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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3일 10시 56분 등록

어바웃미데이 준비하면서 이전에 썻던 글을 읽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올려봅니다... 5년전 이야기...^^

 

노가리와 발바닥

  

얼마 전 4기 연구원 수료식이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간의 연구원 생활. 처음 이 과정을 시작할 때는 설레임과 함께 긴장감이 꽤 단단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 나사는 점점 풀려갔다. 느슨해지는 고삐를 움켜쥐고 버텨냈지만, 과정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1년은 힘들었다. 하지만 힘든 만큼 또 즐거웠다.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책 속의 스승들과 현실 속의 스승을 만났다. 함께 많이 웃었고, 같이 힘들어 했고, 힘들 땐 서로 응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안에 무언가 쌓여가는 듯한 느낌이 올 때가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뭔가 내 안에서 용솟음치는 듯한 느낌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었다. 학생 때처럼 규칙적으로 도서관에 다녔고, 늦은 밤 달빛을 받으며 숙소로 걸어오는 길은 읽었던 책 속의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가슴 뿌듯한 시간이었다.

 

찰스 핸디. 당신 참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했지요? 코끼리와 벼룩이란 상징적 표현. 회사의 유형을 4명의 신에 비유하거나, 결혼 생활을 4가지 유형으로 설명한 것도... 당신의 가르침 중에서 특히 이 말을 좋아합니다. ‘남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남들과 다르게 하라’, ‘작가는 과거의 아이디어를 여전히 다루지만 새로운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통찰, 새로운 관점, 새로운 경험을 나눠줄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 할아버지. 평생을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고, 90대에 이르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며 살 수 있다는 걸 할아버지께 배웠어요. ‘성실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셨죠.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에게서 글을 쓸 때 필요한 용기와 정직함의 중요성을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캠벨 아저씨. 뭐 이런 책들을 썼어요? 너무 어려워요. 당초 무슨 얘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책은 엄청 두껍고.(신화의 이미지) 모르는 말도 너무 많고. 그래도 아저씨를 알게 돼서 기뻐요. 적어도 신화가 무언지 신화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됐으니까요.”

 

 

즐거운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마음 아픈(?) 기억도 있었다.

작년 5월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후 내 생활 패턴은 달라졌다. 주말이면 TV 앞에서 딩굴거리던 모습 대신 컴퓨터 앞에서 똑딱거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1월에 시작한 연구원 레이스부터 따지면 4개월여를 그렇게 보낸 거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어하던 집사람이 뭔가 변화의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딸아이와 놀아주는 시간도 줄었고, 연구원 과제를 한다고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뭐 하는 데 밤낮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야?”

북리뷰하고 칼럼 쓰는 거야. 앞으로 1년 정도는 이렇게 해야 내 책을 쓸 수 있어.”

아니 뭘 그렇게 어렵게 해. 책 쓰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대단한 건 아닐지 몰라도, 연구원 과정에 충실해야 책을 쓸 수 있는 건 맞아.”

과정은 무슨... 결국 노가리 푼다는 거 아냐?”

, 노가리?” 온 몸의 핏줄기가 솟구치며 머릿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책 읽기를 별로 즐겨하지 않는 집사람은 연구원 모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연구원을 심심한 남녀들이 모여 함께 즐기는 오락 동우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소에 책 한권 읽지 않으면서...‘노가리라니! 남녀가 모인다면 그저남녀상열지사나 생각하고. 넌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니? 내가 노가리면 넌발바닥이다. 발바닥!”

 

우리 부부는 말싸움을 길게 안한다. 상황은 일단 그 정도로 수습 됐다. 하지만 노가리란 말은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심한 표현이었다. ‘뭔가 새로이 해 보려고 이렇게 열심히 인데, 노가리란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대체 날 뭘로 알고.’(씩씩씩...)

 

얼마 뒤 오프수업에서 사부님께 그 얘기를 했더니, 우스워 죽겠단다. 이야기를 들은 연구원들 모두 함께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책을 더 읽을수록 노가리란 말은 내게 깊게 다가왔다. ‘책 쓴다고? 시답잖은 노가리나 풀게 되는 건 아닌가?’ 사실 표현은 다르지만 사부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시곤 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그 중에는 쓰레기 같은 책,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책들이 아주 많다. 또 한권의 쓰레기 같은 책을 쓰려거든 쓰지 마라.”

 

너무 속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책 쓰는 게 노가리 까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노가리라고 다 같은 노가리는 아니다. 좋은 노가리도 있고 쓰레기 같은 노가리도 있다. 맛있으면서 몸에 좋은 노가리가 있는가 하면, 제작 과정이 부실해서 맛도 없고 몸에 좋지 않은 노가리도 있다. 좋은 노가리를 까는 것은 좋은 책을 쓰는 것과 같다. 좋은 책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책이 좋은 책이다. 읽을 때는 그럴 듯한데 읽고 나서 곧 잊어버리고 마는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생각을 통해 변화의 동인(動因)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다. 긍정적인 실행력을 만들어 내는 책이 좋은 책이다.

 

책 한 권으로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는 게 어디 쉽기야 하겠냐만, 읽고 나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책, 새로운 관점과 경험을 주고 책에서 얻은 느낌을 통해 사고와 행동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좀 거창하다 싶지만, 난 그런 노가리를 까보고 싶다. 나의 무딘 글재주와 빈곤한 상상력, 부족한 성실성으로 과욕을 부리는 게 염려되지만 그런 욕심을 내보고 싶다.

 

연구원 수료식을 끝냈고 앞으로 1년 동안 책을 쓰는 과정이 남았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은 항상 설레임과 흥분이 있어 좋다. 하지만 이 과정은 아주 고독한 과정이란다. 책 읽고 칼럼 쓰는 과정보다 더 힘들어서 중도에 주저앉는 사람이 많단다. 그래도 가련다. 재미나게 노가리 풀러.

 

앞으로 1년간의 작업이 내가 이 세상에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또 내 책을 접하게 된 누군가가 좀더 아름다운 내일을 만들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뒤로 우리 부부에게는 닉네임이 하나씩 더 생겼다. 우린 가끔 이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른다. 난 노가리, 집사람은 발바닥. ㅋㅋ... 연구원 생활을 이해해주고, 내게 이런 가르침을 준 마눌님께 고맙다.)

IP *.97.3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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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14:18:14 *.43.131.14

하하하하하 선배님 (노가리 선배님이라 부르면 안되는 거지요 -_-)

노가리 발바닥 부부가 넘 사랑스럽습니다. ^^ 

싱싱한 수료 소감문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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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20:18:26 *.244.220.253

오래만에 형님글을 읽어서 그런가요. 예전에도 오늘 글처럼 재미있었나요?

아무튼 좋습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노가리만 푸시면 될 것  같습니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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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4 07:49:28 *.64.231.52

정산 글까지 읽으니 정말 현역 때 느낌이 확 달려드네요.

좋았던 시절은 그렇게 다 지나가고, 좋았다는 걸 시간이 지나야만 알게 되다니요.

그래도 우리 그 때의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

오늘이 그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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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6 07:22:47 *.201.99.195

노가리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책 제목으로 짱인데요.

지금부터 딱 1년 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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