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가 호명한 철학자들
치렁치렁한 금발 위에 검은 색 모자를 쓰고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라파엘로는 아직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미소년이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인데도 그의 얼굴선은 강하지 않고 부드러움과 연약한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다. 예술가 특유의 부드러움과 온화함과 지적인 매력을 지닌 그의 얼굴은 로마의 여인네들을 가슴 설레게 했을 것 같다.
한줄기 달빛이 내려앉은 듯 부드러움과 안온함을 지닌 라파엘로가 그리스의 철인과 학자들을 대거 등장시킨 그림 <아테네 학당>을 그렸으리라고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테네 학당>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주문에 의해 바티칸성당의 ‘서명의방’에 그려진 벽화이다.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스 사상의 탁월한 수백 년을 나타내는 54명의 학자들이 베드로 성당과 비슷한 학당의 주랑 현관에서 격자천장으로 장식된 아치 아래 모여 있다. 학문과 인간의 이성을 논하는 불멸의 순간이다. 그림의 제목이 <아테네 학당>이라는 것만 보아도 먼저 플라톤을 떠올릴 수 있다. 플라톤은 42세 무렵 아테네 근처에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우고 학문 활동과 강의했었다. 이 그림에서 중심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윌 듀런트’의 설명을 빌어 <아테네학당>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윌 듀런트는 인물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플라톤은 제우스와 같은 이마에 깊은 눈과 수염과 머리가 허옇게 흘러내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쳐들어 완전한 국가를 가리켜 보인다. 그의 옆에서 조용히 걷는 아리스토텔레스는 30년이나 젊은 잘 생기고 유쾌한 모습으로 손바닥을 아래로 한 손을 앞으로 뻗고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몸짓은 ‘스승 플라톤의 원대한 이상주의를 다시 땅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잡아 끌어내리려는 것’ 같다나.
나는 여기에서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이론을 떠올려 본다. 플라톤의 동굴이론은 우리의 사고와 인식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인간들이란 어려서부터 동굴 속에 감금되어 목과 발목이 묶이어 있고 앞만 볼 수 있다. 여기서 동굴이라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보지 못하게 갇혀 있는 삶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눈에 투영된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이 묶여 있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현실을 뜻한다. 가끔 동굴 밖으로 나가는 죄수들만이 사물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지 마라. 내가 본 것들이 진실이라고 믿어서도 안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윌 듀런트의 인물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한 설명은 계속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장들을 손가락을 꼽아 헤아리고, 무장한 알키비아데스는 사랑스러운 태도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화음판 안에 우주의 음악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 아름다운 여인은 아마도 아스파시아일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의 수수께끼를 쓰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윌 듀런트’는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린 것이 신통방통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라파엘로가 그렇게 많은 독서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 서둘러 플라톤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을 공부하면서 준비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과 겸손한 대화를 나누어 <아테네 학당>의 탁월한 구상을 했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렸을 때가 스물여덟 살이었다. 지적인 매력을 지닌 청년이긴 해도 아직 혈기왕성했을 터인데, 어떻게 철학자들의 면면을 그렇게 세심하게 나타냈는지 궁금하다.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는 라파엘로는 밤새워 그리스철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림의 배경과 구도를 생각하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좋을지를 상상하면서 수백 장의 밑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철학자 한 사람마다의 특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뇌한 라파엘로의 정신세계가 느껴진다. 라파엘로가 보낸 그 불면의 밤을 좀더 깊이 엿보고 싶다.
또 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린다. 알렉산더대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햇빛이나 가리지 마시오’라고 한 마디 던진 디오게네스는 옷을 벗고 아무런 걱정 없이 대리석 계단 위에 비스듬히 주저앉아 있다. “지렛대만 주면 지구를 들어올리겠다”고 큰소리 친 철학자요 과학자요 발명가인 아르키메데스는 네 명의 열중한 젊은이들을 위해서 석판에 기하학 도표들을 그리고 있다.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조로아스터는 각기 구체를 들고 논쟁을 벌이는 중이다. 수염을 기르고 별자리로 가득 찬 지구의를 들고 있는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가 왜 이 그림에 등장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조로아스터가 등장한 것이 반갑기는 하지만 의문스럽다. 배화교로 알고 있는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6세기경의 실존 인물이며, 니체까지도 열광하게 만들었다.
조로아스터는 “인간에게는 선과 악 모두를 실천할 자유의지가 있으며, 다만 궁극적인 승리는 항상 선 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선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로아스터는 이 세계를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누었는데 이런 교리는 유대교를 비롯한 기독교, 이슬람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리스 철인들과 학자들을 선별하여 등장시키고 조로아스터를 등장시킨 라파엘로의 안목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이는 페르시아의 역사가 총 1만이천년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조로아스터를 세계사의 맨 처음에 두기도 하는데, 라파엘로는 이미 이것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그의 높은 안목을 찬탄해야 할 것 같다.
<아테네 학당>에서 재미있는 것은 ‘라파엘로가 겸손하게 숨어서 거의 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슬쩍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아테네학당을 엿보고 싶은 자신의 충동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나타낸 것도 그림을 더욱 숭고하게 만드는 것 같다. 라파엘로 덕분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54명의 철학자들 중 불러보고 깊은 이가 있다. “모든 만물은 나눌 수 없는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 데모크리토스이다. 나에겐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
라파엘로는 언어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붓과 색채로 말을 했던 사람이다. 일생동안 그의 붓에서 창조된 세상은 아름다웠고, 그리스도교의 숭고함과 엄숙함과 경건함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이다. 그의 성화 그림 앞에 서면 ‘신’에 대해 고집 센 회의주의라도 개심시킬 만큼 대단한 감동과 파노라마를 일으킨다고 전해지고 있다.
라파엘로의 심오하고 경건한 사색적인 그 이면에는 또 연애박사라는 타이틀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왜, 화가이자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풀밭 위의 성모>, <콜론나 성모>, <성모와 아기> 등 성모그림을 많이 그렸다. 성모의 모델이 된 여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화가 자신이 모델에게 강력하게 끌리지 않으면 명작이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라파엘로 또한 여인들의 매력에 아주 강하게 끌리지 않고는 그들을 매혹적으로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많은 애인들을 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미 그의 예술에 매료된 사람들은 “라파엘로의 연애에 대해 ”무죄“라고 했으며, 교황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가 그런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나 라파엘로의 바람기는 무죄라고 말해주고 싶다.
카스틸리오네가 라파엘로에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내느냐고 묻자, 그는 여러 여인들에게 들어있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그들을 만들어 낸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적나라한 감각주의를 그대로 지닌 채 그는 언제나 좋아하는 주제인 성모그림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성모를 50번이나 그렸다.
왕자처럼 살고 많은 여인들을 순간적으로 사랑했고 천장에 남자와 여자 누드화를 그리면서 좋아하던 라파엘로는 서른일곱 살, 자신의 생일인 수난의 금요일에 삶을 마감했다. 라파엘로의 비명은 간결하게 “여기 라파엘로가 잠들다”라고 쓰여 있다.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시간적으로 다른 시대를 살았기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그들을 초대하여 토론의 장을 열었다. 라파엘로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테네의 아카데미를 재현시킨 라파엘로의 업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빛이 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문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즈음에 더욱 각광받는 그림이 아닐까 싶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매력적이다. 행복한 예술가로 살다간 그의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은 지금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깔리여신님 글을 읽으니 라파엘로의 자화상과 아테네 학당 그림이 보고 싶어지네요.
이 그림을 이리도 애정을 가지고 읽으셨대요 @@
여신님 글은 참 공을 많이 들여 쓰시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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