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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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늦깍이 새댁의 생활밀착형 신화 읽기
우리는 합이 85살에 결혼했다. 남들 늦둥이 고려할 때, 박물관 손자 볼 나이, 임진왜란 때로 올라가면 평균수명 근방이다. 결혼식은 부활절 바로 다음 주 토요일이었다. 4월 중순부터는 못자리 해야 해서 바빠서 우리집 큰일에 손님들이 못오신다고 농사짓는 부모님이 정해준 데드라인 직전이었다. 그날 우리 직장에 결혼식이 두 건 예정되어 있었다. 하나는 내 것이고, 다른 건 아들을 결혼시키는 분이었다. 부활절 전 40일 고난기간에는 가능한 한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고 그분이 내게 와서 이야기를 해주어서 절기가 그런 줄 알게 되었다. 본인 때문에 기관장이 내 결혼식 대신 그 댁 아드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셔서 아유 별 말씀을요, 축하합니다 했다. 덕분에 나는 결혼기념일을 꽃피는 부활절의 흥성스러운 느낌을 연합하여 기억하게 되었다. 신혼여행 떠날 때 벚나무는 아직 몽오리를 꽉 다물고 있었다. 매일 비가 내리는 신들의 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반 바지를 입고 쏘다니다 돌아와서 아직 ‘친정’이 아닌 ‘우리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는 환하게 피어 있었다. 주례로 그가 존경하는 직장 선배님을 모셨다. 우리더러 서로 맞춰가라는 기출답안과 함께 결혼기념일마다 단 둘이서 여행을 가고,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라는 주례사를 해주셨다. 대학생 3 자녀를 둔 그 부부가 20여년 이상 그렇게 해오고 계셨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다압리 매화마을, 지리산 산수유 마을, 고창 선운사 동백꽃 군락, 김동리시인이 들었을 법한 육자배기 가락쯤 품고 있을 전라도 아지매가 해주는 음식상, 섬진강 강둑길을 떠올렸다. 봄볕을 즐기며 둘이서 손 잡고 산책하는 그림을 그렸다. 주례사는 결혼기념일을 ‘봄꽃여행’과 이중으로 연합시켰다. 덕분에 선물이 나오는 크리스마스나 생일 같은 날로 자리매김되었다. 나는 아직 첫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지 않았다.
늦은 결혼의 장점을 꼽는다면 첫째 단촐함이다. 결혼이란 게 ‘둘이서 결혼에 골인했어요. 그 뒤로는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끝’이 될 수 있는 동화가 아니라 오프닝 게임인 결혼식, 개업축하떡 같은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본 게임인 단체전 대륙횡단 마라톤 레이스가 시작된다는 정도의 세상물정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마흔 넘도록 살아오면서 결혼의 이런저런 실질적인 빛과 그늘에 대해 목격하고 있었으므로 결혼 거품이 적었다. 그래서 결혼식과 살림장만을 간소하게 했다. 이미 가족에서 독립해서 제 명의의 전세집을 구해서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구비해서 몇 년 살고 있어 더 수월했다. 이건 딴 소린데, 내가 독립을 할 때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결혼할 때 새로 사야 하는데 그냥 중고로, 작은 거로 장만해서 설렁설렁 살다가 새로 싹 장만하라고. 말 안들었다. 내 취향의 양문형 냉장고를 사고 이불을 빨 수 있는 세탁기를 샀다. 베란다와 실내에 관엽식물을 들였다. 실질적인 내 살림살이는 그때 시작된다고, 결혼하면 다 들고 갈거라고 했다. 나는 그때 이미 서른 일곱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부터 결혼하기 시작한 친구들이 애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빠른 친구들은 중학교에 보내놓고 마흔 고개를 넘어가며 결혼과 육아의 뒷춤에 치워두었던 자신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다면 나는 혼자 사는 이들에게도 때가 되면 중년기 전환이 찾아온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건 계절처럼 공평하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진짜 나를 드러내며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싶게 하는 힘이 중년에는 있는 것 같다. 두번째는 안정감이다. 직업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감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어느 정도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대한 자기 스타일을 인정하는 나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탐색이 이루어졌으므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같이 살아갈 동반자를 선택하는데 재혼커플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 것 같다. 여자의 외모와 생식능력, 남자의 경제력 또는 그걸 뒷받침할 학력이나 직업은 언제나 짝짓기 상대를 고르는 제일 기준이었다. 그런데 만혼자들은, 결혼을 하든 안했든 평생 가까이 사귈법한 베프처럼 나와 함께 흘러갈 사람을 먼저 구한다.
불편하거나 감수해야할 점은 2세 문제다. 과학의 힘, 특히 산부인과의 의존도가 높아진다. 일단 예식장을 잡자마자 산전검사를 하고, 결혼과 동시에 난임센터에 등록했다. 나이 차이 많이 지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이란성 쌍둥이를 자연분만해서 선녀처럼 양팔에 하나씩 안고 퇴원한 배우 이영애씨와 그녀를 뒤에서 호위하는 남편, 딱 이 그림이 우리의 로망이다. 내가 읽은 바로는 산후조리도 남보다 길게 공을 들여야 하고, 임신기간에도 여러가지 요소에 대비를 해야한다. 만혼인 우리에겐 금과옥조가 있다. 진인사대천명, 열심히 해보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자.
내게는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단 한 가지 있었다. 이게 어찌 보면 이것이 ‘결혼’에 대한 나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바로 스님을 모시고 법당에서 결혼하는 거였다. 성당이든 교회든 종교회당에서 하는 결혼식은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종교활동을 해온 사람들 고유의 결혼로망이리라. 나는 결혼법회의 자원활동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주례법문을 제일 많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서의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이런 장면 속에 놓이길 꿈꾸었다. 결혼법회는 여느 법회와 마찬가지로 한 편의 엄숙하고 경건한 의례다. 여자는 신부대기실에서 무겁고 불편한 무대의상을 입은 채 앉아 있지도 않고, 분장하지도 않는다. 신랑과 신부는 간편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웃으면서 그 개인 잔치를 축하해주러 전국각지에서 모인 손님을 환영한다. 언제 만났고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고, 손도 잡아본다. 감 따먹고 자전거 타고 놀던 친구와 직장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단지 우리를 지켜보고 축복해주기 위해 다른 일을 제쳐두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먼 곳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와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게 고맙다. 주례선생님은 나를 잘 알고 계신 존경하는 스승님을 모신다. 부처님의 전생담 중 선혜동자가 부인을 만나던 설화가 암송된다. 그 설화처럼 여자가 들고 들어간 일곱 송이 꽃 중에서 두 송이를 먼저 남자에게 주면서 ‘저와 결혼해주세요’ 청혼을 하고, 혼인하는 남녀는 꽃송이들을 모아 부처님께 올리면서 도반으로서 함께 손잡고 길을 가겠다는 서원을 드린다. 이제 모두를 향해 두 사람이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생의 멘토인 스승님으로부터 우리가 부부로, 어버이로, 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침이 주어진다. 두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두 사람은 진심으로 연합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의 결혼식은 드레스와 폐백 도우미 분께 수고비를 따로 드려야 하나 말아야 심난해하면서 15분만에 끝이 났다. 어어어 하는 동안에 웅웅거리며 흘러가는 아침조회 같았다. 폐백은 또 어떤가. 우루루 끝이 났다. 사진사는 그 와중에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면서 이런 저런 포즈를 요구했다. 결혼의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례들이 형식만 남고 실질적인 의미는 사라진 지금의 모습을 내가 경험했다.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속이 많이 상했다. 분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정이 겹친 가운데,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 번데기처럼 말려있었다. 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지 못했다. 청첩장으로 우리 집 쪽에 200장을 찍었다. 부모님 지인을 위해 100장 보내고 내가 100장 받았는데 하나도 보내지 못했다. 어떤 지인은 그걸로 나에게 상처를 입었고, 어떤 이는 나의 모남을 추측했다. 가장 슬펐던 건 내가 제대로 축하하고 기뻐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혼을 결정한 사랑, 내게는 10년만의 경사인 그것조차 하찮아 지는 것 같았다. 미안했다. 하긴 나도 우리집 네 형제들의 백일 사진, 돌사진이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아서, 사느라고 바빴겠지 하면서도 부모님께 내심 서운했었다. 결혼식을 즐기지 못하는 건 원하지 않던 예식장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그만큼 사랑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런 실망의 기운을 배경으로 한다. 스스로 빈 예식에 내용을 채워 넣는 작업을 천천히 그러나 꼭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결혼이라는 이 프로젝트를 진짜로 잘 해보고 싶다. 그건 인생의 두번째 단계이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길 염원하는 마음이 항존했었다. 나무늘보 속도에 갈짓자 행보였지만 그 방향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미션을 클리어하듯, 하나씩 고개를 넘으면서 하나씩 관문을 통과하면서 겪을 것을 겪고 배울 것을 배워 왔다.
현대에 의례가 사라져서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었다면 예전에 이런 것이 생생히 살아 있을 때 의례를 주관하는 이와 참여하는 이들 사이에 공유하고 있던 것, 그리고 가르쳐지던 삶의 지혜를 모아보면 될 것 같다. 구체적으로는 연애하고 결혼하고, 결혼 후 적응하는 1년 동안 내게 다가왔던 물음과 문화충격에 대한 것을 다루려 한다. 원가족에서 나를 분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람이 내 짝인 걸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결혼 안에서 사랑이 변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질문들은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여성들에게는 한번쯤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3 부분으로 나뉜다. 신화 속의 여성들의 삶을 재료로 1장은 여자가 자기답게 살게 되는 과정에 대해, 2장은 발달과업으로서의 사랑, 3장은 통과의례로서의 결혼을 다룬다. 이 안에서 나오는 생활 속 질문에 대해 신화의 지혜를 들어보려고 한다.
왜 신화를 가지고 탐색하려는 지를 말해야겠다. 딴 이유가 없다.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고, 신화는 이야기고 내가 생활 속에서 즐겨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가 케케묵은 화석이라고? 천만의 말씀.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미녀와 야수의 화신과 오이디푸스의 후예가 오늘 뉴욕의 4번가와 5번 가 사이에서 좌회전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알아 보았듯이 오늘 광화문 사거리에서 횡단보도 불빛이 깜빡일 때 뛰고 있을 수 있다. 인류의 무의식이라는 매우 깊은 우물에 수원을 댄 나이 많은, 그래서 지혜로운 이야기 신화는 꿈처럼 인종과 언어 대륙의 공용어일 수 있다. 출근을 앞둔 아침,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골치가 아플 때 내게 프시케 신화가 힌트를 준다. 여러 가지 곡식이 뒤섞인 곡식더미 앞에 앉아 망연자실한 프시케가 내 모습이었다. 그건 어릴 때 읽은 동화 속 콩쥐가 찧어야 할 벼를 앞에 둔 모습이기도 하다. 찬찬히 곡식들을 들여다보며 우선순위와 가슴에 물어가며 분별을 해야 하는 과제 앞에 있었다. 나답게 살고 싶고, 사랑과 결혼 안에서 잘 해보고 싶은 나의 관심들이 신화 속에 다 들어 있었다. 신기한 건 내가 어릴 때 들어왔던,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 어딘가와도 닮아 있다. 인류의 지혜가 따사로이 타오르는 모닥불 가에 앉아, 사랑과, 결혼이 잘 익어가도록 나를 또는 우리를 닮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요즘은 혼수를 모두 돈으로 사지만 예전에는 모두 일일이 손으로 만들었다. 내 어머니는 요즘도 경대 서랍에 처녀적에 만든 십자수 테이블보를 간직하고 있다. 이미 누런 얼룩이 생겼다. 빨아도 안 진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2년간 농사지은 목화를 모아서 일일이 할아버지가 솜을 터서 만들어준 이불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다. 혼처가 정해지기 전에 한 해 농사 짓고, 정해지는 그 해 한 해 농사를 더 지었댄다. 이모가 바느질을 하고, 첫아들을 낳은 이모부가 몇 십리 길을 지게로 지어서 갖다 주었다고 했다. 모란꽃이 그려져 있다. 그걸 덮지는 않더라도 엄마의 밑알 같은 살림으로 끝까지 간직하실거다. 나도 내 손으로 일일이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어갔다. 이 책은 짓는데 2년 걸린 나의 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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