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iw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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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신화 이야기>
작년 10월
어느 날 토요일 오후였다. 종로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주카페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었다. 점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고, 점쟁이의 말에 따라 사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몇 번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마도 나이 40을 넘은 후, 내 운명이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사주팔자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들어갈 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생 처음으로 사주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내 사주를 본 점쟁이는 바로 직업운부터 예기했다. 내년(2013년)에는
다니던 회사를 떠나 업종이 비슷한 다른 해운 회사에서 일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주 힘든 시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 23년의 직장생활 운이 다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 늦기 전에 인생 2막 준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장 몇 개월 후에 내 직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여자 운, 자식 운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고 했지만 당장 생업에 변화가 있다고 하니 다른 운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개월 후인 12월 말, X-Mas를 며칠 앞두고 나는 회사로부터 아주 특별한 X-Mas 선물을
받았다. 회사가 어렵고 고참 부장이니 그만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다음날. 불과 하루 만에 내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운명에 망연자실해야 했다. 당시 재수생과 고등학생 두 아들을 둔 가장에겐 감당하기
힘든 형벌이었다.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바로 수용하고
그날 바로 짐을 싸서 나왔다. 놀라운 것은 2개월 전에 점쟁이가
한 말이 기가 막히게 맞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주팔자를 피할 수 없단 말 인가? 운명의 장난인지 6개월도 안돼 회사의 경영진은 물러나고 회사는 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점쟁이가 말한대로 해운 회사를 가야만 하는 것인가? 회사를 나온 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을
해보았다. 확실한 것은 퇴직 전에 몸담았던 해운업종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더 이상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업무 외에 ‘관계’를 중시한 사내정치가 구역질 나도록 싫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한적한 전원생활을 하면서 텃밭을 가꾸면서 책 속에 파묻혀 지낼까 하는 사치스럽고 낭만적인 생각도 했다.
고민을 한 끝에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인생 후반부를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 아름다운 산하, 계절에 따라 국토를 울긋불긋하게 수놓는 나무와 꽃, 그 속에서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온갖 미물들의 경이로운 소리와 몸짓을 글로 쓰고 싶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 진다고 했던가. 당시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고 있던 내게 한명석 선생님이 나를 ‘구본형
변화 경영연구소’ (변경연)로 안내를 해주었다. 2개월의 힘든 연구원 선발 과정을 거쳐
2013년 4월, 나는
변경연 연구원이 되었다. 매주 북 리뷰를 하고 칼럼을 쓰면서 나는 말보다는 행동과 실천의 삶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깊은 사색과
글쓰기를 수반하지 않는 독서는 지적인 허영심이나 지적 유희에 불과해 보였다.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목적 없는 성실함과 부지런 함이 미덕일 수 없다는 말은 그 대상이 나를 두고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또한 정열과 흥분이 있는 건강한 욕망을 가지라고 하는 말은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자기혁명'을 선언했다. 3년간
매일 9시간 독서와 글쓰기를 하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조셉켐벨이
우즈스탁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5년간 독서에 몰입한 것과 구본형의 변화를 통한 자기경영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지치고 무기력해질 때, 나는 조셉켐벨의 말을
잊지 않는다.
“ 방랑과
침묵의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이와 비슷한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라고만 말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관심사여야 한다. 진짜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말로
그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새벽 2시간은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한다. 이 시간만큼은 동서양 고전을 탐독한다. 이미 2000년 전에 먼저 삶을 살다간 옛 사람들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탐욕과 어리석음의 결과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한 쪽 한쪽 넘겨질
때마다 마음과 생각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은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내 쉼터다. 300원의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도서관 앞 공원의 나무를 관망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아침의 공기가 너무 좋다. 행복한 순간이다.
3개월 남짓한 조경실무 교육은 내게 또 다른 삶의 체험이었다.
제도와 CAD를 배우고 보도블럭 깔고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는 실습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 변하지 않는 진리! 보도블럭깔기 시공실기 시험 때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벽돌을 깔고 있었는데
지면과의 높이조절에 애를 먹고 있었다. 감독관이 내 어설픈 손놀림이 안쓰러운지 약간의 힌트를 알려주었다. 길을 걷다가 정교하게 깔린 보도블럭을 보면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곡선처리를 빈틈없이 해놓았을까? 보도의 모양이 원형이건 팔각형인건 기가 막히게 돌을 쪼아 만들어
낸다. 높낮이의 오차가 거의 없고 평탄하고 일정하다. 다듬질을
하고 벽돌을 올린 후, 나무 망치로 몇 번 두드리면 된다. 인간의
능력이 경이롭다.
몇 개월 연습을 게을리 했던 마라톤도 다시
불씨를 살렸다. 거의 매일 뛰면서 금년 10월에 있을춘천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다. 달리기는 내 삶의 일부이다. 달리면서
‘나’란 존재는 없어지고 허공을 달리는 듯한 희열을 느낀다. 그 희열은 마의 구간인 30km 지점 이후부터 수반되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다섯 차례의 완주를 끝낸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퇴직후의 내 생활은 내핍 그 자체다. 최대한 씀씀이를 줄이고 줄인다.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방법중의 하나다.
2013년 49살에 시작한 제 2의 인생, 정해진 운명을 따랐다면 나는 지금 하루 종일 원치 않은
일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인생 후반부를 시작하는 중년의 사람들한테 삶의 증거가 되고 싶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성취해 나갈 예정이다. 그 성취의 과정을 활자화된 책으로 남기고 싶다. 운명의 여신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한테 문을 열어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의 새로운 역사, 신화를 계속 써 내려 갈 것이다. (2013.06.24)
2. 운명을 사랑한 오이디푸스 이야기
그리스 신화에는 수많은 신들과 영웅들이 등장한다. 온갖 장애와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영웅의 이야기도 좋지만 나는 불운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신화에 눈길이 간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위기에 직면하면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임무 완수 후 전리품을 안고 금의 환향한다. 반면에 오이디푸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로부터 버려진다. 신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한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운명을 비껴가지 못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진실을 알게 되자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 또한 자신을 저주하며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테베에서 추방된 오이디푸스는 딸인 안티고네에 의지한 채 여기 저기 떠돌다 죽기 전에 지독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생을 마감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신탁 때문에 스스로 코린토스 왕자 신분을 버리고 길을 떠난 것은 운명을 벗어나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적극적인 노력이었다. 코린토스 왕을 친부로 알고 있었기에 도중에 친부인 줄 모르고 노인을 죽인 일 또한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조력자 도움 없이 목숨을 담보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것은 그의 지혜와 용기였다.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 되어 왕비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출세요 성공적인 인생이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면서 오이디푸스는 주어진 운명에 부모와 신들을 원망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몰랐던 친부의 살해, 근친상간에 대해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러면서 “내 죄는 나 말고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 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무슨 짓을 해도 신이 쳐놓은 운명의 그물망에 걸려들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 가혹한 운명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오이디푸스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 하는 것 . 그리고 결과에 대해 그것이 어떤 운명이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내 운명을 사랑하기로 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운명의 방향이 조금은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