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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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꿈의 기록
10기 김정은
“너는 왜 어머니의 집을 떠나려느냐?”
“행복을 찾았기 때문이지요.”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를 변주하여
서른 평이 넘어 뵈는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이다. 이삿짐을 풀었다. 거실에는 시어머니와 아가씨가 분주하게 짐을 나르고 있다. 나는 안방에 들어간다. 안방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화장대! 몬드리안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듯한,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이 화장대는 참으로 세련되었다. 처음 보는 물건인데, 왜 이 물건이 내 안방에 들어와 있나? 그 물건의 고혹적인 자태에 취해 나도 모르게 슬쩍 쓰다듬어 본다. 엠디에프 무늬목도 아니고, 나무 모양 시트지를 붙인 것도 아닌, 이건 완전 고급스런 백 퍼센트 천연 원목의 촉감이다. 뭔가 이상하다. 이 물건 정말 내 물건인가?
-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이젠 너도 화장도 좀 하고 살아라.
이 화장대는 바로 시어머니의 집들이 선물이었다. 새 집에서 새 마음으로 집도 예쁘게 꾸미고 나도 예쁘게 가꾸면서 살라는 의미에서 어머니는 고가의 화장대를 장만했다 하셨다. 며느리는 결혼 후 이사를 일곱 번이나 하면서도 화장대를 들이지 않았고, 우리의 안방은 언제나 빈틈없이 자리 잡은 책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책 욕심 많은 아들을 위해, 며느리가 혹시 여자로서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있지나 않나 짐작하셨던 것이다. 화장대의 거울을 들여다 본다. 화장? 이제 화장 안 하면 안 되는 나이인가? 화장 안 한 내 모습이 보기 흉한가? 사실 난 화장에도 화장대에도 관심이 없었다. 여태 안 산 것이지, 못 산 건 절대 아니었다. 온 가족이 함께 쓸 수 있는 소파나 식탁이라면 몰라도 화장대를 사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께서 주신 선물이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대도 화장대지만, 언감생심 도대체 이 넓은 아파트는 무어란 말인가? 우리 부부는 이런 아파트를 살 형편도 안 될 뿐 더러, 빚을 내어 사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장기 전세로 이 집을 얻었다고, 이제 전세금 올려 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다! 전세 계약만료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직전, 우린 서울의 소형 아파트를 팔았다. 그 돈으로 이곳의 대형 아파트를 전세 얻고 잔액이 얼마간 남아 얼마나 든든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혁신 초등학교가 뭔지, 그간 서울과 일산에서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이 우루루 몰려오게 되면서, 혁신 초등학교에서 1분 거리라는 이유로, 지난 2년 간 전세금은 거의 1억이 더 올랐다. 오른 전세금을 어떻게 마련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거 참 잘 되었다. 휴우~~.
- 언니, 이 집 엄마가 오빠 몫으로 미리 마련해 두신 거예요. 이제 전세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거실에서 짐 정리를 하던 아가씨가 들어와 내게 속삭인다. 정~말? 그럼 우리 집이 생긴 거란 말이야? 이제 전세금 걱정은 안 해도 된단 말이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 집이라 생각하며 이 방 저 방 둘러본다. 괜찮다. 이 정도면 우리 네 식구 살기에 과하다.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와 TV가 놓여져 있다. 소파는 내가 어릴 적부터 갖고 싶었지만 여태껏 못 가진 물건이다.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차 한잔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그 장면! 내가 얼마나 고대했던 장면인가. 그런데 이상하다. 보기엔 엄청나게 편안해 보였었는데, 남의 신발을 신은 듯 이 소파 왠지 불편하다. 소파와 TV가 놓여져 있는 이웃집의 거실을 평소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막상 내 거실이 그렇게 되고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헌 책 좋아하는 남편을 둔 덕에, 헌책방이라도 차릴 듯, 우리 집 거실은 양 벽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매일 너저분하게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리곤 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모던 심플하게 거실을 꾸밀 거야. 소파는 여자의 로망이자, 내 로망이라구!’ 하지만 지금 난 내가 꿈꾸었던 거실에서 나의 로망이었던 소파에 앉아 불편해하며, 우리의 헌책방 거실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느 새 아침이다. 나는 백 퍼센트 천연 원목 가구로 안락하게 꾸며진 안방에서 자고 일어났다. 나무 향기가 솔솔 나는 침대 프레임에, 편안하게 단단한 매트리스, 거기에 새 하얀 색 보송보송한 천연 광목 침구는 쾌적함까지 더했다. 게다가 난 닿는 느낌이 보드라운 실크 원피스 잠옷까지 입고 있다. 남편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몬드리안 화장대가 내 눈 앞에 있다. 거실로 나가본다. 역시 커다란 소파와 TV가 있다. 이게 꿈이 아니었단 말이지? 여기가 우리 집 맞단 말이지? 그럼, 난 어머니께서 마련해 주신 이 집에서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기만 하면 된단 말이지?
아! 그런데 내 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내 오래된 코스트코표 플라스틱 책상은? 나와 산전수전을 함께 겪은 내 노트북은? 그리고 남편의 헌책들은? 내가 요즘 읽고 있었던 그 책들은 어디 가 버린 거지? 여기서 나는 뭘 하나? 너무 시시하고 싱거워서 하면서도 하지 않는 듯 했던 나의 새로운 일들은? 지난 3년 간 함께 한 내 친구들은? 그녀들과 함께 만든 우리의 동아리는? 이 곳엔 내가 했던 일도, 나와 잘 통했던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만든 동아리도 없다. 여기엔 내가 해야 할 일도, 걱정 거리도, 고민 거리도 없다, 그저 편안함과 안락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 으악! 나, 돌아갈래!
그렇게 소리치며 나는 잠에서 깨었다. 꿈이 얼마나 생생했던지 나는 바로 거실로 나가 보았다. 너저분하게 널브러진 책들, 양 벽에 걸친 헌책 가득한 책장들, 안방엔 몬드리안 화장대도 없다. 내가 꿈을 꾼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가 우리 집, 우리 집 맞다. 휴우~~! 이 집이 꿈 속 그 집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미처 몰랐다. 나의 일상들이 내게 그토록 소중했었는지. 꿈이라지만, 거의 복권 당첨 수준의 안락한 생활이 찾아왔다면 얼씨구나 하며 좋아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이상하게도 지금의 일상을 벗어나 안락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내겐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꿈 속에서 그것이 꿈이었으면 하며 지금의 일상을 그리워했다. 왜 그랬을까? 3년 전, 이른 나이에 실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으며, 그 동안, 어둠침침한 인생의 터널 지대를 묵묵히 걸어왔다. 지난 3년 간 나는 전환의 중간 지대를 때론 외롭고, 때론 우울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며 그 과정을 그렇게 보낸 것이다. 미리 계획한 성공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내디딘 것이 아니라, 언제가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전환의 종결을 향해 구불구불한 길을 헤매며, 인생이 무엇인지 알아 간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전환의 중간지대를 보내며 나는 비로소 내 일상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37년을 함께 한 아내를 잃은 윌리엄 브리지스처럼, 나도 마치 잘못된 지도를 들고 서 있는 여행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지도에도 없는 장소에서 헤매고 있는 여행자 같았다. 일이 좋았고, 일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나는, 일을 그만두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듯한 절망감을 맛보았었다. 집안일에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기에는 내 건강에 무리가 있었다. 내 옆에 든든한 동반자가 있었지만, 그 ‘헤맴’은 오로지 내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집안일을 안 할 수는 없었으므로 집안일에서 무언가 한 가지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여행지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외로운 여정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라는 작은 지푸라기를 물고 늘어졌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집안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고, 그것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동아리를 만들어 같이 활동하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 둔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나의 ‘헤맴’은 그렇게 구불구불하게 흘러가고 있다.
내 비록 어렵고 곤궁하다 하더라도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진 않으리라. 왜냐?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다. 내 일상을 꼼꼼히 들여다 본다. 나는 직장을 나와 내가 좋아했던 일을 잃었지만, 반대로 얻은 것 또한 많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변화로 인해 시작된 전환의 중간 시기를 거치며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일상들로 인해 나는 지금 행복하다. 모든 물들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바다로 가지 않고 자기 자리에 남아 맑게 정화된 우물처럼, 나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곳이 모든 이들이 도달하고 싶어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도 좋다. 나의 ‘헤맴’의 끝에 있을 내 자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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