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書元
- 조회 수 1938
- 댓글 수 3
- 추천 수 0
7살 유치원 꼬마가 떨어진 벚꽃 잎을 바라보며 동시 하나를 짓는다.
봄비가 내리네.
꽃잎이 떨어지네.
해님이 비추어주네.
그게 봄…….
그게 봄이라네…….
아이가 묻는다.
“아빠, 저게 뭐야.”
아빠는 자신의 아이에게 친절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다.
“아빠, 저건 또 뭐야.”
그러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이 연달아 이어지자 그는 점점 지쳐간다. ‘재는 무어저리 궁금한 게 많은 걸까?’ 그러다 결국 인내심을 참지 못하고 버럭 한마디를 내지른다.
“이제 아빠 피곤하니까 네이버에게 물어봐.”
“???”
묻는다는 것. 질문한다는 것. 의문을 가진다는 것.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출발점이자 성숙된 인격체로써의 나아감을 뜻하는 지표로써의 자발적 행위이다. 그래서인가. 오락의 한 장르인 영화에서도 이 물음은 시나리오상 중요 부분을 담당한다. 영화 <레미제라블> 장발장 역을 연기한 배우 휴 잭맨은 대사 중에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라고 부르짖으며 절규를 하고, <올드보이> 영화에서 15년간 감금되어 있던 오대수(최민식 분)는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누구냐, 넌"
우리는 근원적인 심오한 존재의 물음에서부터 시답잖은 농담까지 하루를 ?과 !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다른 동물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같은 의문부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그 물음을 통해 그들은 사고의 열림과 확장을 통한 문명의 꽃을 피워내었다. 왜 그렇지? 무엇 때문일까? 이 같은 질문은 세상과 자신의 틀이 고착화된 어른보다는 아직은 원형의 공간에 채색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에게 가장 자연스럽다. 아이를 아이답게 하는 것. 그것은 세상에 대한 첫 외침 즉, 물음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도 부모 혹은 주위환경에서 되돌아오는 세속적인 답변들을 통해 묻는다는 것을 멈출 때, 아이로써의 자연스런 순수성에의 탈피는 끝이 나고 어른으로의 귀로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 행위를 역사상 가장 많이 활용한 민족은 유태인이다. 그들은 가정과 학교 등의 교육현장에서 이 물음을 적극 장려하고 고취한다.
“마따호쉐프?”
너의 생각은 무엇이니? 너의 의견이 무엇이니? 이 질문하나로 아이는 처녀지를 접하게 되고 미지의 세상의 첫발자국을 스스로 남긴다. 그 결과물은 노벨상의 수상경력들로 증명이 된다. 이런 조류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암기와 지식습득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었던 학교교육 현장 및 가정에서도 이의 중요성에 힘입어 질문 나아가 파생되는 대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기에. SK 기업의 대중매체를 통한 최근 광고의 문구가 이를 대변한다.
“물음이 있는 곳에 이노베이션이 있다.”
자원 없으면 자원 강국 안돼? 라는 질문에 광구와 해외 자원개발을한 실적 등을 내세우며, 물음이 곧 창조이고 물음이 곧 미래의 산물을 낳는 것을 자사의 도전적인 이미지와 결합을 시킨 것이다. 물음의 꼬리를 물다보면 창조라는 화두가 이어진다는 이야기인데 다음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퇴근길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우산을 펴든다. 예전에는 왕 이하 상류층만이 사용하였다는 우산. 하늘에서 내린 비를 우산으로 받는 것은 불경이므로 서민들의 사용은 당시 금지되었었다지. 여하튼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지하철 정거장으로 종종 걸음을 하다 보니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우산 형태가 다 비슷해 보인다. 거기에다 짖궃은 날씨만큼이나 모두 칙칙한 느낌. 그럴 때 어떤 이가 의문을 가졌다.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에도 맑고 푸른 하늘을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파란 하늘이 보이는 우산. 그 의문은 개발로 이어졌고 결국 디자인계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헝가리 출신 미국인 티보칼맨에 의해 1992년 하늘우산이란 브랜드로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다른 이는 그처럼 그런 우산을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이를 상업적인 상징물로 응용한 곳도 있다. 마카오 베네치아 호텔이 그 경우이다. 세계적인 카지노장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독특한 것은 실내 어딜 가나 외부 날씨에 상관없이 천정이 푸른 하늘로 뒤덮여있다는 것이다. 실크 스크린으로 인위적 조성을 한 것인데 아마도 도박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의 몰입도를 고려(?)한 결과물이리라.
아직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는 어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물과 현실을 다르게 비틀어보는 시각이 있는데 그것은 일상에서의 작은 용기들로 가능하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인 박웅현씨는 회사를 옮기고 나서 후배들이 기념패에 새겨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의미 깊게 간직한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그렇다. 익숙함에 젖어있는 기존 관행과 습관에서의 탈피가 아이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은 출발점인 것이다.
아이처럼 바라보아라.
아이가 되어라.
거기에 또 다른 오름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소심한 직장인의 한사람인 L씨. 요새 무엇 하나 시원하게 풀리는 게 없다. 거래처와 회사 상사는 물론 아내까지 집에만 들어가면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거기다 오늘은 지방 출장이 있어 전날 과음에도 불구하고 천근만근 눈꺼풀을 겨우 열어 헐레벌떡 첫기차를 탄다. 날씨는 왜이리 더운지 벌써부터 짜증이 밀려오고 못다잔 잠을 청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
‘어쩐다. 아직 거래처에 가기는 이르고 찻집에 들러 차나 한잔 마실까.’
광장을 가로질러 걷다보니 문득 중앙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시계가 눈에 박히며 분침 하나하나와 초침 소리가 가슴에 굉음을 낸다.
‘왜 이러지. 아직 갱년기도 아닌데.’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이상하다. 이어령 씨의 <둥지 속의 날개> 주인공 독고운의 그날 아침처럼.
바닷가로 향하였다. 갈곳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쪽이 생각났을 뿐이다. 학교 때부터 범생이라 불리던 그였기에 이 같은 일탈은 본인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다. 여자들 생리 때가 아마도 이러하겠지. 6월의 여름바다. 두소녀가 깔깔거리며 해변에서 물장구질을 한다.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그 시절 청춘의 부러움. 저리도 좋을까. 사진을 찍어달라고 손을 내민다. 참 자유롭다. 찰칵찰칵. 그녀들을 닮은 듯 카메라 셔터소리가 풋사과의 아삭함을 베어문다. 바닷바람. 안개낀 백사장. 핸드폰으로 사진과 밀려오는 바다를 찍는다. 바다가 보이는 3층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여간해서는 혼자 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그.
오래전 그때가 생각난다. 비가 내리는 자정시간 부산역에 도착. 여관방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였으나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매출걱정 등으로 뒤숭숭. 아리랑 호텔 골목쪽 포장마차 촌으로 행했다. “아줌마 소주 한 병하고 우동 한 그릇 주세요.“ 호기 있게 잔에 소주 한잔을 자작한다. 그리고 원샷. 쓰다. 우동 면가락과 뜨거운 국물을 안주삼아 들이키니 속이 짠하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니 어찌 보면 안쓰럽다. 뭐하는 짓이람. 비를 맞고 타지에서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긴긴밤 부여잡고 혼자 소주한잔 하고 있으니. 서글퍼진다. 그런데 내일 매출 협상은 어떻게 할까나.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디어고 뭐고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한잔, 또 한잔. 젠장, 아직 반병이나 남았는데 마시질 못하겠다. 자리 박차고 여관방에서 양한마리 양두마리를 센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직원에게 와플 한조각과 따끈한 고구마 라떼 한잔을 주문했다. 나이프로 포크로 한 조각을 집어서 시식하니 달콤한 맛이 쓰린 위장을 에두른다. 스피커에서는 최신 유행음악이 쏟아진다. 행복, 평안함, 자유, 해방. 여하튼 좋다. 고구마 라떼 맛. 노란색깔이 고구마 원래 그놈을 쏙 빼닮았다. 따듯함, 온기가 감싼다. 좋다는 탄성이 아이처럼 절로 나온다.
현재 이 시간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아니 무엇을 하고 있나. 한낮 땡땡이의 풍경. 중요한건 처음으로 찻집에 혼자 앉아 차를 마신다는 아니, 바다와 함께 있다는 사실.
아무 할 것 없음이 아닌
아무 할 것을 하지 않음이
아무 할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닌
또 다른 할 것을 분출하는
그것이 일상의 일탈 또는 그것이 할 것의 생성.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