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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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곧 추석이니 전(煎), 삼색 송편, 그리고 수정과를 만들어 볼까 해요.” 라고 후덕해 보이는 중년의 요리 강사가 말했다. 음식 재료는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강사는 레시피를 설명한 후 시범을 보였다. 리듬을 타는 칼질과 유연한 손놀림에 재료는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시범이 끝나자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열 명 남 짓 되는 수강생들의 몸놀림이 바빠졌다. 삼 십대부터 칠 십대까지 수강생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물론 여성이 대부분이다.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세 가지 음식을 동시에 만들려니 우왕좌왕하며 정신이 없다. 전에 쓰일 생 새우의 내장을 발라내고, 표고버섯 전과 고추 전에 들어갈 소로 고기양념을 만들고, 쌀가루에 치자가루, 계피가루를 넣고 반죽하고, 그리고 계피나무와 생강을 물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요리를 배운 지 어느새 삼 개월이 다되어 간다. 주 1회 하는데 배울수록 재미가 있다. 중년의 나이가 되니 아무래도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내 안의 여성상인 아니마(Anima)가 나오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오십이 다 되도록 라면 말고 스스로 만들어 먹은 적이 없다. 집에서든 밖에서든 음식을 만드는 것은 대부분 여성의 몫 이였다(여성이 들으면 분통터질 노릇이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큰집에 명절을 지내러 내려가면, 남자는 안방 또는 거실 한가운데서 상을 받았고, 여자는 주방 딸린 부엌 방에서 먹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도 변하는지 언제부턴가 직접 음식을 해보고 싶어졌다. 아니, 해야만 했다.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는 어머니와 닭도리탕에 질린 아들에게 새로운 메뉴를 개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날 배운 것은 잊기 전에 어머니와 아들을 실습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추잡채, 불낙 전골, 치킨데리야끼, 제육볶음 등. 맛있다며 대체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라도 공들여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꽃과 나무들이 조건과 상황이 맞으면 계절 상관없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마찬가진 것 같다. 음식을 직접 만든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그 상황이 되니 남을 의식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움직이니 말이다. 누이도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해 “ 야,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다. 그려 남자도 뭐든지 해야지 “ 하면서 갑자기 손 하나 까딱 않는 매형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소소한 것이지만 내게는 의미가 있는 몸 짓이다.
곧 추석이다. 그 동안 차례상 장보는 것으로 내 의무는 다한 것으로 생각했다. 음식은 어머니와 동생 부부의 몫이고 난 뒷짐을 진 채, 옆에서 갓 부친 전을 시식하면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곤 했다. 하지만 이번 명절은 일 좀 해야겠다. 눈썰미가 없어 솜씨가 서툴겠지만 새로 배운 전과 삼색 송편을 만들어 아버지 차례상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단출한 가족들과 먹고 마시면서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야겠다.
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에선 명절증후군이니 하며 시어머니와 며느리간 공방이 치열하다. 상대방의 얘기는 듣지 않고 미리 짜고 나왔는지 서로의 입장만 되풀이 하고 있다. 어떤 매체에서는 이번 추석에는 듣기 싫은 말은 삼가 하자며 친척간에 제발 결혼, 공부, 취직 따위는 묻지 말라고 한다. 결혼 못해, 공부 못해, 취직 못해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상태에서 가깝지도 않는(?) 친척이 해준 것도 없으면서 한마디 툭 던지니 마음 상할 만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랑하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과 남의 불행을 속으론 기뻐하는 ‘고약한 심보’가 있다. 잘난 자신, 잘난 남편과 아내, 잘난 자식이 있으니 누군가 얘기를 꺼내 주길 바라고 묻지 않으면 먼저 물어 봐서라도 기어코 자랑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어쩌겠는가? 그냥 속으로 쓰라린 속을 달랠 수 밖에. 그것보다는 ‘큰 마음’으로 축하해주는 것이 어떨까. 오랜만에 만나 자연스럽게 가족 예기로 화제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무 말없이 머리 숙이고 먹기만 할 순 없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그들은 ‘나’의 가족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니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이번 명절에도 부모가 없어 고향에 갈 필요가 없거나, 자식을 잃거나 없어, 또는 우환으로 쓸쓸히 추석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부모 또는 자식들은 형제, 친척 들이 와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다른 가족들을 부러워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생각나고 가족의 온기와 정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명절 증후군 운운하고 결혼, 취직 묻지 말라는 얘기는 어쩌면 행복에 겨운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가족,사람의 온정과 너그러움이 그립다. (201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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