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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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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9일 11시 18분 등록

맑고 바람 없는 밤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 갈 때,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지면이나 땅 위 물체 표면에 닿아서 잔 얼음으로 부옇게 엉긴 것이 서리다. 설악에 서리가 내렸다는 뉴스를 들은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난해 처음으로 함께했던 나들이에 우리는 일년에 한번 정도는 이렇게 바람나자고 의기투합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어제의 일도 잊어버리기 선수인 나는 그와의 여행이 언제쯤이었는지 가물거렸는데 그의 말이 지난해에도 이맘때쯤이었다고 한다. 이제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그날 우리의 길안내를 하고 있던 것은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다홍색의 감이었다. 까치밥으로 생각하기엔 숫자가 많았지만 사람이 먹을려고 남겨놓은 것은 아닌 듯 했다. 기구를 동반하여도 닿을 만한 위치는 아니다.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위치이다. 인간인 너희들은 이제 그만 욕심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화재 안내소건물 옆에 잘 고른 밭에는 청록의 김장배추가 탐스러웠었다. 그것을 사가지고 올까 해서 안내소 젊은 총각한테 물어봤었다. “밭에 심어져 있는 배추는 안 파나요?” 그는 마을 사람이 짓는 농사라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누구인지 알려줬으면 우리는 배추주인을 찾아 나섰으리라.

 

오늘 본 김장배추는 아직 어리다. 잎 단속도 해 놓지 않은 상태이다. 지역이 다르니 그것만 가지고 날짜를 가늠해 보기는 어렵겠지만 지난해에도 우리는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바람이 났었구나 싶다. 목요일, 나들이를 가기로 마음먹은 날이다. 출근을 하다 골목길에 떨어져 있던 낙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밤중에 걸려있던 푸른 달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듯이 깊어가는 가을을 방치할 수 없었다. 내일은 가야겠다. 어디로….모르겠다. 어디든지. 아직 가을이 놀고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그렇게 나선 길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를 이어주는 길. 죽령옛길, 문경새재. 문경의 토끼비리와 더불어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승길로 지정된 곳이며 옛길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길. 구룡령옛길이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수 백년 동안 민초들의 발자국이 모여 풀이 사라지고 길이 이어진 곳. 아홉마리 용이 백두대간을 휘감아 돌면서 약수로 목을 축였다는 뜻이 있는 이름이다. 양양 바닷가의 사람들은 소금, 간수, 고등어, 명태를 등에 지고 험준한 고개를 넘었고, 홍천 명개리 농민들은 산비탈에서 수확한 콩, , 녹두, 수수, 감자 등을 거두어 구룡령 주막에서 물건을 바꾸었다고 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710 고속버스를 타고 양양터미널에 내리니 10 조금 넘은 시각이다.

갈천리 산촌체험학교에서 길을 나설 요량으로 갈천리행 버스시간을 물으니 하루에 네 번 운행하는데 오전 운행은 끊겼다고 한다. 오후 느즈막에 두 번 더 있다고 한다.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가 어디 있느냐고 투덜거리니 친구가 이야기한다. 네가 더 이상하다. 그것도 알아보지 않고 길을 나섰느냐는 말이다. 택시로 가면 얼마나 걸리나 물으니 시간을 이야기해주지 않고 요금을 이야기한다. 오만원 정도 달라고 할거란다. 멀구나싶었는데 어쩌랴. 다른 방도가 없으니 택시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기중인 택시기사에게 물으니 다행히 요금은 미터기에서 나오는 대로 받는다고 하신다. 결과는 비슷했다. 우리를 태운 기사는 양양이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라면서 가이드를 열심히 해주신다. 길을 지나며 자신의 친구집도 알려주고 어린 시절 자취하던 이야기도 하며 아이들은 절대 자취시키면 안 된다고 힘을 주어 이야기하신다. 좀 시끄럽다 싶은 정도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시는 분과 함께 56번 국도를 따라 단풍구경을 하며 고개마루로 올라갔다. 처음에 갈려고 했던 산촌체험학교에서 시작하면 오르막길이고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고개마루 주막터에서 내려오는 길을 선택했다. 예전의 북적거리던 주막은 간데없고 지금은 도로변에 아주머니 두 분이 계신다. 두 분의 메뉴는 봄에 뜯은 나물(고사리, , 고비등) 감자전, 손수 누룩을 만들어서 담근 옥수수막걸리, 오뎅, 맥심모카골드커피이다.

 

일단 목을 축이고 산보를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한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라솔을 펴줄까 하시는데 괜챦다고 했다. 따뜻한 햇살을 파라솔로 가릴 수는 없지. 옥수수막걸리 한 병과 밑반찬을 내오신다. 플라스틱접시에는 고사리와 도토리묵이 담겨져 나왔다. 양념장과 함께. 친구와 나 그리고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신 기사님, 주인 아주머니 넷이서 노란 양은대접에 막걸리를 한잔씩 따라서 건배를 했다. 빈속에 알싸한 막걸리의 알코올이 식도를 따라 내려간다. 맛있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안주로 내어주신 도토리묵을 한입 베어 문 친구는 아주머니에게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도토리묵을 잘 쑤셨네요. 이렇게 야들야들 쫀득쫀득하게 쑤기 어려운데…서울아줌마는 어렵지만 이곳 아주머니는 누워서 떡 먹기 아닐까혼자 생각이다. 아주머니 왈…물을 잘 맞춰야 해” “식용유도 넣었나요?” “그럼.” 이건 전문가 수준의 대화이다. 나는 도토리묵을 쑤어보지 않았다. 먹어 보기만한 사람은 잠자코 먹기나 해야지…고사리도 맛이 좋다. “간장양념을 넣지 않았는데 이렇게 달달하게 볶아졌나요?” 친구가 또 이야기한다. “간장을 넣으면 고사리의 특유의 향이 없어져 맛이 없지.”  소금간만 했다고 하신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머니는 감자를 강판에 갈았다. 청양고추를 넣어줄까 물어보신다. 네…대답을 하고 고사리와 도토리묵 한 접시를 비웠다. 들기름에 두툼하게 지져 내어온 감자전과 가을햇살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통을 후딱 비워냈다. 오뎅 하나로 입가심을 하고 우리는 배낭을 둘러멘다. 아주머니에게얼마에요?” “만 삼천원.” 이건 너무하다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아주머니…너무 싸게 받으시는 것 아니예요? 이렇게 받으셔서 되시겠어요?” 세부항목을 물었다. 감자전 육 천원, 막걸리 육 천원, 오뎅2개에 천원 이렇다고 하신다. “그것도 비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하고 말씀하신다. 특히 막걸리가 비싸다고 한다고 했다. 아마 서울막걸리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이겠지. 누룩을 집에서 만들어서 막걸리를 만들다 보니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하신다. 너무 저렴하게 먹은 탓에 미안한 마음에 들어 고사리와 고비를 샀다. 아주머니는 4월과 5월에는 산나물을 뜯고, 10월말까지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신다고 했다. 추운 곳이라 11월 만 되어도 길에서 장사를 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 우리가 갈려고 하는 구룡령길도 111일부터는 입산금지이다.

 

배낭을 메고 도로를 건너 산으로 들어섰다. 초입부터 계단이다. 방금 먹은 감자전과 막걸리 덕인가보다. 계단을 몇 개 오르지 않았는데 숨이 차다. 10분쯤 오르니 능선정상이 나온다. 양양쪽으로 길을 잡는다. 정상에는 겨울이다. 나무들이 모두 옷을 벗었다. 나목들인데도 빼곡하다.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생각을 한다. 땀이 나지 않은 머리카락 속으로 찬바람이 파고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무래도 감기가 오겠는걸 싶은 마음이지만, 햇살과 바람을 모자로 가리기는 싫었다. 감기가 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랗고 빨간 단풍잎들이 날린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며 지나간다. 이미 떨어진 낙옆들은 바닥에 수북이 누웠다. 과연 고불고불하구나 싶다. 높은 고개라 바로 오르기가 어려워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렇게 닿았겠지. 길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만들어진다. 평일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걸어갈 뿐이다. 낙엽만이 소리를 낸다. 날리며 밟히며 그렇게 자신들의 소리를 내고 있다.

 

친구남편은 젊은 시절 잘 나가던 사업체의 CEO이다. 이제는 현상유지를 하기 힘들다고 했다. 지난해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돈벌이를 이유로 사회에 나와 본 적이 없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가 지난해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때는 백화점에서 하는 아르바이트였는데 지금은 음식점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친구는 나와 동갑이다. 대한민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대명사격이다. 비슷한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도 비슷하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가장의 사업이 기울고 있는지 여러 해 째라고 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 남편이다. 한달 한달 적자를 내면서도 그 사업을 접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는 남편에게 이야기했다고 했다. 살림살이의 규모를 줄이고 사업도 줄이자고 말이다. 정작 본인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친구의 행동이다. 그는 사회로 나왔다. 가리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한 달 생활비 150만원의 삶을 살겠노라고 이야기한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는 학원을 끊었다고 했다. 하루 열 시간 서서 일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 친구를 보며 대견하다 싶다.

 

아직 그녀의 남편은 오륜기를 달고 있는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 주말이면 골프도 치러 나간다.

아마 견디다 견디다 언제쯤 손을 들지 모르겠다. 왜 내리막길에 속도를 내면 안 되는지 모르는 것일까. 내리막은 가만히만 있어도 가속도가 붙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와야 한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은 쉬운 길이다. 헐떡거리면서 정상만을 바라보고 걷지 않아도 되는 길. 그 길이 내리막길인데사람들은 자신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능력은 아니다. 능력은 개인의 노력과 이들 노력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지도자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 남자는 좋은 지도자를 곁에 두고도 아직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일까. 두 사람의 간극이 좁아지길 기도한다.

 

늦가을의 해는 짧다.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오전의 몸살기가 도진다. 친구가 약 한 봉지를 내민다. 괜챦다고 했더니 그 친구 왈…”감기기운 있을 때 이것 먹으면 괜챦아져나는 약봉지를 받아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다시 잠을 청하니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친구의 손이 내 손을 가져가서 꼭 잡아준다.

 

따뜻한데 거친 손이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몸이 개운해졌다.

IP *.217.2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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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30 14:27:25 *.114.49.161

친구분 멋지십니다.

그 길을 차로 휭 가셨으려니 했는데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타셨군요.

가을 가기 전에 어디든 가고 싶어지네요. 이 글 읽으니까요.

누군가와 같이 산에 가는 이야기---> 사랑 이야기--> 돈 이야기

이걸 다하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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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30 23:38:55 *.36.15.97
읽으면서 내내 배가 고팠음... 그리고 세상의 많은 이들이 작은 영웅이구나 ㅡ 라고 깨달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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