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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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너는 왜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네가 그것 말고 다른 것에 몰두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물론 난 그림 그리는 게 좋지. 그런데, 그게 너에게도 좋을까 생각해봤다. 지난주에 김충원의 미술교실이란 책에 그림그리기를 연습해서 잘 하게 되면 좋은 점을 옮겨 적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성인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인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림을 배우면서 좋은 점은 '개성을 살리며 살아가는 밑거름'이 될 거란 것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게 돕는 것', 한마디로 세상을 행복하게 살 게 해주는 초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초능력이란 거 그림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아도 되잖아. 난 아직도 기상청에서 일을 생각하곤 한다. 매일 일로서 해야했던 하늘을 보고 그것을 기록해 놓는 일. 나는 그것을 사진으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혹은 글로 적어두어도 좋지.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이니까 참 괜찮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무도 관찰해서 년월일시에 따란 변화를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도 있고 말이야. 너는 자연관찰일기쪽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게 꼭 그림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지. 그게 그림이 되어도 좋지만 말이야.
그림 그리기는 혼자 하기에 참 좋은 놀이지. 여럿이 할수도 있지만 혼자서 보내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좋은 놀이지. 또 심심할 때, 속상할 때 하기도 좋은 것이고, 기분이 좋을 때도 하기에 좋지.
내가 학교에서 수업이나, 숙제가 아닌 순전히 내 즐거움을 위해서 그림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인형을 그리기 위해서였어. 종이인형을 사고 싶은데, 그것도 돈이 들잖아. 국민학생이 뭔 돈이 있었겠냐. 그리고 인형들을 가지고 놀다보면 또 내 손으로 만들어서 갖고 놀고 싶기도 하잖아. 친구랑 인형놀이를 위해서 그리는거지.
그 다음에 그렸던 것은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같은 반 친구 미순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그때는 만화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볼 정도로 만화가 유행했으니까 그림이 넘쳐나는 시절이었지. 그림엽서도 엄청나게 넘쳐났고. 그림그려서 선물하고 싶었어. 그 친구도 자기가 만화책 따라그린 것 내게 주기도 했어.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렸던 것은 운동장에 막대기로 그린 것. 만화를 트레싱지로 베껴 그린 것. 그 사이에 괜찮은 그림을 보면 잡지를 오려두었다가 책 표지나 공책표지에 붙여두기도 했지.
그리고 진짜로 정말 나를 위해서 그린 것은 대학생 때였던 것 같아. 아마도 3학년쯤인가 여름방학때일거야. 난 불면증에 시달렸어. 밤에 열대야로 더워서 못잤다 뭐 그린 것도 있었겠지만, 속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지내는거지. 난 지금도 사람은 심심해야, 아주 많이 시간이 주어져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간다고 봐. 그때 내가 그랬거든. 내가 기타를 칠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그걸 좋아한다면 아마도 기타를 들고 나가서 튕기다가 들어와서 잠을 청했겠지. 난 그림 그리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그밤도 너무 잠이 안와서 그림을 그렸겠지.
그날 밤에 그린 것은 불두칠성이 있는 밤하늘과 그 아래 눈감고 엎드려 자고 있는 여자. 난 너무나 자고 싶었어. 불면증. 그거 끔찍한 거잖아. 난 내가 왜 잠을 못자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말 할 수는 없었어. 아주 무기력한 날을 보내고 있었어. 집안에 흐르는 이상한 공기 때문에 난 계속 졸리고 피곤했어. 하지만 제대로 편히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잠이 달아나버렸어. 너무나도 자고 싶었지. 낮에 꾸벅꾸벅 조는 일은 있어도 편히 잘 수는 없었거든. 밤에도 잠이 안오고. 그래서 자고 싶은 내 마음을 그렸어. 아버지께 보여드렸지. '편히 잠이 든 여자'라고만 말했어. 다 그리고 났을 때는 새벽이 깊었는데, 피곤했지만,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이미 밤이 깊었는데, 그때에도 잠이 오지 않고 피곤한 거 그거 끔찍하잖아.
그림은 내게 그런 것이었던 것 같아. 잠이 필요하지만 못 자는 나를 위한 약같은 존재. 마음에 작동하는 진통제.
김충원은 그림 그리는 것이 삶을 행복하게 하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 많은 사람이 그림을 치료제로 쓰기도 해. 너 혹시 진정제나 진통제로 쓰일 뭔가를 찾는데 네가 내 친구라서 다른 것들보다 먼저 그림이 손들고 나선 건 아닐까?
그림이 자연을 더 잘 느끼고 사람을 알아가는 통로가 되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 약으로 시작하는 거라면 난 좀 반대다. 먼저 약이 필요한 것이 맞지만, 그림으로 풀어내는 거라면 오래 걸리고 아플 테니까 혼자서 하는 것 말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는 것으로 골라봐. 사진 추천.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놀면 좋잖아.
내 친구중에 하나는 화분을 키우는 재미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하더라. 가든잉 좋지. 요리는 어떠냐? 홈패션은 어떠냐? 아마 만들면 그걸 누구한테 주고 싶을 껄.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어떠냐? 난 그런게 너에게는 훨씬 재미날 것 같다. 그건 약이 아닐 가망성이 많아서.
이렇게 말해버려서 네가 '약'을 인지 해버렸다면 어떡할까라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그림이 약이 아닌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치유라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더라고 치유를 넘어서 기쁨으로 갔으면 하고 바란다. 혹시 지금도 선긋기를 연습하고, 식물 앞에 두고 자세하게 그리기를 하고 있다면 말이야.
IP *.61.23.211
너는 왜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네가 그것 말고 다른 것에 몰두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물론 난 그림 그리는 게 좋지. 그런데, 그게 너에게도 좋을까 생각해봤다. 지난주에 김충원의 미술교실이란 책에 그림그리기를 연습해서 잘 하게 되면 좋은 점을 옮겨 적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성인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인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림을 배우면서 좋은 점은 '개성을 살리며 살아가는 밑거름'이 될 거란 것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게 돕는 것', 한마디로 세상을 행복하게 살 게 해주는 초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초능력이란 거 그림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아도 되잖아. 난 아직도 기상청에서 일을 생각하곤 한다. 매일 일로서 해야했던 하늘을 보고 그것을 기록해 놓는 일. 나는 그것을 사진으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혹은 글로 적어두어도 좋지.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이니까 참 괜찮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무도 관찰해서 년월일시에 따란 변화를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도 있고 말이야. 너는 자연관찰일기쪽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게 꼭 그림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지. 그게 그림이 되어도 좋지만 말이야.
그림 그리기는 혼자 하기에 참 좋은 놀이지. 여럿이 할수도 있지만 혼자서 보내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좋은 놀이지. 또 심심할 때, 속상할 때 하기도 좋은 것이고, 기분이 좋을 때도 하기에 좋지.
내가 학교에서 수업이나, 숙제가 아닌 순전히 내 즐거움을 위해서 그림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인형을 그리기 위해서였어. 종이인형을 사고 싶은데, 그것도 돈이 들잖아. 국민학생이 뭔 돈이 있었겠냐. 그리고 인형들을 가지고 놀다보면 또 내 손으로 만들어서 갖고 놀고 싶기도 하잖아. 친구랑 인형놀이를 위해서 그리는거지.
그 다음에 그렸던 것은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같은 반 친구 미순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그때는 만화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볼 정도로 만화가 유행했으니까 그림이 넘쳐나는 시절이었지. 그림엽서도 엄청나게 넘쳐났고. 그림그려서 선물하고 싶었어. 그 친구도 자기가 만화책 따라그린 것 내게 주기도 했어.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렸던 것은 운동장에 막대기로 그린 것. 만화를 트레싱지로 베껴 그린 것. 그 사이에 괜찮은 그림을 보면 잡지를 오려두었다가 책 표지나 공책표지에 붙여두기도 했지.
그리고 진짜로 정말 나를 위해서 그린 것은 대학생 때였던 것 같아. 아마도 3학년쯤인가 여름방학때일거야. 난 불면증에 시달렸어. 밤에 열대야로 더워서 못잤다 뭐 그린 것도 있었겠지만, 속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지내는거지. 난 지금도 사람은 심심해야, 아주 많이 시간이 주어져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간다고 봐. 그때 내가 그랬거든. 내가 기타를 칠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그걸 좋아한다면 아마도 기타를 들고 나가서 튕기다가 들어와서 잠을 청했겠지. 난 그림 그리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그밤도 너무 잠이 안와서 그림을 그렸겠지.
그날 밤에 그린 것은 불두칠성이 있는 밤하늘과 그 아래 눈감고 엎드려 자고 있는 여자. 난 너무나 자고 싶었어. 불면증. 그거 끔찍한 거잖아. 난 내가 왜 잠을 못자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말 할 수는 없었어. 아주 무기력한 날을 보내고 있었어. 집안에 흐르는 이상한 공기 때문에 난 계속 졸리고 피곤했어. 하지만 제대로 편히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잠이 달아나버렸어. 너무나도 자고 싶었지. 낮에 꾸벅꾸벅 조는 일은 있어도 편히 잘 수는 없었거든. 밤에도 잠이 안오고. 그래서 자고 싶은 내 마음을 그렸어. 아버지께 보여드렸지. '편히 잠이 든 여자'라고만 말했어. 다 그리고 났을 때는 새벽이 깊었는데, 피곤했지만,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이미 밤이 깊었는데, 그때에도 잠이 오지 않고 피곤한 거 그거 끔찍하잖아.
그림은 내게 그런 것이었던 것 같아. 잠이 필요하지만 못 자는 나를 위한 약같은 존재. 마음에 작동하는 진통제.
김충원은 그림 그리는 것이 삶을 행복하게 하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 많은 사람이 그림을 치료제로 쓰기도 해. 너 혹시 진정제나 진통제로 쓰일 뭔가를 찾는데 네가 내 친구라서 다른 것들보다 먼저 그림이 손들고 나선 건 아닐까?
그림이 자연을 더 잘 느끼고 사람을 알아가는 통로가 되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 약으로 시작하는 거라면 난 좀 반대다. 먼저 약이 필요한 것이 맞지만, 그림으로 풀어내는 거라면 오래 걸리고 아플 테니까 혼자서 하는 것 말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는 것으로 골라봐. 사진 추천.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놀면 좋잖아.
내 친구중에 하나는 화분을 키우는 재미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하더라. 가든잉 좋지. 요리는 어떠냐? 홈패션은 어떠냐? 아마 만들면 그걸 누구한테 주고 싶을 껄.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어떠냐? 난 그런게 너에게는 훨씬 재미날 것 같다. 그건 약이 아닐 가망성이 많아서.
이렇게 말해버려서 네가 '약'을 인지 해버렸다면 어떡할까라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그림이 약이 아닌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치유라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더라고 치유를 넘어서 기쁨으로 갔으면 하고 바란다. 혹시 지금도 선긋기를 연습하고, 식물 앞에 두고 자세하게 그리기를 하고 있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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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도 사람은 심심해야, 아주 많이 시간이 주어져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간다고 봐'
이 말에 빙고!를 외칩니다. 나처럼 네아이를 돌보고 일을 하고 또 복잡한 가계의 외며느리로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심심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심심한 그런 시간이 전 궁금하고 그립습니다. 그러나 바쁜 중에도 그런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삶의 요체인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모닝페이지입니다. 그러나 '한다(doing)'는 측면에서 보면 모닝페이지를 하는 시간도 그냥 아무 것도 안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가만히 있는 시간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런 시간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상보다는 모닝페이지를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그대로 아무 것도 안하고 하루나 이틀을 지내보는 것, 그건 여전히 저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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