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에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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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따가우나 바람은 맑고 시원하다. 군데군데 구름이 있었지만 가을하늘의 푸른 얼굴은 언제
봐도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들녁은 절정을 달리는 벼의 황금물결 가운데 여기저기
올해의 결실을 수확하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경운기로 밭을 갈아 엎고는 흙더미를 헤쳐 고구마를 수확하는 가을걷이가 이채롭다. 오늘은
유난히 고구마 수확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랫집 농부에게 물었더니 오늘이 고구마 캐는 날이라고 달력에 붙어 있지 않더냐고 농담을 한다.
강화읍 양도면 건평리 엘림황토촌, 유명한 외포리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이 곳 주인 부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2년쯤 되었나 보다. 몇몇 벗들 부부를 대동하고
이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때 마침 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뒤덮였다.
우리는 언덕에 올라 바다를 굽어보며 야호를 외치기도 하고, 눈 위를 뒹굴기도 하며 어린애들
마냥 즐거웠다. 황토방 거실 가운데 커다란 난로에서는 나무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날 밤 불 때기를 좋아하는 내가 불질을 너무 세게 해서 친구들이 모두 이불 위로 기어올라 잠을 잤다. 그 때 난로에서 구워 먹은 고구마가 이 곳 명물 강화노랑고구마였다. 맛있다고
모두들 한 두 박스씩 샀는데 나는 세 박스를 사서는 그 해 겨울을 고구마와 함께 보낸 추억이 있다.
주인부부는 6년 전인가 이 곳으로 귀촌하여 농사를 지으며 펜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언덕의 모두 고마 밭인데 노부부 둘 만이 짓기에는 너무 힘에 부치니 우리더러 주말농장 하기를 권유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벌써 2년째 고구마 주말농장을 하고 있다. 말이 주말농장이지 올해는 고구마 모종을 심을 때 한 번 오고 이번이 두 번째다. 좀 심했나? 그래도 이 집 부부는 우리가 오면 마냥 반가워 한다. 이번에도 작년처럼 우리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온 가족이 고구마 추수 나들이 오는 줄
알고 집에서 기르는 토종닭 두 마리를 잡아 점심을 준비하셨다. 우리가 주말농장 하는 농군이 아니고 일년에
한 두 번 들리는 큰 손님이 된 것이다.
올해 고구마
결실은 작년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것 같다. 세 고랑 농사에 3박스가
전부였다. 하긴 모종 꽂고 수확만 했으니 그 정도도 감지덕지다. 아랫집
농부는 우리와는 달리 농가를 전세 낸 본격적인 주말농장 농부다. 그도 고구마를 조금 심었는데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고구마를 두더지가 터널을
뚫어 다 쓸어 버렸다고 하소연을 한다. 두더지를 잡을 방법을 묻자 주인 아저씨는 밭을 지키고 썼다가
땅이 꿈틀거리면 그 자리를 바로 삽으로 파 뒤엎어 잡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두더지란 놈이 굉장히
빠르므로 아주 잽싸게 잡아야 한다고 했다. 하늘로는 새가, 지상으로는
고라니가, 땅 속으론 두더지가 일 년을 땀 흘린 결실을 공격하니 농부 또한 전방위로 방어태세를 게을리
할 수 없다. 공군, 육군에 지하군까지 상대해야 하니 농부의
전선도 참 만만찮다.
비록 세
박스에 불과하지만 고구마를 수확했으니 포도주만 담으면 나의 월동준비는 끝난다. 포도하면 강화포도, 강화포도 중에서도 이곳 건평리 포도를 알아준다고 한다. 햇빛과 바람이
좋아 포도알이 굵고 맛 또한 최고라고 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함께 동승해서 아주머니 친구가 운영하는
포도 농장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역시 소문대로 맛도 좋은데 가격도 착했다. 5킬로그램 들이 한 박스가 만 칠천 원이다.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좋은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사기도 하고, 이 좋은 햇빛과 바람은 덤으로 즐기니 오랜만의
시골나들이가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내는 주인아주머니가 부업으로 만드는 새우젓의 단골로 꾸준히 사
먹어 왔는데 이번에는 지인들에게 광고하여 여러 명의 주문을 받아왔다. 온 김에 아이들 생각하며 토종
닭도 두어 마리 사고 고구마 줄기, 풋고추에 얼갈이 김치까지 얻어서는 차에 싣고 보니 차가 아주 빵빵해
졌다. 아내는 마치 시골 친정나들이 하는 새댁마냥 즐거워 보였다.
주인 아주머니가
들여온 닭 백숙에다가 아저씨가 포도만으로 발효시킨 진짜 포도주를 반주로 마시며 내가 아저씨에게 물었다. 강원도
둔내 통나무 집의 기름보일러는 돈을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에요. 장작 때는 난로를 설치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저씨는 나를 인도하여 감춰둔 자신의 비장의 난로를 보여주었다. 귀촌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충북 음성에 있는 난로 제작 학교에 입교하여 열효율이 좋은 난로 제작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하신다. 바람이 세차고 겨울이 길고 추운 이 곳 강화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난방이기 때문이다. 그 때 난로 선생이 직접 이 곳을 내방하여 하루 종일 걸려 제작해 준 난로인데, 특별한 건 나무 투입구가 위에 달린 것 빼고는 투박하고 무겁기 짝이 없는 평범한 난로로 보였다. 아저씨는 “이게 보기엔 이래도 연소실이 두 개라 완전연소가 되고 굴뚝 차단 밸브가 있어 열 손실을 막아주어 열효율이 최고인
난로야”라고 자랑하신다.
내가 이토록
난로에 애착을 갖는 것은 남모르는 꿈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장작 타는 내음을 종일 맡으며 사는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다. 도끼질하여 장작 패는 것도 꿈에서도 하고픈 일이다. 통나무 장작을 산처럼 쌓아둔 집을 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 고구마
수확하여 창고에 들여 놓고 포도주 한 독 담은 다음에 장작을 패서 쌓아두면 나의 월동준비는 끝난다. 땅거미가
깔리고 난로에 장작이 타오르고 램프의 심지를 돋우면 읽고 쓰는 책들이 나의 밤을 찬연히 밝힐 것이다. 이럴
때 함박눈이라도 듬뿍 내려 교통이라도 두절되면 더욱 좋겠다. 나의 찬연한 밤이 끝이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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