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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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그녀들
사랑하는 사람, 또는 남편을 찾거나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그녀들을 살펴보려 한다. 왜? 이 이야기들이 사랑, 또는 결혼에 대한 어떤 힌트를 줄 것 같아서다. 수수께끼로 주는 힌트, 보물섬을 찾아가는 암호로 된 지도 같은 것. 그녀들의 이름이다. 프시케, 콩쥐, 세째딸, 막내딸. 뒤의 두 여자는 이름이 없다. 딸의 출생 서열만 있다. 거처하던 방의 이름을 당호로 삼을 수 있었던 여자는 왕의 부인이거나 그래도 안채와 바깥채를 나눈 집에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 여자들은 그런 이들이 아니다. 내 책장에는 조셉캠벨의 신의 가면 4부작, 원시신화, 동양신화, 서양신화, 창작신화가 아직 읽지 않은 채로 있다. 그걸 다 읽고 나면 4명의 이름 뒤에 덧붙일 수 있으리라.
프쉬케는 그리스신화, 구렁덩덩 새선비의 아내인 최부잣집 셋째딸과 콩쥐는 한국 민담, 북극곰 남편을 찾으러 달의서쪽 해의 동쪽으로 갔던 막내딸은 스웨덴 민담으로 할머니 무르팍에서 손주들에게로 구전된다. 프쉬케의 이야기는 로버트 A 존슨과 진 시노다 볼린의 책에서 인용하였다. 존슨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관점에서 신화를 읽는 것에 관심이 있고, 정신과의사이면서 미국에서 여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미즈재단 이사인 진 시노다 볼린은 여성이 삶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신화들을 이야기한다.
프쉬케는 에로스와 결혼했다. 에로스라니 왠지 에로틱하다. 에로틱은 좀 빨갛고 야하고 외설스러운데 이게 맞는 반응인가? 식상하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아프로디테였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가 나오는 그림마다 사발을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젖가슴과 보드리 살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그녀의 옆에 작고 앙징맞은 날개를 달고 화살을 맨 귀여운 아이로 에로스는 묘사되곤 했다. 에로스는 사랑의 전령사 구실을 했다. 화살을 쏘면 그 화살에 심장을 맞은 이에게 불 같은 사랑이 솟아나 사랑의 포로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 화살에도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어떤 화살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아폴론에게는 사랑에 빠지는 은화살을, 다프네에게는 사랑을 싫어하는 납화살을 쏘아 도망치게 했다. 사랑의 방향이 달라 누군가의 등만 보도록 하는 건 얼마나 비참한가? 아이로 표현되던 그 남자 에로스는 프쉬케 이야기에서는 성인 남자다. 그는 여자 프쉬케를 선택해서 도둑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밤에 불이 꺼졌을 때만 자고 나가는 거다. 프쉬케는 아직 자기가 결혼한 남자의 정체를 모른다. 남편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으면서도 행복했다. 하지만 엄마와 언니들과 새색시가 브런치를 가지다가 촛불을 켜고 그 남자의 실체를 보라는 그이들의 제안에 홀딱 넘어갔다. 그녀는 솔찮이 귀가 얇았다. 초를 켰을 때 그녀의 눈 앞에 아름다운 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나면 안된다. 천년 묵은 구미호가 999명째 정성을 들이다가도 사단이 나고, 이무기가 사람이 되려고 해도 백일기도 딱 하루 전에 부정을 타곤 해야 관전자에게는 조마조마한 즐거움이 있다. 촛농이 남편의 몸에 떨어지고 에로스는 감춰둔 날개를 달고 원래 자기가 있던 곳으로 날아가버린다. 프쉬케는 시어머니인 아프로디테를 찾아간다. 아프로디테는 프쉬케에게 네 가지 과제를 준다. 그녀는 남편과의 재회를 위해, 이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 프쉬케는 길을 떠난다.
첫번째 과제는 산더미같이 쌓인 곡식창고에서 종류별로 씨앗을 분류하는 과제였다. 프쉬케는 마연자실한다. 그러자 어디선가 개미들이 나와서 씨앗별로 분류해준다. 두번째 과제는 황금양털을 얻어오는 거였다. 프쉬케는 그 양에게 정면으로 뎀벼서 뿔에 받쳐 전치 12주 이상, 사망에 이르는 무모한 도전을 하는 대신 그 양들이 종종 떨기나무에 가려운 등을 긁어대는 걸 관찰한다. 그리고 그 덤불에 붙은 황금양털을 모아 가져간다. 세번째 과제는 스틱스 강에서 떨어지는 폭포에서 물을 한 병 크리스탈 병에 받아오는 거였다. 탑과 독수리의 도움을 받는다. 네번째 과제가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이건 지옥의 페르세포네에게 가서 화장수를 한 병 리필해 오는 거였다. 대신 지옥에서 그녀에게 탄원하는 불쌍한 이를 몇 만날 것인데 모두 모른 척해야 한다는 금기를 지켜야 했다. 그녀는 이 과제를 모두 완수한다. 그리고 에로스와 재회한다.
콩쥐는 한국 사람에게 익숙한 캐릭터다. 엄마가 죽고 아버지는 딸 하나를 데린 여자와 재혼한다.새엄마가 팥쥐를 데리고 들어온 뒤 전실부인의 소생인 콩쥐는 구박뎅이가 된다. 첫번째 새엄마는 콩쥐에게 나무호미로 돌밭을 매게 한다. 팥쥐는 쇠호미로 텃밭 매라 하고. 검은 황소가 와서 도와주었다. 두번째는 벼 찧기. 참새가 와서 도와주었다. 세번째는 밑빠진 독에 물 채우기다. 이것은 두꺼비가 도와주었다. 그러고 난 뒤 아름다운 옷을 주어서 원님 잔치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꽃신을 한 짝 버리고 왔고 원님이 와서 콩쥐를 데리고 갔다. 이건 좀 신데렐라 이야기와 뒤섞이는 부분이다. 암튼 신데렐라처럼 콩쥐에게도 그 신발이 꼭 맞았고 원님과 결혼했다. 나쁜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콩쥐를 보러왔던 팥쥐와 의붓어미는 콩쥐를 연못에 빠뜨리고 대신 콩쥐노릇을 한다. 콩쥐는 연꽃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 이건 심청이 이야기와 또 비슷해질라 한다. 그러니까 서양에서는 착하게 살다 죽은 엄마가 보낸 요정이 유리구두를 선물했고, 동양에서는 꽃신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신발을 주인이 헐레벌떡 가버리느라 한 짝을 공교롭게도 흘린다. 그 신발 주인이 아슬아슬한 경연을 통해 찾아진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신발’이 뭔가를 상징할 듯도 하다.
동화 [해의 서쪽 달의 동쪽]에서는 하얀 설월에 사는 커다란 북극곰이 와서 막내딸을 신부로 주면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했다. 식구가 매우 많았던 가족들은 먹고 살 길이 막연한데 막내딸이 그리로 시집을 가주길 바랬다. 막내딸은 그리 했다. 이 딸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 또 언니와 엄마는 밤마다 북극곰에서 인간으로 변해 자고 나가는 신랑의 얼굴을 보라고 한다. 이 신부도 촛농을 떨어뜨려 북극곰은 의붓어머니에게로 돌아가버린다. 막내딸은 신랑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난다. 그 곳은 바로 ‘해의 서쪽 달의 동쪽’에 있는 성이었다. 할머니들에게 그 길을 묻는다. 할머니들은 그네를 타다가, 사과를 먹다가, 물레를 잣다가 막내딸을 도와준다. 할머니들은 마녀나 여신이 아니었을까? 첫번째 할머니는 황금빗을 선물로 주면서 바람에게 물어주었다. 두번째 할머니는 황금 물레를 선물로 주면서 또다른 바람에게 물어주었다. 세번째 할머니는 마침내 길을 찾아주었고 황금사과를 선물로 주었다. 막내딸은 그리고 갔다. 거기에는 마녀의 마법에 걸린 남편이 곧 그 마녀와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막내딸은 마녀에게 황금사과를 주고 하룻밤만 이야기를 하도록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마녀가 준 마법의 음료를 마시고 잠들어서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를 못한다. 둘째밤에도 선물을 주고 하루밤을 얻어서 이야기를 하지만 듣지를 못한다. 셋째 밤에는 듣는다. 먼 길을 걸어온 여자가 하는 하소연을 다른 이가 듣고 왕자에게 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셔츠를 깨끗이 빨아주는 이와 결혼을 하겠다고 말하라 시킨다. 막내딸은 마녀와 시합을 한다. 그리고 이긴다. 그 남자의 셔츠는 오로지 막내딸만 깨끗이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물과 긴 모험이 마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는 마법에 걸려 하루의 절반은 북극곰으로 지내야 하는 남편의 마법을 풀고 남편을 찾아 귀환한다.
이제 뱀의 신부가 되었던 부잣집 셋째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이가 없던 어느 할머니가 하늘에 빌어서 아들 셋을 낳는다. 그런데 셋째는 낳아놓고 보니 구렁이었다. 그래서 아이 낳았다고 동네에 자랑을 못하고 삿갓으로 덮어두었다. 이웃집 딸들이 보러 와서 놀래서 ‘할머니가 뱀 새끼를 낳았다’며 놀리며 돌아갔다. 그런데 이웃집 셋째딸만은 ‘구렁덩덩 새선비’를 낳았네 라고 하면서 삿갓을 고이 덮어놓고 돌아갔다. 나이가 들어 장가갈 나이가 된 구렁덩덩 새 선비, 그러니까 뱀이 자기는 옆집 막내딸에게 장가들겠다고 했다. 끙끙거리다가 이 늙은 어머니가 뱀 아들이 하도 성화를 하니 마지못해 이웃집에 전했다. 위의 두 딸은 기함을 하려 했고 막내딸은 부모님 뜻이라면 자기가 가겠노라고 했다. 구렁덩덩 새 선비와 막내딸은 혼인을 했다. 혼인한 날 밤에 보니 남편은 아름다운 청년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뱀껍질을 아내에게 맡긴다. 그런데 한 가지 금기가 있었다. 그건 자기가 과거시험을 보러 간 뒤에도 절대로 뱀 껍질을 태우면 안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또 막내는 팔랑귀다. 언니들과 엄마의 꾀임에 빠져 뱀껍질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은 신랑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남장을 한 막내딸은 남편을 찾아 길을 떠난다. 먼저 바가지를 타고 어느 고을로 갔다. 그리고 내일 결혼을 하는 그 남자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딘가 이야기들이 닮아있다. 그렇다. 이것들은 동족이거나 비슷한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시공주니어 옛 이야기 시리즈의 그림책으로도 볼 수가 있다. 아이들은 읽으며 자란다. 이건 동양의 이야기, 서양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이야기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뭘까?
공통점이 있다.
첫째, 여자들은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닌 남자와 결혼을 한다. 에로스는 낮에는 신이고 밤에는 남자다. 다른 남자는 북극곰이고, 뱀이다. 이건 무슨 뜻인가? 남자는 왜 여자보다 짐승으로 비유되는 일이 많을까? 그런데 반대도 가능하지 않나? 인간 남자와 짐승 여자의 혼인 말이다. 가까이에는 단군신화 속 웅녀와 호녀가 그러했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웅녀 말고도 호랑이 여인이 한 명 더 나온다. 바로 난징의 호녀다. 그녀는 호랑이 껍질을 도로 주워입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자 되길 소원해 농사꾼 총각의 항아리에 담겼던 우렁각시, 천년묵은 구미호, 여우누이들이 그녀들이다.
둘째, 여자들은 촛불로 비춰보다가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금기를 깸으로써 남편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한결 같게도 이 남편들은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버리거나, 마법을 걸 수 있는 다른 여자에게 돌아가 버린다. 이건 무슨 뜻일까?
셋째, 여자들은 길을 떠나고, 여러 가지 모험을 한다. 그 문제와 도전꺼리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영웅 여정과 관련이 있을까? 만약 관련이 있다면 남성영웅의 여정과 여성 영웅의 여정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넷째, 이 이야기들은 모두 여성의 사랑 또는 결혼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나의 추측은 맞을까틀릴까?
진 시노다 볼린은 존슨의 책을 재인용하면서 프시케의 과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다. 신화학 박사인 고혜경은 콩쥐의 과제에 대해 말해둔 게 그녀의 책 <선녀는 왜 나뭇군을 떠났을까?>에 있었다. 동화를 전공한 국문학자인 김서정은 시공주니어 우리 옛이야기 시리즈와 세계 옛이야기 시리즈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어른을 위해 붙여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숙제가 너무 많다. 일단 국수 삶아서 비빔국수 비벼먹자. 오이 한 개 썰어넣고, 양파와 양배추도 넣어서. 캬!
부부가 여름 밤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걸 의미있는 일로 생각했던 구본형씨의 칼럼에서였다. 남자가 좋아하는 공원 5개와 여자가 좋아하는 공원 5개를 대서 그 중 공통되는 것으로 부부 공원을 하나 정하란다. 그 공원에 있는 나무 중 부부나무로 한 그루 정하고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 같이 또 혼자 가서 나무 옆에 앉아 보라 하더라. 부부가 술집을 찾아가 한 잔하고 돌아오기, 그리고 침대칸 열차를 타는 등 하루 여행을 하는 것 등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솔깃하다. 그런 공원은 이미 있다. 남산 공원.
이 공원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55년만의 한파가 왔다던 날이었다. 나는 모자를 세 개, 한 개는 쓰고 두 개는 달고, 약국에서 산 핫팩을 주머니에 넣어 나갔다. 그는 모자를 한 개 벗어주겠다고 말하는데 그냥 맨 머리로 견딘다. 보드를 타러 다녔다 했다. 추위에 강한가 싶었다. 아니면 아직 우리는 남의 모자를 얻어쓸 만큼 친하지 않았다. 남산에는 왜 오고 싶었을까? 기사를 봤거나 글을 읽었거나 그랬을 거다. 지금은 이유가 생각이 안난다. 나는 그 즈음 무단히 남산에 오고 싶었다. 마침 전철이 파업중이어서 빨강 광역버스를 타고 갔었다. 좋아하는 걸 10개씩 말했다. 그는 삼겹살에 소주, 사람들, 책 읽기, 비오는 날 술마시기, 산 같은 걸 말했다. 나는 또 이런저런 것을 말했다. 걷다 보니 평탄한 길이 나와서 달리기를 했다. 내가 뛰어가니 그도 어어어 하면서 따라 뛰었다. 약수는 ‘음용부적합’이라는데 그냥 마셨다. 마셔도 안 죽어요 그래서 내가 쿡쿡 웃으며 따라 마셨다.
그가 어쩌면 내게 특별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남산야생화공원에서 했다. 몇 년 전에 남산 야생화 공원에 밤에 간 적이 있었다. 모닝페이지 카페 사람들과 함께였다. 보름달이 떠있었고 촛불을 밝혀놓고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말없이 같이 있는데도 왠지 동류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나는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언젠가 다시 보름달이 뜬 날 이 공원에 좋아하는 사람과 와서 술을 마시겠다고 다짐했다. 55년만의 한파 속에서 남산을 산책하면서 들은 10가지를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놀 꺼리를 10가지쯤 정했다. 나는 거기다 남산야생화공원에서 보름달 뜬 밤에 같이 술을 마시자는 걸 끼워넣었다. 그는 배낭에 술과 안주를 싸고 돗자리와 어머니가 생선 구운 다음에 피우는 노랑 초까지 넣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술을 마셨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보름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달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가던 날 내가 늦었다. 그는 절대로 늦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11시에 약속을 했는데 내가 30분쯤 늦었다. 그날 남산 단풍이 절정이어서 마침 내린 비로 잎을 떨구고 있었다. 이 근처에 살고 싶다고 말한 건 반은 단풍에 홀려서고 반은 늦어서 화가 난 사람을 달래려는 의도였다. 만약 차를 지하주차장에 넣으면서 긁어먹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런 무리수를 지르지는 않았을 건데 그는 늦으면 집중이 안되는 스타일인 듯 하다. 남산도서관과 남산 산책로에 가까운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정말로 그런 집을 알아봤더라. 그런데 너무 언덕배기여서 출근길에 힐 신는 일은 다 틀렸고, 오르내릴 때마다 열이 뻗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집을 구했다. 여기도 반드시 남산에 접근하기가 쉬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 청혼도 이 공원에서 였다. 나는 오래 전에 바다로 지는 노을을 본 적이 있었다. 무의도를 다녀오는 배 안에서였다. 하늘도 붉고 바다도 붉어서 천지가 노을이었다. 황홀하였다. 그리고 한동안 산에 앉아 노을을 보고서 랜턴을 키고 내려오는 것에 맛들렸다. 관악산 아래 살 때였다. 청혼은 산에서 물로 지는 노을을 보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로망이 있었다. 거기가 바다와 산이 있는 섬이길 기대했을 거다. 그런데 내가 주로 떠벌리고 그는 조용했다. 그는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노을이 지는 시간을 기다려서 한강물이 보이는 곳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반지도 한 개 주었다. 그래서 그는 아까 그렇게 뜸을 들였고, 그리고 우리가 살 집을 후딱 본 뒤에 내가 이건 좀 아닌데요 하자 마자 제일 단코스를 골라서 남산을 오른 거였다. 우리는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남산공원이 좋아서 이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용산이 재개발된다고 빌라를 쪼개서 작게 지은 뒤 비싸게 판 집이었다. 전세계약서에 쓰는 집주인의 주소지가 비싼 동네다. 2개의 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용산재개발 관련한 철거의 과잉진압을 다룬 영화였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다. 나는 그저 동네 주민으로 살 뿐이다.
지금은 금주중이라 술집에 갈 수 없어서 부침개도 삼겹살도 모임도 다 끊었지만 데리고 갈 술집은 많다고 했다. 술을 즐기는 그는 분명 그런 보물 같은 술집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맛과 가격이 마음 편한 집일거다. 입맛이 촌스러우니 잔치국수와 비빔국수가 맛있고, 도토리묵과 계란말이가 맛있는 집일거다. 맛집을 찾아가서 먹는 걸 아주 즐거워한다. 금주기간이 끝나면 내가 술을, 좋아하는 소주로 짝떼기로 받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좋아했다.
그런 나무도 한 그루 있다. 김구동상과 이시영, 안중근 동상이 있는 즈음에 있는 느티나무다. 두 그루가 연리지되어 있다. 아래에 동그랗게 시멘트로 앉을 자리를 만들어놓았다. 거기에 앚아 처음으로 우리의 미래를 비추어보았다. 그가 어머니가 얻어왔다면서 옷을 한 짐 부려놓았던 날이다. 나한테 맞는 걸 골라입으라 한다. 헌 옷이었다. 반바지와 티셔츠 몇 가지를 골랐다. 그리고 그는 그걸 다시 배낭에 쌌다. 그는 나에게 먼저 고를 시간을 준 걸 기뻐했다. 그 후에도 종종 나는 옷을 맨 먼저 고르는 사람의 자리에 있곤 했다. 거기 마침 동남아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이 왔다. 아마도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인 듯 했다. 2차대전과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나라에 준 굴욕에 대한 이야기인 듯 했다. 만약 구한말에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독립군 개장수일거라고 말했다. 독립군 따라 다니면서 개를 파는 개장수. 나는 수월스님이 운영하는 삼거리 국밥집에서 국밥 마는 공양주보살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 국밥집은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해 가는 사람들의 짐수레가 쉬어가는 곳이며, 독립군에게 자금을 전달해주는 이들, 상인을 가장한 이들, 그리고 고향에서 떠나와 두려움 속에서 가는 일본군 소년, 중국인들이 머무는 흔한 국밥집이리라. 나는 후한 마음으로 밥을 푹푹 퍼주는 손 큰 여자일 거다. 그리고 수월스님은 아끼지 않고 맛난 국밥을 끓여내어 내 편 니 편없이 고생하는 이들에게 국밥을 주는 사람일 거다. 아침에 일어나 예불을 모신 뒤 낮에는 일을 할 거다. 두 남녀가 눈맞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쩐지 그 조그만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국밥에 수육을 더 썰어넣고, 누룽지를 긁어주고…그리고 그 남자는 떠나고 개똥이를 혼자 낳아 기른 여자는 아이를 보내고…뭐 이런 이야기를 둘이서 지어냈다.
~ 부러워라.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참 재미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살았다면 전 부엌보다는 바깥에서... 머슴살이하며 살았을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속성이 여자가 아니라서요.
조셉캠벨 <신화와 인생>에서 여자와 남자의 신화는 다르다고 하네요. 여자는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니고, 삶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걸 인지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하데요. 여자가 사회에서의 성취라는 것을 추구한다면 영웅의 여정을 따르겠지만 여자의 삶의 방식은 영웅의 여정이 아니래요. 그말을 보고 좀 억울했습니다. 그럼 이제까지 받아온 교육은 대체 뭐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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