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iw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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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반주로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섶의 벤치에 누웠다. 팔베개를 하고 쪽빛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 하늘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수 백 년 전에도, 수 천년 전에도 저렇게 있었겠지. 하늘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오고 갔을 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사라져 갔을 것이다.
누이가 어버이 날이라 어머니와 점심을 하겠다며 집에 들렀다. 누이는 나보다 두 살 위다. 상고 출신인 누이는 결혼 후, 애들이 커가면서 생활이 궁해지자 보험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끈기가 없는 누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곧 그만 두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15 여 년 동안 한차례 회사를 옮긴 것 말고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새로운 고객과 보험계약 건이라도 생기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달려간다. 직업이 직업인 만큼 초등학교 동창회도 빠지지 않는다. 내 동창들 소식을 나보다 더 잘 안다. 남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져 말 한마디 못했던 누이였다. 그런 누이가 어떻게 저렇게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여성으로 변신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몇 년 전엔 50이 다 되어 운전 면허증을 딴다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타고난 ‘길 치’ 인데다 운동신경도 둔하고 덤벙거리는 경향도 있어 가족이 모두 만류했다. 하지만 누이는 기어코 운전 면허증을 손에 쥐고는 득의 양양했고, 바로 중고차를 사서 도로로 나섰다. 누이는 몇 건의 주차위반 딱지 말고는 큰 사고 없이 운전하고 있다. 한 번 누이 차를 탔다가 누이의 예측을 불허하는 곡예운전(?)으로 호되게 홍역(?)을 치른 어머니는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누이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찾았다. 아니, 내가 모르는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갔다. 생활고로 인한 절실함이, 아니면 수동적인 삶의 지루함이 누이를 변화시켰는지 모르지만 누이의 '살아있는' 모습이 좋다. 육만 원 넘는 점심값을 흔쾌히 내는 누이가 오늘따라 웬 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누이가 한마디 던졌다. “ 그래 이제 앞으로 뭘 할 건데?” 어머니도 궁금한 지 내 입을 쳐다보았다. “ 그냥 이것 저것 하면서 책도 한 권 내 볼 까 하고 “ 라고 둘러대었다.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셨다. 그러시곤 “ 근데 그거 오래 걸리는 거 아녀 “ 하고는 이내 “ 그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달리기도 다시 하고, 어디 놀러 다니기도 하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찰스 핸디는 <포트폴리오 인생>에서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기 전에 죽을 까봐 두렵다고 했다. 삶을 바꾸려면 새로운 사다리의 바닥에서 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두 번째 커브를 시작하려면 종착지까지 가지 말고 중도에 길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나는 지금 세 번째 커브를 시작했으니. 종착지까지 갔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사다리를 탄 것이다. 그것도 40대 후반의 적잖은 나이에. 그래도 손쓸 수 없는 더 늦은 나이에 막다른 골목에 서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위안해 본다.
신화학자 조셉 켐밸은 5년의 긴 방랑 시간에 자신을 호되게 단련시켰다. 그는 <신화와 인생>에서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 까” 라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 스스로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물라.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은 받아 들이고,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그는 5년간 침잠에 들어가 독서에 몰입했다. 그 견딤의 세월을 통과하고 이후 30년 넘게 비교신화학 분야에서 자신만의 꽃을 활짝 피웠다. 늦었지만 그처럼 방랑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사람을 만나고 싶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학생이거나 직장인이었다. 이제 뒤늦게 방랑의 시간이 주어진 것을 기회로 삼으라는 신의 뜻이라고 받고 싶다.
길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실직은 대중 안에 있는 창의적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했다. 물론 재능이 있고 전문적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다. 일례로 역사학의 시조, 투키디데스 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은 그들이 현직에서 추방또는 낙향 후 저술되었음을 상기 시켰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앞서 걸었던 사람들을 흉내 내다 보면 어느새 평범함을 넘어선 내 모습이 거기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문자 메시지가 왔다. 둘째 아들로부터다. “ 아빠 제가 항상 존경하고 있는 거 아시죠? 사랑해요” 라고 씌어 있었다. 잠시 후 부산에 있는 큰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부지,” 하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마워, 사랑해”. 어버이 날에 처음 받아보는 두 아들의 메시지요 전화였다. (이 녀석들이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행복이 몰려왔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떠나야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한테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내 삶을 위해서. 남겨진 긴 중년을 나답게 살기 위해 내가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삶의 무게는 어제와 다르지 않건만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 발길은 가볍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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