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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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난 건 내가 자살하던 날이었다.
약 30분 전, 나는 하겐다즈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이 먹고 있었다. 언젠가 사형수들의 마지막 만찬이라는 시리즈의 사진을 보았다. 그들의 신상과 죄목, 사형 방법,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음식들이 주욱 나열되었다. 복숭아 파이라든가 구운 치킨 같은 것들... 그 중 거장의 반열에 오른 한 사형수가 눈에 띄었다. 불과 33세, 168건의 살인, 독극물 주사형... 그 사람은 2 파인트의 민트 초콜렛칩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수더분하게 퍽퍽 담긴 녹색 아이스크림과 그 옆에 놓인 하얀 은수저. 참으로 순진무구한 선택이 아닌가? 글쎄, 나라면? 나라면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을 골랐을텐데. 나는 마카다미아를 발음하는 게 좋았다. 마/카/다/미/아. 이 아이스크림은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먹어 본 것이었다. S가 먹고 싶대서 사주었었지. 그래, 탈지분유맛이 났다. 뒤늦게 깨달았는데 내가 이 맛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릴 때 먹던 분유맛이 나기 때문이었다. 퇴행적 선택.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해 내진 못했다.
유지방 15.82%. 유제품은 암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발암성이 강한지 이젠 우유를 첨가/무첨가하면서 암을 조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니까요? 고도 원시 안경을 쓴 노학자가 말했다. 하지만 암으로 죽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차라리 담배나 피고 술이나 마시지. 인간 말종의 종말. 어울리지 않음이야. 가끔씩 우연히도 병마가 나에게 덮쳐 미래를 부정할 수 있는 변명 거리가 되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행운이 따르는 타입은 아니었다.
목을 매 본 것은 이 번이 처음은 아니다. 중력과 생물학을 동시에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이란 것은. 이를 테면 사소한 실패들이 미래의 산등성이를 점차 깎아 먹고 있는 것을 체감할 때는. 나는 몹시도 피곤하였다. X-japan의 기타리스트는 자살한 게 아니야. 그저 만성적인 어깨 통증 때문에 경락을 하려던 거지. 문고리에 목을 맨다는 게 말이 돼? S가 말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X-japan의 팬이었다. 왜 그런 밴드를 좋아할까? 그녀는 올림피아드 출전 당일에도 헤드폰 밖으로 음이 귀가 터지라고 음악을 들었다. 크루시파이 마이 러브... 나의 사랑을 십자가에 매달아요... 꼭 저렇게 폼 잡는 애들이 성적은 저조하지. 그러나 그녀는 대회 우승자인 A와 함께 금메달을 땄고 나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들 대거 상위 입상. 기념 촬영을 하는데 모두들 웃고 있는데... 그 굴욕적인 사진 속 인물 중 유일한 동메달리스트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웃지 않음. 웃을 수 없음. 모두들 내 기분을 신경썼다. 괜찮아, 동메달도 참 잘한거야... 나는 겨우 웃어보였다. 그러나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그네들의 면상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려는데 너희는 웃음을 참아? 어머니는 갈비찜을 해주셨다. 먹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그 일본 기타리스트를 따라해 보았다. 정말로 어깨의 통증이 완화가 된단 말인가? 어쩐지 팔을 너무 쓴 것 같아 필기를 많이 했더니... 메달의 끈을 문고리에 걸었다. 목을 줄 사이에 끼우자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과연 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작게 흐느끼다 무기력에 절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무도 내 방 문고리에 걸린 메달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어차피 죽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런 방법으로는. 독창성이 없잖아?
그 날 이후, 나는 죽음의 사유를 벗 삼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은 아이스크림을 닮았다. 상상할 때면 감초를 달인 탕약을 쥐어짜듯 달콤하게! 몸이 녹아 내렸다. 주로 두 종류가 단골 소재였다 – 확 그냥 뛰어내리거나 팍 그냥 차도로 뛰어들거나... 그 이상의 대단한 다양성을 고려해 본 적은 없다. 목을 맨다? 간혹 매달려 있는 나를 뇌의 벽면에 영사시켜 바라보곤 했다. 연구실에서 고된 학문에 지쳐 목숨을 끊은 과학 유망주. 안/타/깝/다... 엄청난 천재였는데... 그래, 가능성은 증명되지 않았으니 이미 가 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최대의 예우를 해줄 것이다. 기대가 컸었는데-라는.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어쩌면 죽기엔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속이 으슬했다. 벌써 10월이군. 창밖으로는 비가 내렸다. 새벽이면 여기 창가에서 단무지 같은 달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나의 근면함을 증명하던 노란 달. 그저 돌덩이에 불과한, Mass로서의 존재감 이외에는 봐줄 것이 없는 몸뚱아리가 나와 닮았다. 눅눅해진 가디건을 단단히 입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베란다의 빨래줄을 도려냈다. 투두둑 – 걷지 않은 주인집 아줌마의 속옷들이 떨어졌다. 뭐, 이 정도야 사람이 죽는다는 데 익스큐즈가 되겠지. 천정의 동그란 전등갓을 분리하자 이미 가루가 된 벌레들의 검은 사체가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굴렀다. 전등을 떼어내고 마감재에 줄을 걸었다. 그래도 통증이 없는 편이 낫겠지. 나는 빳빳한 면손수건을 줄과 턱 사이에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목이 모두 들어갔다. 줄을 모두 조여 보았다. 답답하겠어. 하지만 5분이면 된다. 그 후엔 영원히 잘 수 있겠지. 눈을 감고 조금 음미한 후, 한숨처럼 발로 의자를 툭 쳐냈다.
억 -
몸이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어우 – 무겁다. 이게 바로 내 삶의 무게란 말인가. 망할 중력! 관자놀이의 맥박이 쿵쾅쿵쾅 울렸다. 눈알이 튀어나오진 않겠지. 괜찮아. 괜찮아. 젠장. 이제 끝이다. 이 진자 운동이 끝날 때쯤 나는 아마 죽겠구나. 어쩐지 조금 설렌다. ... 사나흘 쯤 후 발견. 그러면 S는 조금 울 것이고 그래, A의 품에 안겨 울겠지. 모두들 뻔히 오해할 것이다. 내가 죽는 이유... 그래 내가 죽는 이유... 그건 A와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고... 이제 A는 이번에 발표된 논문 덕에 미국 유명 대학의 교수 자리를 제의 받을 것이다. 나는 한낱 술안주가 되겠지.
그래. 네가 이겼어.
차라리 A를 죽이고 나도 죽을 걸 그랬나? 하지만 S를 생각해야겠지. 그녀를 슬프게 하는 건 나로도 충분해. 남자는 몸을 준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 황홀하게 흩날렸다. 마침 혜성의 불기둥처럼 까마득한 석양이 지고 머리카락 너울이 쳐대는 그녀의 뺨이 따뜻해 보였다. 오로라를 본다면 아마 그런 기분일 거야. 생각해보니 한 번도 오로라를 본 적이 없어. 뱀의 혀처럼 유혹적인 빠른 놀림. 그렇게 빨리 움직인다지? 그렇게 아름답다지? 그렇게 죽고 싶게 만든다지? 그것이, 그래! 뭐 까짓 것 죽어도 여한은 없어. 한 번도 내 것인 적은 없었지만 – 느낌이란 건 느껴 보았지. 가령, S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순간에는. 이 여자가 내 운명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게 가능한 듯 억지스럽게 자신감을 내세우던 때였다. 아아 매우 자기기망적인 시간들. 검은 네임펜으로 날개깃을 장식한 쥐방울만한 지빠귀새처럼... 나는 도태되는 거야. 살해당하는 거야. 날 죽인 건 A가 아니야. S. 바로 너라고.
안녕 -
그 때 벨이 울리고 나는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다.
아니 진짜 전율. 아................................................... 감전이구나! 뇌의 전기가 마지막 남은 산소를 소모하며 나에게 속삭였다. 더 빨리 죽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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