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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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전국시대(B.C. 403~221) 중엽에 소진(?? ~ B.C. 317)이라는 정치가가 있었다. 그는 제나라에서 귀곡자(귀곡선생)에게 친구 장의와 함께 가르침을 받았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진, 한의 중앙집권적인 군현제가 실시되었던 과도기적 시기인 춘추시대와 달리, 진나라가 한, 위, 조로 분열되며 시작된 전국시대는 이전까지 존중되었던 ‘예’의 정신이 쇠퇴하며 신하가 왕을 죽이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등 약육강식의 시대인 과도기이자 혼돈기였다. 이중 전국시대의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까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툰 일곱나라인 진, 초, 연, 제, 조, 위 한을 ‘전국칠웅’이라 일컫는다. 소진은 그들 중 연에서 활약했다.
그는 오랜 학문에도 제대로 된 벼슬을 얻지 못해, 농사일은 하지 않고 입과 혀만 놀리는 백수로 인식되며 집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오랜 시간의 학문을 통해 제대로 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없다면 이 또한 쓸모없음을 깨닫게 된 그는 유세를 통해 정치에 입문,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쓰임 받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쉽지 않았다. 진 혜왕과 조 숙후에게 스스로를 유세했지만 그는 등용되지 않았다.
소진이 정치가로서 빛을 보게 된 건 이후 찾아간 연 문후를 만나면서였다. 소진은 그 자리에서 연 나라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안정이 남쪽으로 조나라가 있어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사대국 진의 침략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임을 주장하며 연이 우선 걱정해야 할 대상은 천하통일을 노리는 진나라가 아닌 백리 거리에 인접해 있는 조나라 라고 주장했다. 이에 소진은 조나라에 대한 설득을 시작으로 열국 여섯나라(연,조,한,위,제,초)가 동맹을 맺어 진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 문후는 이를 받아들여 소진에게 동맹결성의 임무를 맡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소진의 동맹결성임무는 진에 대항 할 나머지 다섯 나라의 왕(조 숙후, 한 선왕, 위 양왕, 제 선왕, 초 위왕)들을 만나 각국의 강점과 약점을 짚어가며 설득하는 뛰어난 유세를 통해 마침내 6국의 동맹을 이끌어낸다. 북쪽 연나라부터 남쪽의 초나라까지 6국의 동맹을 이끌어낸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합종책이다.
소진의 합종책은 시작부터 각국간의 이해관계와 사정이 다르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진나라과 독자적인 동맹을 통해 자국에 대한 진나라의 공격을 유보하는 정책론, 즉 진나라의 탁월한 정치가 장의에 의해 펼쳐진 연횡책의 안정성과 효율성에 밀려, 결성된지 15년만에 와해된다. 하지만, 부국강병을 통해 천하통일을 노리고 있는 진나라의 공격을 15년이나 지연시켰다 점에서 합종책은 상당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더 지니어스 : 룰브레이커(이하 ‘더지니어스2’)’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기본 틀은 12명의 패널들이 참가해 매회 일정 룰 안에서 게임을 치르고 최종 살아남은 자가 상금을 획득하는 형태이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그룹 ‘룰라’의 이상민, ‘젝스키스’의 은지원, 개그맨 노홍철 등의 연예인을 비롯해, 마술사 이은결, 변호사 임유선, 스타크래프트 우승자로 유명한 전 프로게이머 홍진호, 임요한, 서울대 전산시스템을 해킹해 김태희의 사진 등을 꺼내 본 것으로 유명한 서울대 출신 천재 프로그래머(해커) 이두희 등이 비연예인으로 참가하고 있다. 모두들 두뇌, 눈치, 잔머리 등 한 ‘게임’한다는 사람들이 모였다.
며칠 전 전파를 탄 방송에서 제시된 게임은 ‘독점게임’이었다. 석탄, 물, 나무, 폭탄 등이 그려진 8장의 카드를 가지고 참가자들간의 카드 교환을 통해 8장의 카드를 모두 같은 자원으로 만들어, 즉 자원을 ‘독점’해야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천재 프로그래머 이두희가 탈락한 것이다. 문제는 그의 탈락 자체가 아니라 탈락 과정이었다. 이두희는 게임과정에서 자신의 카드를 다른 참가자들과 교환하기 위해 필요한 ‘신분증’을 잃어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참가자중 하나인 은지원이 우연히 이두희의 신분증을 획득하고 이를 주지 않고 속였다는 것이다. 이두희는 결국 게임에서 배제된 꼴이 되었고 제대로 된 게임 한 번 하지 못하고 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방송을 보며 상당히 불편한 마음 감출 수 없었다. 방송 타이틀의 부재가 ‘더 룰 브레이커(규칙파괴자 또는 규칙을 깨는 자)’이기는 하나, 게임시작 전부터 방송인들이 연합을 구축, 강력한 우승후보인 시즌 1의 우승자 홍진호를 떨어뜨려야 한다고 견제하는 편가르기와 또 다른 우승후보인 이두희를 게임에 참가할 기회 자체를 박탈해버리는 일명 ‘왕따’ 행위 등은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 씁쓸한 면 없지 않았다. ‘배신과 신뢰는 입장차이이다. 누군가를 향한 배신은 누군가를 향한 신뢰일 수 있다.’ 등 제작진이 띄운 메시지나 ‘두희야, 형이 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사회는 더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등의 수습하는 멘트들은 무조건 이기면 된다는 결과 앞에 사족처럼 붙이는 구차한 변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가자들 중의 한 명인 ‘이상민’을 보며 전국시대의 ‘소진’이 떠올랐다. 동진(東進)을 추진하며 호시탐탐 천하통일을 누리고 있는 군사대국 진나라에 비하면 북쪽에 위치한 연나라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이런 군사적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소진이 택한 정책은 6개의 열국들끼리 힘을 합쳐 동맹을 결성하는 합종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약자로서 강자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중 하나는 편먹기이다. 암암리에 ‘방송인 연합’을 주도한 건 가수 출신 연예인인 ‘이상민’이었다. 그는 방송 시작 전부터 ‘비방송인 출신(임요한, 홍진호, 이두희)들이 사적인 모임을 가지며 방송인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뭉쳤다’ 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방송 사이사이에 ‘홍진호나 이두희는 너무나 강력한 상대이기 때문에 빨리 떨어뜨려야 한다’는 식으로 방송인들의 연합을 부추겼다.
게임에서 승리하고 상금을 획득하기 위해 참가한 한 사람으로서, ‘이상민’의 선택은 승리(생존)를위해서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홍진호와 임요한은 수년간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며 (어림잡아) 최소 수만 번의 경기를 해온 경험자이자 베테랑이다. 그들은 게임의 규칙 활용과 상대방과의 심리전에 능한 고수들이다. 아울러 ‘서울대 출신’, ‘해커 출신’, ‘천재 프로그래머’ 등으로 불리는 이두희 또한 그 수식어가 말해주듯 머리싸움의 절대고수이고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혀왔다. 그런 쟁쟁한 참가자들과의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약자’라고 생각되는 ‘이상민’은 이들을 이길 작전으로 연합을 택했다. 그리고 그 연합이 굳건해질 수 있도록 방송 사이사이 이간질과 부추김, 배신을 서슴지 않았다. ‘게임은 이겨야 한다’는 전제에서는 그리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주 방송이 방영된 뒤, 이상민과 은지원을 비롯한 몇몇 연예인들을 향한 네티즌들의 비난이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소수의 비방송인을 향한 방송인들의 편가르기와 연합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고, 탈락자 이두희의 굳은 믿음을 뒤로 하고 몇 번에 걸쳐 배신을 한 이상민과 은지원의 행동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 방송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방송 뒤 약 2만건 이상의 비난과 불평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우리는 단지 오락프로그램에 불과한 방송 한 편에 왜 이리 분노하는 것일까? 이는 방송을 본 많은 사람이 느꼈듯, 시청자를 불편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든 원인이었던 ‘배신’,’편가르기’, ’왕따’와 같은 반칙(?!)들이 단순히 tv 속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배신, 편가르기, 왕따, 그로 인한 불공정함과 이에 희생되는 선의의 피해자들.’ 이런 행위와 모습들은 인간이 살아온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만연해 있는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1등만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우리는 경쟁에 내몰리고 있고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며, 주류에 끼기 위해서는 비주류를 배척하고 때론 왕따도 시켜야 한다. 그게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다. 강북아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강남아이들을 이길 수 없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가 가랑이’만’ 찢어지는 꼴이다. 스펙 인플레이션으로 토익 900점을 넘고도, ‘사’자 자격증을 따고도 취업은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 겪으로 힘들다. 평범한 직장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로얄패밀리를 뛰어 넘어 CEO가 될 수 없고, 빈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 이 수많은 관념들이, 맞던 틀리던 상대적 박탈감과 불공평함에 대한 이런 생각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와 같은 피해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인데, 즐겁게 보기 위한 오락프로그램에서 마저도 이 같은 부조리들을 발견해내니, 그 불편함 감추지 못하고 그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 아니겠는가. ‘더 지니어스2’의 참가자들은 제목 그대로 ‘룰브레이커’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잘못한 것은 ‘규칙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규칙을 과도하게(?!) 어김으로서 tv 시청을 통해 잠시나마 잊고 싶어했던 현실, 부정적이고 불편한, 그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일 수도 있는 현실을 상기시켜줬다는데 있다.
“군주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 마키아 벨리 [군주론] 중
메디치가를 반대해 공직에서 물러났던 이탈리아의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서술했다. 하지만 그는 덕이 있는 지배가가 되는 길을 조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권력의 획득에 유용한 흉계가 몇 가지 있고,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때론 무자비 해야 하며 이는 선악의 문제와 별개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더 지니어스2 : 룰 브레이커’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우리 사회 전반 뿐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염증을 느껴온 정치판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 아닐까. 방송 한 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웃자고 봤는데 죽자고 덤벼들고 있다.
p.s. ‘더 지니어스2’는 상업적인 성향이 가장 짙은 케이블채널에서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 방송은 녹화프로그램이고 모든 프로그램을 촬영한 뒤 수 많은 편집을 통해서 전파를 타고 있는 방송이다. 몇 해전부터 사람들의 입을 오가는 ‘악마의 편집’이라는 용어는 이 프로그램에서도 유요하다. 전반적인 편가르기 분위기를 진두 지휘하는 ‘이상민’,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지만 사이사이 이간질 또는 부추기는 멘트를 짧고 굵게 날리고 있는 ‘조유영’, 어느 정도 전략이 짜여지면 이를 실행해 옮기는 행동대장 ‘은지원’ 그리고 피해자 ‘이두희’처럼 각자의 역할이 있다. 이런 역할 분배는 사전의 철저한 분석과 캐스팅, 그리고 편집을 통해서 의도된 부분이 크다. 결국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는 출연자들 또한 제작진이 만들어놓은 교묘한 게임 판 위에서만 움직이는 ‘말’들에 불과하다. 마치 인형술사(puppeteer)에 의해 보이지 않는 줄에 의해 철저히 조정되는 인형(puppet)들 아닐까. 결국 합종과 연횡이 난무하는 경쟁 속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떨어진다는 결말도, 이로 인한 시청자들의 불평과 분노도, ‘더 지니어스’의 제작진은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는 상당하니까. 나 또한 정기적으로 보지 않은 이 방송을 유료로 결재하고 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들의 의도에 맞춰 철저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욕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막장드라마’의 마약 같은 힘을 ‘더 지니어스’의 제작진은 교묘히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짜증내면서 볼 필요 없다. 짜증이나고 분노가 치솟으면 그저 TV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잠자는게 최고다. 웃자고 보는 예능인데 죽자고 덤빌 필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리모콘은 당신의 손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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