기간 동안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14년 동안 240여 종의 의서를 참고하여 쓴 책 『동의보감』, 이 때 한 작업은 전체 분량의 반에 해당한다. 자신의 인생의 불행한 공백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 최대의 걸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동의보감』이 허준의 생을 구해주었다고 분석한다. 그는 유배기간 동안 자기구원적 공부에 몰입한 덕에 자신을 구원하고 인생 최고의 업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예는 또 다른 학자의 삶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22세의 나이에 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의 눈에 들었고 28세에 대과에 합격해 벼슬길로 나섰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된 이후로 그의 인생에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천주교 문제가 터기 전까지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 출세를 거듭했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손위 형인 정약종이 참수되고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옮겨졌다. 그것이 18년 동안의 길고 긴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유배기간 동안 다산은 232권의 책과 267권의 문집을 완성했다. 누군가는 아마 다산이 유배를 가지 않았어도 저작활동을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57세에 해배되어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저작에 대한 분합, 필삭, 윤색에 힘을 기울였으니 그의 18년간의 유배기간은 집중 집필기간이었던 셈이다.
서치펌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며 수많은 이력서를 보게 된다. 보통의 회사원의 이력서에는 허준이나 정약용과 같은 유배의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 구직자의 경우 1~2년의 공백기가 있는 경우는 많다. 임신과 출산, 육아 과정에서 회사를 그만 두거나 남편의 해외근무나 유학에 동행한 사람들이다. 아니면 나처럼 버티다 버티다 번 아웃되어 안식년을 가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직업적인 조언을 하자면, 1년 정도의 공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공백이 전혀 없는 것만은 못 하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회사에 양해를 얻어 육아 휴직이나 병가와 같은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해외에서 학위를 따고 와도 5년 가까이 되는 공백은 업무에 바로 뛰어 들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또한 찔끔찔끔 공백이 있는 것도 좋지 않다. 한 회사에서 근무기간이 길지 않다면 구직자의 역량에 의심을 품게 한다. 긴 공백이 있다면 눈높이를 조금 낮추어 구직활동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인생의 여백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대학자가 아니니 일생의 저작을 탄생시키지 못하더라도 지친 마음과 육체를 달랠 수 있는 얼마간의 시간이라면 어찌 가치가 없겠는가. 아이들 엄마라면 아이에게 엄마가 꼭 필요한 기간에 엄마 역할에 충실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 인생 후반기를 계획해야 하는 30대 후반에 자신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1년 반 동안의 안식년 휴가가 없었다면 또 다시 무기력한 회사원의 얼굴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만약 그대가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내기 힘들다면, 발걸음 하나 옮길 기력조차 없다면, 삶의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자신에게 안식년을 선물하라.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매진하라. 그리고 안식년이 그대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기대하라. 아마도 배신은 없을 것이다.
사무실 사람들이 주말에도 일하면 보수도 좋고 목표 달성에도 좋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주말에 하루는 가족과 보내고 하루는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어요.
누군가 우리도 주5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서 내 편을 들어줬지요.
나는 안식년이 아니라도 안식일이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바쁘게 달리는 사람들의 목표가 무엇일까? 지금 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여유있는 삶을 위해 달리는데 지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방법도 있잖아요.
댓글 쓰고보니 내 시야에서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잔뜩 드는 걸~ ㅋ
오늘 오프 수업은 어땠나요? 정말 가고 싶었는데.
못 간다는 말을 하기가 싫어서 그냥 아무말 없이 넘겨 버렸네... 쩝...
요즘 좀 정신없지만 오전 근무 빠지는 때가 오면 언니 회사 앞으로 점심 한번 얻어 먹으러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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