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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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나의 힘
용산역 storyway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발신인에 ‘엄마’라고 뜨는 걸 보니 전화기를 가지고 나가셨다. 남의 집 품일을 가셨나? 왜 이리 전화가 뜸하냐, 잘 지내냐는 전화다. 전화를 언제 했었지? 생각도 안난다. 출근중이라 했더니 엄마는 대뜸 밥은 해 놓고 나가냐고 묻는다. 밥을 먹고 가냐는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 전에도 받은 적 있다. 그 날 아침 나는 신도림에서 부평까지만 가는 직통을 갈아 타고 내려서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위에서 신물이 한 바가지 나와 있는 상태다. 엄마는 그 날도 똑 같은 대사로 물었다. 밥은 해 놓고 가냐? 갸 좀 잘 해 먹이거라. 그날도 오늘처럼 밥을 못해놓고 나왔을 거다. 학기말로 가면서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목이 부어 있다. 편두통에 따꼼거린다. 안 그래도 울거나 싸울 판이었는데 뺨 때려주는 사람이 생긴 거였다. ‘나는 걱정 안돼요?’ 보글보글 끓던 냄비뚜껑이 벌러덩 열리더니 눈으로 넘친다. 그날과 상황이 똑같다. 대신 ‘갸’가 아들에서 사위로 바뀌어 있다. 집밥을 먹이거라, 그래서 다음에 얼굴을 더 뽀얗게 만들어서 오너라, 그게 니 성적표다, 맛집 찾아다니는 게 취미인 사람 굶을 일 없다, 시간만 많이 걸리는 집밥 안 반긴다는데도 밖에서 사 먹는 음식 맨 조미료 덩어리고 암만 싸고 맛있다 해도 살 안된다, 니 손으로 해 먹여라 주문한다.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겉으로는 ‘네’ 하고 만다. 아침에 108배를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 20분의 의례가 혈압강하제나 당뇨약 같다. 그 순간 또 다른 문자가 도착한다. 아이 하나가 오늘 집에서 쉬겠다는 문자다. 그 아이는 어제 힘들었다. 나는 그 아이를 찾으러 두 번 전력 질주를 했었고, 잃어버리지 않고 울타리를 벗어나기 전에 찾았다. 걱정의 전화를 추궁으로 읽었다. 한숨을 쉰다. 자책이 된다. 주춤하던 게이지가 다시 솟구친다. 정수리를 뚫을라 한다. 제기랄랄라.
나는 분노를 두려워한다. 내 안에서 밖으로 무단방류 되는 것도 두렵고, 밖에서 나를 향해 화염방사기로 분사되는 분노도 무서워한다. 불은 옮겨 붙고, 폭발력이 있다. 분노를 드러내고 난 다음에는 그걸 수습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솔직하게 '화가 났다'고 말하기 보담 여건 핑계를 댈 때가 많다. 요즘 이건 '화'라고 느껴지는 것을 만나는 새벽, 저녁이 자주 생긴다. 나는 밤길 운전하는 자동차처럼 시야가 고정된다. 눈을 맞추려는 사람의 눈길을 헤드라이트 각도가 슬며시 비껴간다.
내가 땅이라면 어떤 곳일까 생각할 때 화산 지대 물가라고 지도를 읽었다. 내 안에 분노의 매장량이 제법 된다. 그 땅은 이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고 준비중이다. 그렇다. 나는 화산을 가졌다. 사화산 아니다. 활화산치고는 졸렬하여 불을 뿜기보담은 연기와 지진으로 으르렁거린다. 내 속에 갇힌 분노는 육식성이다. 생살을 뜯고 찢고 씹고 싶어한다. 가장 가까이의 사람에게 주로 표현된다. 가족이고, 나 자신이다. 분노, 내 안의 맹수와 잘 지내는 법을 나는 배우고 싶다. 맹수 조련사가 되고싶다. 대가리나 팔다리를 댕강 뜯기지 않고, 물리거나 쫒겨 다니지 않으면서 같이 잘 지내고 싶다. 책들에 자신의 분노 조련법을 올려놓은 이들의 글을 채록한다. 그들은 나와 같은 과제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구본형은 <신화 읽는 시간>에서 다혈질에 속한다 커밍아웃하면서 분노를 금하는 8계를 정해 스스로 연습하는 걸 분노경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놈저놈에게서 이것저것을 배워왔단다. 니체에게는 분노만큼 남성을 소모시키는 것이 없다는 걸, 집안일 하면서는 국을 끓을 때 눌러주면 끓어넘치게 되니까 손짓, 눈짓, 혀를 잘못 놀리면 상대를 끓어넘치게 한다는 걸, 시인 오마르 워싱턴에게서는 화를 내되 잔인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아리스토텔레스 영감에게서는 다섯 가지의 적절함을(적절한 대상, 적절한 대?, 적절한 정도, 적절한 목적, 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내고 있는가?), 산은 양은냄비 빵구낸다는 걸 생각한다. 연꽃을 피우는 양수리 연못에게서 배워온 것은 분노는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정화의 대상이라는 거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연꽃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일리아드>의 타고난 무사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솜씨가 절묘한 그의 책을 읽다가, 나는 강물을 보면서 양수리에 전철 타고 가서 수종사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어졌다. 유연한 강물의 곡선을 보면 마음이 둥그러지려나?
베트남 스님 틱낙한은 화라는 책을 내었다. 분노도 한 권의 책꺼리가 되는가? 그 책을 가지고는 있는데 읽지는 않았다. 대신 학교 아이들과 도서관에 갔다가 틱낫한 스님이 쓰고 문태준 시인이 번역한 화에 대한 그림책을 읽었다. 블록을 가지고 놀던 아이는 저녁을 먹으라는 할아버지 때문에 탑이 무너져서 화가 났다. 할아버지는 네 분노와 둘이서 앉아 있으라며 빈 방에 아이를 두고 나가버린다. 아이는 화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자 화는 작아졌다. 우리 아이들은 그 그림책을 지루해했다. 내가 이 그림책이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읽었다.
김형경은 심리에세이 <사람풍경>에서 ‘대상 상실의 감정, 혹은 돌아오지 않는 사랑’으로 분노를 읽는다. 김형경씨의 책은 완전히 수험생 써브노트를 읽는 느낌으로 읽게 된다. 그녀의 책을 꺼내 밑줄 친 것을 읽곤 한다. 분노는 사랑의 뒷면이어서 애착을 품은 대상을 잃었을 때나, 애착의 감정을 박탈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며 간단하게 말하면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고 전문 용어로는 ‘대상 상실의 감정’이란다. 그녀는 거절당한 사랑에 대한 분노와 자기애적 분노를 구분한다. 자기애적 분노는 ‘저마다 자신이 소중하고 특별하고 선하고 정당한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자기 이미지가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를 말한다. 신경증적 분노는 당사자의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분노가 외부의 사소한 일에 자극받아 터져나오는 형태의 감정이다. 무의식에 억압된 분노는 아기 때 형성된 것이며 특히 욕구를 좌절시키는 엄마를 향해 품는 감정이다. ‘화는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아기다. 그윽한 마음으로 화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틱낫한 스님은 신경증적 분노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분노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표출되어 친밀한 관계를 그르치고 생을 퇴행시키는 원인이 된다. 분노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자살로 나타난다. 사랑이 생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듯 사랑의 뒷면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 분석치료가 역점을 두는 대목도 바로 분노를 다루는 법이다. 분노가 자신의 감정의 일부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분노의 근원을 직면하고 분노를 자신의 의식으로 통합시켜 체험하도록 한다. 그녀는 분석치료를 통해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화를 내는 것은 분노를 느낄 때 재빨리 그 감정의 근원을 알아차리고 화가 났다는 사실을 적대감 없이 상대에게 표현하고 그런 다음에 그 감정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 (김형경 <사람풍경> 63~65 부분 인용) 그녀의 책은 원인을 짐작만 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좀 유식해진 느낌이 들어 자못 흐뭇해진다.
현경은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분노를 다루는 걸 여성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한과 살을 풀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권한다. '한'은 '화병'과 함께 분노의 한국형이다. 그녀는 가부장제 안에서 오랫동안 눌려진 분노가 안으로 향해 우울증이 되거나 중독이나 질병이 되기 전에 건강하게 분노를 해결하도록 권한다. 한은 여성만의 감정이라기 보담은 ‘돈 없고 빽 없고 배고프고 서러운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 정서’라고 보았고, 한은 계속되는 부정의, 부당함, 억압, 불안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정당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공적인 채널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 절망, 슬픔, 답답함 등의 총체적인 표현이라는 민중신학자 현영학의 말을 인용한다. 그녀는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절대로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 둘째 분노와 한은 극복될 수만 있다면 삶의 자산이 될 수 있다. 셋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말처럼 분노의 극복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시회적인, 또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대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윤리학자 베버리 해리슨(Bevery Harrison)은 사랑의 일을 하기 위한 분노의 힘(the power of the work of love)이라는 멋진 제목의 논문에서 분노야 말로 정의를 이루는 혁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노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적 가치로 보았는데, 이 분노를 선을 이루기 위해 쓰면 그것은 ‘용기’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어쨎든 그녀는 분노와 거리두기, 비폭력적 화내기, 상담치료, 기도와 명상을 통한 영성치료, 분노의 대상과 맞대면 하기, 만트라 등을 권하고 있다. 게다가 뒤에는 분노 척결에 직방인 음악, 영화, 책을 권한다. 나는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은 여자가 하늘에 화내는 방식으로 장로님을 꼬여 환한 하늘 아래 포개누운 와중에 나왔던 김추자 ‘거짓말’이야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노래로도 화를 내는 건 욕을 섞는 랩들이 많이 보여준다. 들으면 속이 시원하다가, 분노가 사그라든 다음에 틀면 새삼스럽고 남사스럽다. 나는 이 중에 비폭력적 화내기 방법 하나 애용한다. 입에서 개구리와 두꺼비, 뻘흙, 가시달린 덤불을 토해내는 사람들처럼 뽀족하고 날카로운 말들을 모닝페이지에 쏟아내고 나면 실제 그 감정과 나 사이의 틈이 크레바스화된다. '만트라'는 내가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도저히 안될 때, 속에서 화는 잔뜩 올라와 있는데, 감정노동을 곁들여 일을 해야할 때 속으로 천수경을 외운다. 다 외우고 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인화물질이 폭탄제거반의 재빠른 손놀림으로 인해 덜 위험해진다.
전철 역에 앉아 아까 먹던 김밥을 마저 깨물어 먹는다. 막 직통 한 대를 놓친 참이다. 나는 보글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물을 눈으로 눌러 넣으면서 이야기를 생각한다. 분노 아래에는 분명 눈물이 매장되어 있거나 화는 어떨 때 힘듬이나 눈물의 다른 표현 중 하나일 지 모른다.
먼저 떠올린 이야기는 아침마다 바오밥나무를 잘라내고 화산을 청소했던 소년이다. 그 소년이 그 별을 떠나올 때 여러 개의 별을 지나왔지. 점등인, 수학자...한 사람이 우주라고 하니 나는 그게 한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특징을 인격화해 놓은 상징이라고 읽었다. 소년의 별들을 보면서 나의 우주와 그 우주의 신민들을 생각한다. 아마 팔딱거리는 장비 한 사람 있을 거다. 그는 종종 나를 점령한다. 암튼 나도 그 소년처럼 날마다 내 별을 터트리지 않도록 바오밥나무를 잘라내고 화산을 청소하면 된다. 분노를 관리하는 좋은 방법인 듯 하다. 누구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분노 또는 스트레스 보존의 법칙이 있어서 어딘가에서는 터지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 분노를 창조적이고,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배출하는 건 중요하다.
두번째는 분노를 동력 삼아 일을 했던 헤파이스투스다. 그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남신인데 대장간의 신이다. 그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제일 가는 추남이었다. 제일 못생긴 남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연분이 되어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의 아내 아프로디테는 수많은 남신과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그가 화산 아래 대장간으로 일하러 간 사이에 그의 침실로 애인들을 불러다 즐겼다. 그녀는 아레스, 헤르메스와는 오래고 안정된 애인관계를 유지했고 아이들도 여럿 두었다. 헤파이스투스는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둔 죄로 오쟁이진 남편이었다. 그는 다리를 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버림을 받은 상처가 마음에 있었다. 그런데 헤파이스투스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지 않았다. 살림을 탕탕 뽀샤버리고 다 치워버린다고 강짜를 놓고는 실제로는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고 사랑에 빠졌던 제우스 대신 상대 여자와 아이들에게만 복수를 하러 바삐 다녔던 헤라와도 해법이 달랐다. 그는 분노를 동력 삼아 아름답고 쓸모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어차피 분노의 매장량이 좀 되는 산맥을 지녔으면 바람센 지역의 조력발전소나 높낮이 센 지역의 수력발전소의 원리를 이용한 시설을 하나 건설해도 좋겠다. 헤파이스투스의 해법이 마음에 든다.
세번째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협곡을 지나는 오디세우스다. 타고난 모험가인 그는 마음 속 가장 큰 두려움, 욕망을 건드려, 뱃사람을 물귀신이 되게 하는 요정 세이렌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을 돛대에 묶고, 노를 젓는 사람들은 귀를 막은 채 저어가게 했다. 그는 그 노래를 들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자신을 묶는 밧줄과, 귀를 막은 채 노를 젓는 이들 덕분에 살아남았고, 그의 배와 선원들을 건사할 수 있었다. 모든 종류의 감정은 세이렌의 노래일 지 모른다. 감정의 이름과 얼굴은 여러가지 일 수 있겠다. 출렁거리고, 내가 분노에 휩싸이더라도, 지켜보면서, 견디면서 할 일을 해서 자기를 사상하지 않고 지날 수 있다면 좋겠지. 흘러가는 걸 뛰어들지 않고 지켜볼 수 있으면 분노를 극복하지 않으면서도 다루게 되는 게 아닌가? 나의 어떤 부분은 쉼없이 노를 젓고, 어떤 부분은 제2의 지휘체계로 기능하게 해야겠지.
'분노는 나의 힘'이라고 언젠가는 나도 선언하고 싶다. 제목 바꾸어야겠구나. '이야기는 나의 힘'으로. 분노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생각하다 전환이 되었으니. -_-
이야기는 나의 힘.
콩두도 " 이야기 하기 위해 살다" 族?
콩두가 썽나면 하루 저녁에 소설 한권 똬르르르 풀어놓겠다.
콩두야, 연탄재 발로 차봐라. 맹수한테 뎀비면 너만 죽어.
집밥을 먹이거라
얼굴 뽀얗게 만들어서 오너라.
옛날 명동 우리 기숙사에서는 방학해서 집에 가는 날, 밥상이 제일 화려했다.
집에가면 엄마가 "오늘 뭐 먹고 왔니?"가 제일 첫 질문이므로....ㅎㅎ .."개구리 반찬요" 하면서 개구장이 노릇 쫌했찌.
집에 가는 날, 분바르고 물많이 먹여서 ...오동통통 가면 되지....뭐가 문제야.
그런데 콩두야, 오늘 아침 경향신문 나의 오늘의 운세가
"세찬 바람에 후두두둑 떨어지는 꽃잎"신세라던데...
요런 댓글 달아놓고 몰매 맞는거 아닐까?
그렇지만, 난 지금 점심을 잔뜩 먹고 배가 불러서 눈 앞에 보이는게 없단다. ㅋㅋ
힘내라 콩두.
콩두님
이 글을 읽으면서.......
그냥 한번 확~ 분노를 폭발시켜 버릴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분노를 다루는 여러가지 방법들도, 다들 분노를 폭발시켜본 경험 속에 나온 것들일 것이고....
엄마한테 한번쯤 강력하게 선언하세요. 큰 소리를 내며, 분노를 표현하며...
"이젠 어린애 아니니 그냥 내버려둬요" 라고.
엄마가 깜짝 놀라시겠지요?
한번도 그래 본 적 없죠?
한번 해보세요.
엄마가 변화를 받아들일거예요.
ㅋㅋㅋ 결혼까지한 딸인데....(내가 넘 나쁘나? 저는 고등학교 때 한번 내 지르고 나서 울 엄마가 그때부터는 잔소리 안함.)
분노도 인간에게 필요한 감정 중의 하나이니
때로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스려야 하지만
가끔 터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ㅎㅎ)
김형경과 현경 책.....
저도 그 책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었지요.... 특히 형경의 사랑풍경 있고 심리로 풀어가는 글이 내 안에 와닿았답니다.
현경 선생님은 에너지 넘치는.... ^^ 또 하나의 문화에 나갈 때 자주 뵈었는데...
제가 아는 여자들 이름이 나오니 반갑군요.
그리고 칼럼 글이 참 좋으네요...
자신의 고민과 인용구들이 잘 버물어져 있는...
저도 열심히 과제 수행하고 글 써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