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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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드그렌 그녀처럼
10기 김정은
- 이 아이를 꼭 낳을 거야.
내 나이 열 아홉 살에 나는 아이를 가졌다.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신문사의 편집장으로 가정이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가 가정을 정리하고 나에게 온다고 했을 때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켜 낼 것이다.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나는 내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다. 어머니는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건 나를 굳게 믿는다는 표시였다.
나는 대도시 스톡홀롬으로 향했다. 거긴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었고 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배는 불러오고 학업은 고되었지만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 견딜만했다. 만삭이 되도록 아이를 가진 것을 눈치 챈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첫 아들을 낳았다. 아이 낳은 사실을 알릴 수 없어서 나는 아이를 낳자마자 학교에 복귀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서 직업도 없이 아이를 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년의 부인에게 내 아들을 양자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부인의 집은 스톡홀롬에서 기차로 열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는 휴일마다 내 아들을 만나러 갔고 아들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 오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 아이는 그 부인이 엄마인 줄 알았다. 길러주는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실망과 좌절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분명 나다. 내가 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나는 내 아이를 데려와 키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공부하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나에게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애당초 눈곱만치도 없었다. 나는 내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내 아들을 친아들처럼 대할 것이라 약속했다. 나는 그거면 된다. 그가 내 아들을 친아들처럼 여겨준다면 나는 이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곧 이 남자와 결혼했고 내 아들을 데려 왔다. 꿈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내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내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 나는 아들과 친구가 되어 뛰어 놀았다. 몇 년 후 둘째 아이를 가졌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둘째는 딸이었다. 이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 이 아이는 폐렴에 걸려 꼼짝 없이 침대에 누워지내야만 했다. 너무나 지루했던 아이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희한한 소녀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만들어 들려주었다. 그것은 사실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때까지도 동심을 가지고 있었고 내 속에는 괴력을 가진 소녀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3년 뒤 어느 날 나는 빙판 길에서 미끄러졌고 발이 삐어 한동안 집안에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거동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3년 전 둘째 아이가 너무나 재미있게 들어주었던 그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다가오는 둘째 아이의 생일 날 선물로 줄 요량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이다. 그 때 내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 * * * *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아스트리드 린트그렌(1907~2002)의 이야기다. 열 아홉 살 린드그렌은 당차게 아버지 없는 아들을 낳고,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도 한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딸도 낳는다. 마흔의 나이에 전세계 아이들이 열광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이후 린드그렌은 백 권이 넘는 책을 썼으며, 그녀의 책들은 전세계 9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린드그렌의 책은 1억 4천 5백만 권 이상 팔렸으며, 그 양은 쌓는다면 320미터 에펠탑 175개 분량, 꽂는다면 지구 세 바퀴 분량의 책들이었다. 사후에도 매년 2백만 부씩 팔리고 있다고 한다. 아동문학가로 사회운동가로 린드그렌이 스웨덴의 교육, 문화, 환경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할 수 있다.
- 삶은 너무나 부서지기 쉽고, 행복은 붙잡아 놓을 수 없다.
마흔에 시작하여 100권이 넘는 책을 쓴 린드그렌, 그녀는 도대체 어떤 필살기를 가졌을까? 린드그렌 사후 밝혀진 그녀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 린드그렌 생전에는 그녀가 미혼모로서 당당하게 아들을 낳고 사랑으로 키웠다는 점과 그 아들을 데리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작가로 살았다는 점 외에 다른 기록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고 한다.
린드그렌, 그녀가 밝히기 꺼렸던 그녀의 실제 삶은 사실 상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삶이었다. 생전의 그녀가 행복한 나날들이라 이름 붙인 그 시기에, 그녀의 남편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 상태로 외도 중이었다. 그녀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을 집필했던 그 무렵 이미 남편은 외도 중이었고 그녀는 심적으로 상당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한창 작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갈 무렵 그녀의 남편은 알코올 중독으로 숨을 거둔다. 그녀가 항상 죄책감을 느끼며 끝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일찍 그녀와의 탯줄을 끊고 독립한다. 어린 나이에 그는 결혼과 출산 이혼을 동시에 한꺼번에 겪는다. 또 다시 사랑에 빠져 재혼해서 아이들을 낳지만 그 역시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며 뇌종양으로 어머니인 린드그렌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
린드그렌의 삶에는 그녀가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녀는 인생의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불행을 글로 썼다. 그 글들은 사회적으로는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되었고, 그녀 자신에게는 치유 효과를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녀 이야기의 중심에 아이를 두었다. 그 아이는 부모가 없는 고아이기도 했고, 고아원을 탈출한 꼬마방랑자이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낯선 곳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도 아이만의 기지와 재치, 유머로 수많은 어려운 난관들을 척척 해결해 나간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그녀 삶의 문제들을 오롯이 아이들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고는 그녀만의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이야기는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린드그렌, 그녀의 필살기는 고단한 삶과 동심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들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동심으로 풀어내는 것! 내가 생각하는 린드그렌의 필살기는 바로 그것이다.
린드그렌은 가장 사랑 받는 동화작가 중 한 명이자, 그녀의 모국 스웨덴을 보편적 복지 국가로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170개가 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학교가 세워졌다. 냉전종식 후 러시아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린드그렌의 책들이라고 한다. 한 개인의 고단한 삶과 동심이라는 필살기로 이루어낸 작품들이 난로가 되어 개인을, 사회를 나아가 세계를 천천히 따뜻하게 데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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