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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밤, 열무냉국수
시도 때도 없는 야근과 주말근무에 찌들어 살던 시절, 카피라이터가 신내림 받고 썼나 싶은 광고 카피가 있었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들기던 여자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릴 새도 없어 후 하고 입김을 불어 날리면 바로 장면 전환. 여행이라도 떠났는지 시원하게 내달리는 차 창에 손을 내밀며 행복해하는 모델의 싱그러운 미소, 그리고 화면을 채우는 문장.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아, 정말이지 신탁과도 같았던 그 문구만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그때 회사는 본사에서 급파한 외국인 사장의 부임과 블록버스터급 신제품 출시에 맞춰 조직 개편을 준비 중이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조직 최적화’라는 허울 좋은 구조조정을 기획하는 관리자들은 본연의 업무 외에도 대부분 소속 팀원들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대내외비 프로젝트까지 책임지느라 어마어마한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일의 성격 상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사방에 있는 근무 시간에는 펼쳐 놓기도 뭐한 일거리들이니 수개월간 야근과 주말근무를 피할 수 없다. 휴가는 언감생심, 주말은 밀린 잠을 보충하고 엄마 고픈 아이들을 상대하기에도 모자란다. 이 과도한 업무와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을 잠시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소맥과 삼겹살의 위로뿐… 야근을 하다 눈이 마주친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일한 당신, 마셔라!’를 외치며 달려가는 곳은 늘 회사 뒤편의 고기집이었다.
낮에는 먹다 남은 밥을 긁어 모아 눌린 게 아닐까 의심스런 누룽지정식과 지난밤 팔다 남은 차돌배기 부스러기를 넣은 게 틀림없는 된장찌개정식을 팔지만, 밤이면 비교적 저렴한 삼겹살과 갈비살을 주력상품으로 하는 ‘곰 뭐시기’라는 식당은 우리의 회식 메카였다. 사무실 창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회식을 함께 할 동지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직 채워 넣지 못한 엑셀의 빈칸과 파워포인트의 텅 빈 슬라이드와 씨름하던 나는 엉덩이가 의자에 눌러 붙은 듯, 차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다. 강부장, 나는 내일 오전 미팅 발표야! 나도 가는데! 동료의 채근에 억지로 모니터를 끄고 일어선다. 에라, 내일 새벽에 출근하지 뭐. 한두 번 하는 장사야?
될 대로 되라며 들어선 고기집은 이미 도착한 동료와 상사가 피워댄 고기 연기로 매케한 구름 속이다. 앉아, 앉아! 벌써 소주에 맥주가 몇 순배 돌았는지 홍안의 중년들이 여기 저기 출몰했다. 시작은 호기롭게, 힘 딸리는 당신을 위한 ‘한우(라고 믿고 싶은) 갈빗살’을 주문한다. 이런 회식 자리에는 불판의 고기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집게를 독점하는 ‘구이의 달인’과 화려한 손기술을 자랑하는 ‘제조의 달인’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제조 상궁이 순결한 소맥을 돌리고 회오리주에 트로피주에 뱀파이어주에 마라톤주까지 온갖 신기술을 선보이고 나면, 밑 빠진 술독처럼 무한 용량을 자랑하는 상사는 모든 참석자들의 표적이 되고, 최소 용량으로 최단 시간 내에 만취상태에 도달하는 능력자들은 이미 의무를 다하고 행복하게 갈빗살과 삼겹살에 집중한다. 넉넉한 청상추 한 장을 집어 핏기만 가신 고기에 저민 마늘을 한쪽 올리고, 풋고추에 파채를 얹어 쌈장으로 마무리한 녀석을 한 입 가득 집어 넣는다. 어이, 대충 먹었으면 이젠 좀 달려야지! 잔 비었다? 여기 저기서 날아드는 술잔이 부딪힌다. 쓰디쓴 소주도 손아귀가 얼얼하게 찬 맥주도 잔뜩 기름을 빼 비계가 더 고소한 삼겹살과 함께라면 술~술~ 제 이름을 부르며 잘도 넘어간다.
가장자리는 타고 가운데는 여전히 핏기가 남은 붉은 살점은 탄화한 단백질의 단내와 소의 것이지 내 것인지 모를 질깃함으로 입 안을 가득 채운다. 고기를 씹는 고기인 나. 잡식인 내가 초식이거나 또 잡식인 너를 삼키는 과정은 엄숙하고도 잔인한 생존의 의식이다. ‘맛’이라는 쾌락과 향유의 요소가 없다면, 제의와도 같을 육식의 현장. 나는 먹고, 너는 먹힌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서로를 씹고 또 씹히며 집단으로 사냥하고 개인으로 살아남는다. 마취제 같은 매케한 연기 속에 상처의 기억은 혼미해지고 공존의 기억은 새로워진다.
규탄대회와 개그콘서트를 왔다갔다하는 분위기가 파도타기와 시도 때도 없는 건배 제의로 뒤집히고 다시 돌아오는 다이내믹한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갈빗살과 삼겹살은 동이 나고 이제는 식사를 주문할 차례다. 그렇게 채우고 마신 뒤에 뭘 또 먹을 생각이 나나 싶지만, 우리는 그저 밥심으로 사는 민족인 것이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었대도 고기는 반찬이거나 잘 봐줘야 안주에 불과하다. 주력 메뉴인 고기에 관해서는 싼 게 유일한 장점이었던 이 집은 식사 메뉴로 공기밥에 더해 나름 먹을만한 열무냉국수를 내놓았다. 나랑 열무냉국수 나눠 먹을 사람! 여기 저기 손을 드는 사람들이 짝지어 국수와 밥을 주문한다. 술잔을 좇아 이바구 상대를 좇아 몇 번은 자리를 바꾼 사람들은 니 젓가락 내 젓가락 구분도 이미 잊었다.
들고 나는 대로 몇 번씩 재배치가 이루어진 자리는 마침내 서운했거나 고마웠던 속마음을 토로할 상대를 찾아 종착역에 도달했다. 그리고 내 앞에 도달한 아기 세숫대야 만한 스뎅 그릇은 슬러시 상태의 얼음 국물이 보기만 해도 이가 시린 열무국수가 담겨 있다. 반을 가른 완숙 달걀을 딱 하나씩만 올려주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 엄격한 대한민국 표준용량에 어찌 이의를 제기하리. 잘 익은 열무김치가 쫄깃한 소면 위에 수북이 올려져 있으니 반찬도 따로 필요 없다. 자, 이제 드십시다요!
옆에 앉은 그는 오늘 내게 할 말이 있었다. 그 때는 미안했어요. 별 말 안 해줘서 고마웠고. 뭘 뻔히 사정 다 아는데요. 아마도 초반엔 이런 말들이 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도 몇 번의 소맥이 파도를 탄 지금, 우리는 모두 알콜의 은혜를 받아 공평하게 무뇌아가 되어 즐겁다. 평소 같으면 식사 한번 같이 할 생각도 안 했을 그와 고개를 맞대고, 도시락 안 가져온 짝꿍에게 선심을 쓰듯 한 그릇에 담긴 열무냉국수를 나눠먹는다. 어, 어, 꼬부라진 혓바닥에서 알코올 충만한 뇌 속까지 시원하게 고속도로가 뚫리는 것 같은 이 맛! 입으로는 서로 더 먹으라 권하면서, 각자 바쁘게 젓가락과 숟가락을 놀리는 건 좀 모순이지만. 양이 어마어마한 국수를 갈라먹을 그릇을 따로 달라하기도 귀찮고, 그럴 정신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최단시간에 최소용량으로 최고의 효과를 보여주는 알코올의 여신이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에고, 머리는 깨질라 하지만 가슴은 따뜻해지는 회식의 밤. 삼겹살 회식의 끝은 역시 열무냉국수지!
자정이 넘었는데 2차를 가자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한 상사를 이끌어 택시에 탄다. 세상에서 제일 쿨하고 전략적인 그녀가 오늘은 왠일로 이렇게 달렸는지. 기대서 그냥 자라는 대도 굳이 고개를 들고 횡설수설하던 그녀가 울컥, 아픈 속내를 게워낸다. 어떡하라구… 내가 어떻게 처자식 딸린 저 아저씨들을 잘라내냐… 어쩌라구, 나더러… 툭툭 내뱉다 끊어지는 그녀의 나즈막한 고해성사가 유리조각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젠장. 구조조정의 밤은 깊어가고, 택시는 인적 드문 밤 거리를 무섭게 내지른다. 내일이면, 그녀가 한 말을 기억 못하길 바랄 뿐이다. 먹고 먹히는 육식의 밤. 열무냉국수로도 씻어내지 못한 살기는 고단한 꿈 속에서 떨쳐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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