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비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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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의 네비게이션
2013-07-22 (7월 4주차)
초등학교 2학년 때 무렵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학교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 동물원(?)이라고 하기엔 조금 초라한 ‘우리’에 몇 가지 가축들을 기르고 있었다. 공작, 거위, 칠면조 등등… 그리고, 교장실과 교무실이 있던 본관과 고학년 언니 오빠들이 공부하던 별관을 사이에 두고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는 ‘꽃밭’ 수준이었다. 그 정원 입구 쪽에는 작은 토끼우리가 있었다. 어느 날 방과 후 친구와 토끼 우리 앞에서 토끼에게 클로버 잎을 주면서 그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어른 두 명이 유치원생 쯤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 두 명과 함께 토끼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중 선생님 쯤으로 보이는 한 어른이 두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나! 여기 토끼가 참 많이 있네?!”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토끼가 많이 있다고? ‘내 눈에 두 마리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난 그 어른에게 “어, 여기 토끼 두 마리 밖에 없는데요?”라고 질문 아닌 질문을 하고 말았다. 순간, 그 어른의 표정이 갑자기 무서운 표정으로 변하면서 나에게 “두 마리면 많은 거야!”하고 면박을 주셨다. 순간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이내 주눅이 들어 친구와 함께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난 계속 친구에게 묻는다. “두 마리가 많은 거야?”라고….
어떤 단어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또 단어가 주는 뉘앙스와 또 함축된 의미(Connotation)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나는 어릴 때부터 말에 꼬투리를 잡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말이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단어의 의미 뿐 아니라 어감에도 매우 민감하여 언어에 있어서 대강 대강은 내게 절대 통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대학에서의 전공도 남들에게 거의 인기가 없고 또 잘 알려지지도 않은 그야말로 “Boring”할 수 있는 ‘언어학과’를 택한 것 같다. 졸업식 때 같은 과 졸업생이 전체 졸업생 중의 6명 밖에 안 되는 걸 보면 일반적으로 그리 흔치 않은 전공임은 분명하다.
나의 말꼬리를 잡고 또 Context를 잘 이해 못하는 성향은 사회생활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고, 주로 나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왔다. 담당 임원이 새로 부임하여 처음 갖는 티타임 자리에서 이러저러한 담소를 나누고 난 뒤 “질문 없냐”는 말에 조금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 이 후 주변 선배들에게 정신교육(?)을 받은 적도 있다. 상사의 “질문 없냐?”는 말은 “자, 잘할 수 있지?!”라는 뜻이고 상사가 원하는 반응은 정말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언어적 이해의 문제가 종국에는 관계의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성 관계에서도 나는 상대방이 “네가 좋아. 나랑 사귀자”라고 정색을 하고 직접 얘기하지 않는 이상 “식사나 차 한잔 하자”는 말을 나에 대한 호감도를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회사생활에서는 정말 상사의 지시를 액면 그대로만 받아 들이고 해석하여 업무를 처리하는 바람에 꾸지람을 듣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나 그 사람이 사용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상처를 받거나 오해하여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의심하거나 거리를 두기도 한다.
‘사기 열전’을 읽으며 내내 떠올랐던 생각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황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마치 흑백 논리처럼 “옳음”아니면, “틀림”으로만 사물을 또 사안을 판단하고 분류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배경과 성향 또 경험을 갖고 살아온 정말이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내 기준에서는 너무도 명확하고 확실한 것도 상대방 기준에서는 모호하게 느껴질 수 도 있고, 내 기준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도 상대방 입장에서 조금만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수용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넘어지는 연습을 하지 않고는 자전거를 배울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이제까지 세상과 부딪히며 겪었던 어려움과 외로움은 아마도 세상과 더욱 잘 소통하기 위한 과정이고 연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상황적 맥락을 읽지 못해 겪었던 어려움을 통해 얻은 교훈을 앞으로 나와 같이 Context에 대한 해독능력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약자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마치, 유도의 ‘낙법’과 같이 넘어지더라도 좀 더 안전하게 넘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그들이 앞서 만나게 될 장애물과 주의사항에 대해 미리 예고하고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이 되고 싶다. “이곳은 사고 다발지역입니다. 안전 운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배님,
항상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이런 상황이 많으셨다구요?!
이제사 '이태리 허당'의 의미가 사~알짝 이해가 가네요 ㅋㅋ
전 선배님의 주옥같은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담은 자작곡 무~~지 좋아해요.
'학교', '시야, 너 참 아름답구나', '출항' 등 아이폰에 담에 놓구 종종 무한 반복해서 듣는답니다 ^^
작년 가을 꿈벗여행 때 제 얘기에 귀기울여주시고 또 따뜻한 조언주심에 감사드려요.
덕분에 이렇게 연구원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비록 사부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성 선배님처럼 훌륭하신 선배들이 있어 참.. 고맙습니다.
누나! 두마리는 절대적으로는 적은 숫자 맞지요?! 천만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제 극 ..... 이란 단위 까지 있으니....
하지만, 그 어른의 마음 속에 토끼란 개념이 아예 없었다거나... 살면서 한 번도 토끼를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당연 그 어른에게는 많은 숫자이겠지요. (문제는 그 어른의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그렇데 퉁명스럽게 대답하다니... 못된 어른! ^^)
내가 맞는 것이 꼭 맞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상대방을 보는 것이 전부란 생각을, 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나와 달리,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나 다가감에 있어 전 언제나 조심스럽지요.
누나의 열정과 진심을 응원합니다. 쉽진 않겠지만 앞으로의 과정, 9기들과 함께 잘 이겨낸다면, 그 안에서 누나를 찾는다면,
분명 누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괜찮은' 네비게이터가 될 수 있을꺼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