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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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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1일 10시 14분 등록

자유의 두려움

 

비로소 나는 자유가 어색함을 알았다. 자유로 가는 길을 막아 서고 있는 것은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았다는 말이겠다. 자유라는 것의 정의가 타자로부터 구속 받거나 얽매이지 않는, 그래서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 했을 때, 그 때의 자유의 출발지는 자신이 아닌 타자다. 타자가 나의 자유를 좌우하는 것이다. 맞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의는 자유도 어쩌지 못하는 자유의 개별성, 바로 각자가 처한 처지에서 출발 하는 자유의 개념을 아우르지 못했다. 구속 받더라도, 제약 있더라도 자기 스스로 자유라 생각하면 자유다. 자유는 타자로부터 시작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라는 잣대는 자신만이 정의하고 들이댈 수 있는데 그래서 자유는 지극히 개인적 취향에 달려있다. 자유는 상대적이라는 말을 어렵게 둘러댔다. 그런 상대적 개념의 자유, 돈이 없어도 나는 자유롭다 거나 따가운 시선에도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할 때의 그 자유가 나에게는 부재하다. 자유가 오로지 나로부터 비롯되는 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데면데면하고 있는 꼴이다. 자유 자체를 부자연스러움으로 치부하는 속내가 드러나고야 만다. 항상 자유를 떠들고 다니지만 정작 자유 앞에 자신이 세워졌을 때 고개를 돌려버리는 건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자유를 자유이게 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두려움을 가진 나 자신이다. 이 두려움 중에 가장 큰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게 맞겠다.

 

 

1.    가난

 

지금이라도 자발적 가난으로 인해 내가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나는 가난할 수 있다. 한동안은 힘이 들고 치욕스러울 수 있겠지만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면 자유라는 궁극을 위해 못 견딜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가진 자유의 취향을 내 가족에게 들이댈 순 없다. 그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가난이 아니라 불편의 당위성을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건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의 건사를 책임진 가장으로써의 두려움을 아우른다.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있는 체 하거나 멋쩍게 포장하는 일, 애써 그네들을 따라가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갖은 노력들 이 소모적인 삶의 메커니즘을 이제는 끊어 버리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가족의 삶의 관성은 이미 탄력을 받아 있고 나 또한 middle class value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있는 마당이다. 다만 그 속에서 자기 부정의 몸부림만 칠 따름이다. 항상 말한다. 나는 그리 살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모습이 오히려 의제 자백의 혐의 인정이다. ‘나 사실은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하는 무력한 고해성사인 것이다.

 

돈을 가져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즉 교환가치는 곧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 가치임을 인정하는 것, 자유의 그 또 다른 페르소나를 내 손으로 벗겨낼 수가 없다.

자유로 가는 길 중간에 떠오르는 건, 소모적 삶을 끊어내고 신념에 차서 자발적 가난을 택한 당당함이 그려지기 보다 처자식의 비루하고 고단한 삶이 먼저 어른거린다. 이것은 나를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아침 일찍 밥벌이에 나서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의 인간을 근사하게 만드는 삶인지는 안다. 그러나 그 삶이 나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지는 아직 모른다. 자유의 문턱에서 고개 돌리는 이유는 내가 가진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그 자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 얄팍한 안목도 한 몫을 한다. 좀더 넋두리를 보태면 자본으로만 굴러가는 내 사는 이 곳의 체제는 물론이거니와 단 한 번의 시도가 실패할 경우 실패한 인간들은 사회에 발 붙이지 못하게 되는 사회 안전망도 내 안목만큼이나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2.    권위 상실의 두려움, 권위 획득의 욕망

 

이제껏 써댄 칼럼을 곱씹어 보니 권위라는 말이 그리 많이 나올 수가 없다. 나는 권위라는 것을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도의 대상인 듯도 하고 그것을 쟁취하지 못한 자기불만의 울분이기도 한 것처럼 글을 써왔던 듯하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는 말인데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답습된 눈치의 문화가 나에게 분화된 탓도 있겠으나 이 권위라는 것이 나에게 얼마간 스트레스를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워하며 배운다고 했던가. 내가 그렇게 싫어한 나의 모습이 내 자식의 행동에서 언뜻 보일 때, 내가 그렇게 닮고 싶지 않으려 했던 내 아버지의 버릇을 어느 순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권위를 휘두르는 이와 그 세태들을 씹으며 그네들과 같은 자리에 있음을 상정하고 나를 돌아본 바로 그들과 나는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지적으로든 성적으로든 지위의 고하를 이용하였든 모든 권위의 부정한 일면들을 나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대해 나는 경악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알량한 권위에 스스로 맞버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눅들어가며 주눅을 전파한 것이다.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적어도 이런 천박한 권위 같은 것과는 멀어져야 하지만 내가 가진 모든 권위가 없어질 것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더 많은 권위를 획득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것이 종종 감지된다. 이런 마음이 있는 한 내 안에 자유가 들어올 자리는 없다. 자유를 쟁취하기가 이리도 힘이 드는 일인지 새삼 느낀다. 카잔차키스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새겼던 그 말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유를 쟁취한 인간의 끝 지점이었다. 그 세 문장을 자신의 묘비명으로 새기기 위해 해야 했던 치열한 노력들이 눈물 겹게 다가온다.

 

3.    기본 3점의 자충수

 

개인를 통해 드러난 내 모습은 결핍을 매워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경험한 가난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욕지거리 난무하는 가정 환경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고 무식한 건 자랑이 아니라 생각했고 왜소하고 약한 체구를 다른 방법으로 만회해야 했다. 그것이 내 궁극의 자유를 위한 행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무수한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 내 자유는 항상 뒤로 밀려나게 된 것 같다. 결핍은 위대함으로 가는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위대함의 떡잎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혹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지겹게 싸워야 하는 아픔이다.

 

화투에서는 3점이 나야 게임의 진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비로소 라운드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기고 지고는 그 이후의 일인데 이를 일러 기본점수라 한다. 내 삶이 기본조차 되지 못한다는 자각은 게임에 참여하기를 바랐던 그 기본 3점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개인사를 통해 이리저리 나를 둘러보고 난 지금, 기본 3점의 악수가 내 자유를 희생하는 조건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선택에서 내 자유는 차선이 되었다. 중간은 해야 한다는 강박과 싸워대는 동안 그렇게 하면 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설 자리가 없었다. 기본 3점을 위한 이전투구는 내 약점을 만회하는 것일 뿐 그 나마의 강점을 다시 아래로 돌려세우는 꼴이 되었다. 이를 두고 자충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전의 삶이 이러 했을진대 이후의 삶이라고 이러지 마라는 법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준비되지 않고는 직장을 나갈 수 없다는 강박, 그리고 뒤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서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자유는 나에게 이제는 결핍은 결핍대로 놓아두고 나를 담보 잡는 따분한 인생은 그만두어라 하는데 말이다.

 

 

한 페이지 정의

 

입사 9년 차, 조금은 무뎌질 만도 한 근속연수, 입사 때부터 멋진 퇴사를 꿈꿔 왔으나 결국 현실에 대항하고 패배한 기록의 나이테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항상 약간의 피곤함이 동지처럼 어깨에 얹혀 있는 지구인,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가 통근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인 뼈 속까지 직장인이다. 부끄럽지 않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부재의 잠재태임을 그래서 모든 직장인의 잠재태는 자유인임을 찰떡같이 신봉한다. 이것은 내가 직장인으로 살아갈 임시성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그래서다. 바로 이 임시가 주는 물리적, 정신적 긴장감은 스스로 자기가 현실보다 강하다고 중얼거리게 한다. 현실극복증후군이라 할 만한 이 강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스스로 벼랑 끝으로 몰아 넣는 독종의 페르소나를 선사하기도 했다. 지구의 용마루를 오르겠다고 박박 우겨 밤마다 허파가 터질 때까지 달렸다. 회사에서는 업무보고를 끝까지 마친 후 화장실로 달려가 흐르는 코피를 무표정하게 닦았다. 그래야 비장하다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지긋지긋한 훈련에 자신을 구겨 넣는 냉혈한의 면모도 있는 것이다.

 

굳이 미화하자면 비 갠 뒤의 들풀냄새, 백양/물참/은사시/편백의 나무냄새를 좋아하고 높은 바위에나 산다는 솜다리(에델바이스)를 보기 위해 힘들게 수직의 바위를 꾸역꾸역 올라가는 알피니스트 정도쯤 될까.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생명의 연원에 대한 해답은 책에서 길어내려는 시도를 매번 해댄다. ‘왜 사냐?’ 는 질문은 바람에 쓸려갈 덧없는 것들이나 하는 것이고 저절로 태어나 비루한 생을 살아내는 70억의 각 사태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음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무지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른 뒤 수 많은 길에 대한 단상을 통해 인생의 길과 물리적인 길의 연계성, 그 겹쳐지는 성질 속에 일어나는 역사와 장삼이사들의 삶을 조악한 자신의 글로 안아 주고픈 어설픈 작가라고 지리멸렬하게 설명하는 어리석음까지 갖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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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12:50:28 *.37.122.77

권위와 밥벌이에 대한 저항이 느껴집니다.

저또한 비슷합니다. 출근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는 일상 또한.

 

면접여행때 보았던 털털한 인상과는 달리

비장한 각오로 고된 수행의 삶을 살고 있군요.

그 열정이 꽃 피는 순간이 오겠지요!

 

재용님과 산에 가면 재밌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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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13:44:21 *.118.21.179

재용과 언젠가는 안나푸르나에 오르리라...그치?  사부님도 함께...ㅋㅋ 팔팔이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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