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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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나는 연구원 최종 합격이 발표될 때까지 이 놈의 후기를 안 쓰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마을버스에 KTX에 택시에 산 넘고 물 건너 다녀온 면접여행의 끝까지도, 나는 소심하게 한 발 빼기의 자세로 사태를 일단 지켜볼 요량이었다. 너무 맘 주지 마라. 들뜨지 마라.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한 발은 문턱에 걸쳐 놓고 일단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였다.
띵똥거리는 카톡 메시지에 10기 전원 합격의 소식이 날아왔다. 으하핫, 전원 합격이란다~ 불과 10초 전까지만 해도 꽁하니 후기 따위 합격 전엔 써주지 않겠다며 버티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린다. 역시, 수유리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구나! 22년 간 나를 키워준 동네답게 이번에도 길을 열어 주었구나. 나의 사전에 재수 따위는 없다며, ‘한 큐에 끝!’을 인생의 모토로 삼아왔던 내게 씁쓸한 좌절을 맞보게 해준 변화경영연구소가 드디어 문을 열어 주었다. 2014년 3월 16일 밤 10시 45분. 이 순간의 의미를 일 년 뒤, 그리고 십 년 뒤 나는 어떻게 정의하게 될까.
안 그래도 어색한 첫 만남이 더욱 민망하도록, 나는 일행 중 맨 마지막으로 첫 도킹 장소인 오장동 함흥냉면집에 들어섰다. 3월 15일 오후 12시 10분. 글로만 만났던 동기와 선배들을 대면하는 것은 어색하고 신기하다. 한 달간 레이스를 함께 한 우리들은 서로를 이미 좀 아는 것도 같았는데, 글의 이미지와 실제 인물의 간극은 크다. 거기다 본명과 별명이 섞이니 이건 뭐 바벨탑의 혼란이 따로 없다. 이 어색한 혼돈의 순간에도 냉면은 맛있고 만두는 따끈하니 고마울 뿐이다.
점심을 마치고 산책도 하고 남은 시간도 때울 겸 사람들을 부추겨 찾은 4.19탑은, 여전했다. 한가하고 휑하고, 왠지 햇살이 가득해도 쓸쓸하던 그 곳. 어릴 적 겨울마다 동네 친구들이랑 우유곽 아이스 하키를 하던 연못이 사라진 게 아쉽지만, 구석 구석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보여 안심이 됐다. 구상의 시가 쓰인 제단 앞에서 다 같이 묵념을 하고 사당에 올랐다. 기억 속에 유령의 집처럼 무거운 나무 문을 거대한 자물통으로 잠근 채 쇠사슬로 묶여 있던 사당은, 완전히 개축되어 있었고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누구든 들어와서 보고 고인을 기릴 수 있도록 개방된 사당의 모습에서도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살던 집 건너편, 개천 옆 저택들이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그 길을 지나, 같은 반 친구네 집에서 하던 미린 슈퍼를 지나, 동네 유일한 버스노선 127번의 종점을 지나, 할머니 손잡고 오르던 백련사 입구를 지나, 면접여행의 종점 아카데미 하우스에 도착했다. “와아~ 너무 좋다!” 먼저 방에 들어선 동기의 입에서 나온 탄성을 나도 모르게 이어받았다. 서른 명이 들어가도 문제없겠다 싶은 널찍한 방 전면으로, 탁 트인 산과 숲이 펼쳐진다. 이런 전망 좋은 방을 어찌 알고 준비했을까? 행사를 준비한 선배들의 정성을 이 방만 보아도 알겠다.
오늘의 첫 관문. 개별 인터뷰다. 강씨 문중에 난 덕에 여기서도 나는 첫 타자다. 인터뷰 따위, 아무 것도 아니야.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앉은 테이블 건너편에 네 명의 선배들이 자리잡고 있다. 끝까지 할 수 있겠어요? 찾는 데도 많고 관심사도 많아 보이는데,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일년간 이 과정을 하려면 가족, 특히 남편의 지원과 이해가 필수적인데, 괜찮겠어요? 인터뷰는 열의와 성의와 위장의 예술이다. 그것이 취업이나 언론보도를 목적으로 한 것일 때는 그렇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는 그런 잔 기술에 기댈 수가 없다. 또 다시 간신히, 평정을 가장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답을 한다. 가족의 이해와 지원은, 지금 구하고 있다, 설득하겠다고 답한다. 사실 이 부분은, ‘아직’ 자신이 없다. 그저 이 일을 하겠다는 의지 말고, 지금 내 주변의 여건은 아직 풍족하지 못하다.
본인이 동기들에게 연구원과정에서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뭔가요? 그게… 어… 내가 팀에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은 브랜딩 서비스와 간식 조달, 그간 섭렵한 다채로운 영화와 만화를 비롯한 장르문화의 레퍼런스 서비스라고 답한다. ‘아, 허접하다’라고 내가 꼬리를 달 뻔 했지만, 어쩌랴. 지금 나는 많이 가난하다. 심장이 바짝 쫄아서 아무 일도 못 저지르는 동면기를 지나는 중이란 말이다. 가진 재주도 없고 돈을 꽃잎처럼 흩뿌릴 여유가 없거든 시간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부산과 서울 사이의 거리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나의 여유 시간을 홀라당 잡아먹어 버릴 거라는 쪼잔한 계산으로 머리 속은 더욱 복잡해진다. 과장도 거짓도 담지 않으려던 인터뷰는 나 스스로도 답답하게 끝이 났다.
저녁, 오교장님이 봐두었다는 능이버섯백숙집은 놀랍게도, 선덕중학교 자칭 타칭 대표 미녀로 통했던 지희네 집이었다! 지희가 여전히 그 집에 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추억이 반가웠다. 그리고 푸짐하게 차려 나온 오리 백숙은 더욱 더 반가웠다. 뜨겁고 진한 국물과 쫄깃 고소한 오리 고기. 이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아카데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은, 중학교 시절 다니던 골목길로 질러 왔다. 익숙한 집들과 개천길을 따라 걷는 동안, 같이 걷던 선배들과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어색하기도 했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긴 언덕길을 오르는 내내, 보름달이 말똥말똥 우리를 내려다 봤다.
맥주와 와인과 하모니카 연주 속에 과제였던 기획안 발표가 진행됐다. 나는 나대로 동기들은 동기들대로 어렵게 준비한 자료를 발표하고 오교장님의 생각을 들었다. 아하, 그랬던 거군! 과제를 받았을 때 막막했던 부분들의 의도가 보이자 가슴이 뛰었다. 10기들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면서, 연구원의 성과와 의미를 압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면, 거기에 먼저 이 길을 간 구본형 선생님과 선배들의 경험을 녹여낼 수 있다면,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와는 또 다른 멋진 책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밤의 끝은 분명히 술이 잡을 거라 예감한 터였지만 선배들이 싸들고 온 맥주와 소주와 와인이 동날거란 생각은 못했다. 날카로운 필력과 달리 너무 순둥이 같은 인상들이라 놀랐던 그녀들, 상상도 못한 주력(酒力)을 보여준 앨리스와 에움길은 진정한 10기의 대표 주자(酒子)들이었다. 오 마이 갓. 차라리 좀 취해다오 싶었던 밤은 저 혼자 깊어가고 나는 피울님의 보이차 공양 덕분에 어이없게 말똥한 정신으로 무반주노래자랑 시간을 맞고 말았다. 뒤끝 작렬이었지만 선곡과 감정 전달의 달인인 ‘구달’님의 활약에 이어, 보이차보다 더 그윽한 노래실력을 보여준 피울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가사 도우미 없이 꿋꿋이 노래를 부른 동갑내기 왕참치와 일어나서 아파트를 열창한 역시나 동갑내기 희동, 거기다 센스쟁이 해언은 주옥 같은 가을방학의 명곡을 들려주었다. 새댁답게 수줍은 목소리를 들려준 녕이와 빼지않고 씩씩하게 노래를 불러준 찰나님까지. 나는 해언의 도움 덕에 ‘언젠가는’을 박자음정 무시하고 가사 컨닝하며 끝까지 불렀다. 오교장님은 역쉬 김광석의 팬답게 멋진 노래실력을 보여주었다.
삼삼 오오, 원투원 대형에서 다시 올 투게더 서클로 헤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덧 세벽 네시. 안 그런 척 태연한 척 애썼으나 사실 쭈뼛거리느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동갑내기들과 말할 틈을 놓친 것이 아쉬웠다. 술 잘 하는 두 여인네들에게 최고의 약물경제성을 자랑하는 나의 한잔먹고 산화하기 신공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피울님의 보이차가 ‘여명’보다 효과가 좋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그지 깡깽이’처럼 부른 것도 아쉬웠다. 아침에 여인네들이 삼삼오오 아침 산책을 나가던 때에 차마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지 못해서 결국 산행을 못 한 것도 아쉬웠다. 이불 속 게으름이 올 해 가장 먼저 타도할 적이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
상상했던 것처럼 그윽하고 낮았던 로이스 선배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참 좋았다. 재수생을 알아봐 준 9기 선배들의 마음씀은 참 따뜻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오교장님과 유교감님의 콤비 플레이는 왠지 모르게 재미났다. 해언이 소개해준 기와집 추어탕이 우리 식구도 좋아하던 남원 추어탕이 자리만 옮긴 것임을 알았을 때는 더욱 반갑고 맛있었다.
이제 진정 아쉬웠던 순간을 고백하자. 마음에 걸렸던 인터뷰가 끝날 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네 명의 선배들 중 누가 질문한 것인지, 내가 무슨 답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부끄러운 내 꼴이 들통날까봐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속에 삼켰다. 사실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조금 낮은 지대를 지나고 있다고. 함께 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나를 던져 넣을 수 있을 때까지, 나를 회복할 때까지 조금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 온전한 나의 공헌을 전하고 싶다고. 이것이 영혼까지 쭈뼛댄 내 면접여행의 후기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할 (거라 믿는), 나의 자기변화원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가면서 회복하세요.
글에 로이스가 들어가서(^^) 다정한 맘으로 한 자 남깁니다.
일일히 댓글 못다는 궁색함을 종희씨에게 댓글다는 것으로 안위합니다.
그대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대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새로 시작하는 곳의 특별한 공기가,
제게 필요했답니다.
그나마 모임에서 조금 길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던 종희씨,
낮은 지대를 지나고 있다고 마음 안자락을 펼쳐 보여줬지만
저는 오히려 글에서
자신을 믿어주고 다독이며 출발선에 남다른 각오와 기대로 선 종희님을 보게 되네요.
간절함과 힘을 느낍니다.
10기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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