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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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비극이라 하는가
스포츠뉴스에 골프 소식은 빠지지 않는다. 생각 없이 TV를 보는데 시원한 잔디 위에 빛나는 아이언을 잡은,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골퍼들이 애처롭다. 이 나라 나이 어린 친구들이 LPGA 상위권을 석권했다는 뉴스는 더 이상 ‘something new’가 아니다. 박세리씨 이후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녀의 빛나는 선례를 연료로 키워진 그녀들의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키워진다.. 키워졌다.. 이 수동태적 꿈의 현현 앞에서 ‘제2의 박세리’로 뭉뚱그려지는 그녀들의 수식어가 각각의 개별성을 제거해 버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많은 갤러리들 속에서 그녀들을 쫓아다니는 그 부모를 번갈아 보니 안타까움은 더한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 것이다. 편견으로 가득 찬 내 시선 밖의 그네들의 삶은 미끈하다. 열심히 잘 사는 이들을 시칠리아 할배 같은 괜한 오지랖으로 근거 없이 앞서서는 곤란하겠다. 그럼에도 치미는 화를 눅일 수 없는 것은 나의 삶도 누군가의 꿈에 의해 ‘길들여져 간다’는 느낌, 그 지울 수 없는 운명의 익명성이다.
이것은 타인이 꾸는 꿈에 기꺼이 헌신하는 타자성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찝찝함이 있다. 나는 되게 기분 나쁜 이 느낌과, 나와는 떼어낼 수 없는 직장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자연스레 잇댄다. 직장인, 이건 앞서 어린 골퍼들을 빗댄 개별성이 제거 되었다느니 수동적 꿈이니 하는 말들과는 쨉이 되지 않는 시시함이다. 그러니 나는 첫 문단을 이야기할 자격이 애초에 없었던 거였다. 길을 가다 그냥 걷어차이는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삶이 누군가를 롤모델로 자기 꿈을 펼쳐가는 삶들을 폄하했으니 얼굴이 붉어질 일이다.
개인 인생의 굴곡은 제 각각이고 모두 나름의 곡절을 겪어서 뼈아픈 그늘 몇 개씩은 보듬고 살겠으나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 나에게는 시시하다. 자본에 봉사하여 돈 버는 일, 그 삶의 모습이 젊은 사람이나 늙은 이나 다 똑같아졌다. 어느 순간 삶의 다양성이 말라버린 팍팍한 이 나라 대중의 보편적인 삶이 되었다. 그런 인생이 되기 위해 오로지 경쟁을 위한 악다구니를 내려놓지 못하게 되었고 진창에서 둘러 빠져야 하루가 가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한없이 익명적인 ‘누구’로 바뀌어 버린 자신의 모습이다.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할 멍에라면 기꺼이 쓰고 갈 수 있는 것인가. ‘무상한 생이기에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라’는 앞뒤 맞지 않는 역설을 잘 해석하여 무가치적인 일들을 덮어놓고 봉사하고 보는 삶은 아닌가. 일어나 출근하는 일은 괴롭지만 편하다.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 부여된 삶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아침에 직장에 나가지 않는 나의 모습, 그 사태를 생각하는 것 조차 불편하고 불안하지만 한편으로 그 보다 기쁠 수는 없다. 어떤 삶이 나에게 주어진 삶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나조차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제 아비를 죽이고 제 어미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이 제 운명이었다면 그 운명이라는 것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제 눈을 스스로 찌른 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강력한 외면이다. 그 외면이 생의 무상함을 잠재울 수 있었던 치열함이었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그 어미가 제 자식 앞에서 젖을 내어 놓고 살려주기를 애원하는 빌어먹을 상황, 그 상황에서 오레스테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운명이라는 세속적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비극이다.
주위를 다시 둘러보자. 비극 아닌 것이 없다. 병원에서 2박 3일을 아픈 아이와 함께 하다 월요일이 되어 출근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일해야 하는 아비, 자신의 살을 내어주마 했던 연인과 이별하고 다시 아침을 맞아야 하는 사태,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느닷없이 먼저 보내야 하는 일, 그러나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며 스트레스 받다가 눈치 보며 퇴근하고 월급에 잠시 기뻐하다 마이너스에 불평하는 삶을 사는 것, 그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각하는 자신이다.
오레스테스가 미쳐가던 이유, 오이디푸스가 결국 성인(聖人)이 된 이유, 자기 앞에서 죽음을 얘기하지 마라던 아킬레우스, 운명을 극복한 자기 결정의 삶들이 3천 년을 넘나들며 인류의 정신적 원류로 추앙 받는다. 왜 그럴까? 놔두면 비극이되 건드리면 ‘깊은 인생’이 되는 지점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날려버릴 가공할 미사일을 격발하기 때문이다. 바로 비극적 운명을 뽀개버리려는 치열한 노력이다. 그래서다. 비극적 인생의 위대한 삶, 그 삶을 함부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처한 지금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나의 운명으로 확정 짓고 그저 열심히 이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와 비슷한 삶으로 살 수 있겠냐 말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의 회사는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잦은 회의, 질책과 함께 쏟아지는 업무, 하루 12시간의 근무. 회의를 할 때면 항상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난데없는 질문에 입안은 바짝 마른다. 넘어가던 침이 목구멍을 찢어 놓는다. 이 구질구질한 삶을 어찌 할거냐는 대답은 나밖에 할 수 없겠지만 어린 골퍼의 모습과 회사에서 항상 쫄아대는 나의 모습, 오레스테스의 갈등, 오이디푸스의 아픔을 겹쳐본다. 흰 천을 두르고 끈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얘기하기를 “치열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너의 방식으로 세상을 열어재끼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면 더 이상 비극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